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 것 - 자전거의 역사 문화 오늘
데이비드 V. 헐리히 지음, 김인혜 옮김 / 알마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페달을 밟으면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또는 적어도 그럴 것만 같았다. 또한 그것은 당신이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떠올라 당신을 유혹하는 진정한 연애의 경험이다. _본문 중에서

어릴 적,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는 중 친척 누나를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누나는 날 불러 세우더니 뒤에 타라 말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누나는 빨리 달릴테니까 조심하라며, 위험하니까 자기 허리를 붙잡으라했다. 왜 그랬을까. 그닥 조숙한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누나의 허리를 잡는 게 몹시 쑥스럽고 조심스러워 떨어진 낙엽이라도 줍듯 옷깃만 살짝 잡았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땐 미술학원에 다니는 여학생을 짝사랑했었다. 그림 그리는 손이 빠른 편이라 허여멀건한 석고상 면상 휘리릭 그려 주곤 여학생 나오길 기다렸다가 굳이 바래다 주겠다며 졸졸 꽁무니를 따라가곤 했었다. 자전거를 옆구리에 끼고 친구도, 연인도 아닌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걷는 밤거리는 참 시리면서도 예뻤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날 뒤에 태웠던 친척 누나는 현재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아줌마가 되었고, 짝사랑이자 첫사랑 그녀는 시집 간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자전거는 잊혀진 지 오래고, 아빠가 된 난 세 살 아들을 세발 자전거에 태워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아저씨가 되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사라져갔지만, 기억 속의 자전거는 여전히 은빛 바퀴살을 반짝이며 낭만의 거리를 달리고 있다. 또는 두근거리며, 조심스레 고향이나 유년의 거리 어딘가를 달리고 있다.

그러던 중, 추억을 더 풍요롭게 해줄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 것>이 바로 그 책이다. 낭만이 넘칠듯 담겨 있다 하나 '자전거 레이서를 본업'으로, 소설가를 겸업으로 한 김훈 선생님의 <자전거 여행>처럼 사람 냄새 나고 사람의 길이 느껴지는 자전거 여행기는 아니다. 오히려 자전거가 인류에게 처음 찾아온 순간부터 현재까지. 자전거의 발전과 역사 등 자전거 문화사가 담겨 있는 무게 있는 책이다. 저자가 역사학자인지라 문체는 다소 딱딱한 편이지만, 건조함을 상쇄시켜줄 자전거 발명 당시의 기사나 사진, 도판 등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2003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역주하고 있는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의 모습을 만날 수 있고, 하이브리드카가 소개되는 속도의 시대에 왜 인간을 동력으로 하는 두 바퀴 탈것인 자전거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교통수단인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삼겹살에 고기만 있으면 팍팍해서 그 맛을 못느끼듯, 겹겹의 고기 사이에 낀 적당한 기름기마냥 아름다운 도판, 엔틱함마저 느껴지는 당대의 기사글 등이 단순한 인쇄 뭉치를 '책'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책'으로, 그리고 심미적 기능까지 더해진 고급스러운 장정이 서가를 빛내주는 엔틱한 소품으로까지 책의 물성을 진일보시켜준다. 아직 절반도 채 못 읽었으나 보듬고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흡족해 진다고나 할까. 넘칠듯한 풍부함과 유려한 서술, 꼼꼼하고 빠트림 없는 조사가 책의 완성도를 한껏 높이니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라면, 자전거를 더 알고 싶고 더 사랑하고픈 이라면 손길이 자연 끌릴 수밖에 없다 하겠다. 

이미 많은 것이 변해버렸고 흘러간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순 없다고 하나, 낡은 앨범의 갈피를 넘기듯 책을 넘기며 옛 사진과 기사를 보며 추억에 빠지기 좋으니, 곁엔 따뜻한 차 한잔 있으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궁합이겠다. 문화사 관련 책을 읽으며 이처럼 여유있는 호흡으로 책장을 넘긴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슬로우 슬로우 퀵퀵. 춤 추는 스탭만 슬로우가 필요한 게 아니다. 때론 삶에도 '슬로우'가 필요하고, 느린 걸음걸이처럼, 칸타빌레처럼 삶을 즐길 때 비로소 삶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달나라엔 옥토끼가 없다는 것을 닐 암스트롱은 '겁나게 빠른' 우주선을 타고 가 증명했다지만, 고환암 판정을 받은 랜스 암스트롱은 투병 후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대회 7연승이라는 전설의 기록을 '겁나 빠른' 우주선에 비해 '겁나 느린' 사이클을 통해 남기기도 했다. 꼭 비싼 연료 때가며 우주선을 타고 내디딘 첫발만 인류에게 기억되는 게 아니다. 자전거 선수로서는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인 고환암을 이겨내고 땅을 밟고 자전거 바퀴를 굴려서도 얼마든지 인류에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느리고 힘들다고? 아니다. 우주선의 속도보다는, 바람을 맞고 달리는 자전거의 속도가 우리에게는 절실한 '인간의 속도'인 것이다. 늦기 전에, 한번쯤 되돌아가 보자. 그리고 떠나 보자.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것을 이용해 춤 추는 속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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