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
굽시니스트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곰이, 마늘과 쑥만으로 어둠에서 100일을 견디어 사람이 되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나라 신화니 변신하는 곰에 관한 이야기를 그러려니 하고 들었었지만, 머리 굵어지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어찌 곰이 태양을 피하고 채식만 하여 털가죽 벗고 사람이 된단 말인가. 서점에서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를 접했을 때의 느낌이 딱 그러했다. DCinside와 Egloos라는 다소 동굴 같은, 내면으로 파고드는데 선수인 유저들의, 개성 강하나 다소 음지인의 기운이 승한,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 그 중에서도 살짝 벤치멤버 느낌이 나는 무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만화가 책으로 엮여 만화 출판계에 떡, 하고 등장하다니. 소림, 무당, 화산 등의 무림 정파에 사파의 살수들이 독수를 크게 날렸다고나 할까. 윽, 당했다! 이 독한 살수는 처녀와 합궁해야만 치료할 수 있는 '미혼향'이.... 인 것은 아니고, 어쨌든.

웹상에서 이 만화의 연재분을 접했을 땐 "뭐야, 메가쑈킹만화가는 '발로 그리는 <탐구생활>이라고 자기 작품 유머 코드를 스스로 희화화 시켰는데, 굽시니스트는 진짜 손이 아닌 발로 그림을 그렸잖아!"라고 놀란 게 1차요, 발로 그린 엉성한 그림임에도 수많은 폐인 유저들의 칭송을 받으며 '본좌'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에 놀람이 2차였다.

그런데 진정한 놀람 3차는 바로 이것이니, 발로 그린 그림이라며 비웃던 내가 하루 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연재 1화부터 최종화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내렸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순히 '재미있다'라고 말하기엔 심히 부족하다 하겠다. 그럼 뭘까. 이 작품의 힘은.

일단, 그림이 그 힘이 아님은 분명하다. 굽본좌를 섬기는 폐인들께 몰매를 맞을지 모르겠으나, 짚고 넘어갈 건 확실히 하자. 굽시니스트는 웹에서 연재하던 그림을 거의 새로 그리다시피 해서 책으로 냈다고 하는데, 솔직히 새로 그렸어도 아주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그럼 뭔가, 도대체 그 힘이. 그렇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조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올시다이다. 새롭고 전복적인 시각이야 얼마든지 많고, 상상력이 무한질주하는 만화에서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소재'는 널리고 널린 게 아니던가.

그렇담 지칠 줄 모르는 패러디? 음... 미드, 일드, 일애니, 정치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아닌 척 슬쩍 끌어다 쓰는 솜씨가 일품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도 그 힘의 전부라 하기엔 약하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 패러디라는 방식을 차용해 나랏님이며 뭐며 비비 꼬고 비웃는 것은 일상다반사가 아니던가.

그럼 뭘까? 조금 허무한 답이 될 수 있겠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이 작품이 책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힘을 부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첫 책을 낸 굽시니스트에겐 과한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이 작품은 훗날 양영순의 <아색기가>와 같은 작품으로 한국 만화사에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양영순과 굽시니스트의 상당한 필력 차이는 차치하고, 양영순이 순식간에 만화계의 총아로 떠오른 것은 젊잖은 양지의 만화계에 음담패설 수준의 내용을 맛깔스럽게, 야하게, 그러나 천박하지 않게 표현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노골적으로 야하지만 훌륭한 데생과 은근한 표현으로 속되다 여겨지던 성의 뒷담화를 양지로 끌어낸 공. 곰팡이 핀 성기를 광화문 사거리에 드러내되 변태로 나서지 않고 행위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양영순과 저 <아색기가>의 공이 아니던가.

서브컬처. 마이너 인생들의 문화. 그러나 생을 마이너, 메이저로 가르는 게 무엇인가?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촛불을 들고 모입시다!'라는 외침. 애당초 마이너 중의 마이너가 아니던가. 훅 불면 꺼져 버리는 촛불로 컨테이너 성벽을 어찌 타 넘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누리꾼의 외침, 모든 매스컴이 외면하던 마이너 촛불은 음지(?)의 매체를 통해 전파되었고, 곧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중심의 자리에 섰다. 하지만 그게 메이저일까? 아니다. 여전히 마이너이다. 단지 수많은 마이너들이 힘을 합한 것뿐이다. 

성은 개방되고 초딩도 아빠 주민번호로 성인 사이트에 접속하는 시대다. 더이상 순진한 '아색기가'를 들고 나와서는 만화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우리나라 만화가들, 세계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상당한 그림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발로 그린 그림이, 성이 아닌 역사와 사회를 들고 나왔다. 패러디의 완숙미나 작법, 표현의 세련됨은 차치하고서라도, 서브컬처를 향유하며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말하며 성냥불로 언발 녹이던 굽시니스트가 어느새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역사는 되풀이되며, 독재자는 지금도 살아있다는 무거운 이야기를, 세라복 입은 일본틱 여고생을 등장시켜 낄낄거리며 말하고 있다. 양영순이 곰팡이 핀 성기를 들고 광화문에 나섰다면, 굽시니스트는 피와, 독재와, 웃기지도 않는 고집을 유니폼으로 코스프레한 모습으로 광화문 거리에 나섰다. 그 코스프레를 지켜보고 있자니 웃기다가, 비통해지다가, 씁쓸해진다. 세상을 상대로 장난질하는 게 어디 저 독재자 히틀러뿐인가.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책 좀 읽었다 하는 독자분들, 눈썰미 좋은 독자분들, 성에 안 찰지 모르겠다. 부족함이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첫 책이다. 세련됨은 없어도 엄청난 에너지가 담긴 작품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양지에 나왔다 하여 행여 백로들이 소위 말하는 '따'를 시킬지 모르겠으나, 이 까마귀 같은 작품은 3단 변신 및 합체 가능한 엄청난 '놈'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다면 공감하실듯. 액션과 사랑, 우정, 드라마 등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만화판에, 역사의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한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아무도 이런 것을 한 적이 없으니 분명 블루오션에 빤쓰입고 뛰어든 것이며, 분명히 마이너한 수많은 독자들은 그를 굽본좌로 기억할 것이다. 아주 수많은 마이너 독자들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