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이다 -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대왕 세종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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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저의 『세종-나는 조선이다』를 읽고

오백여년의 조선 왕조에서 가장 성군을 들라면 대부분이 전기에는 세종대왕이요, 후기에는 정조 대왕을 드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그 만큼 소신 있게 정치에 임했으며, 특히 백성들을 위한 애민 사상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4대 왕으로 22세에 즉위하여 32년간 조선을 다스렸고,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저자가 세종을 자신감있게 제목을 달고 있을 정도인 “나는 조선이다.”라는 말이 세종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만큼 세종대왕 때 조선의 진정한 정체성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세종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세종을 보좌한 많은 신료들과 전문가들의 합작품이라 생각할 때에 분명 세종대왕 시대가 조선왕조 시대에는 가장 앞선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세종은 왕으로 전혀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세종 위로 형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셋째인 충녕대군은 왕에서는 저 만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종은 처음에는 참으로 미약하고 힘없고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나름대로 주어진 한도 내에서 꾸준하게 학문을 연마하는 노력들이 나중 양녕대군의 폐 세자로 인하여 결국 세자로 드디어 세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자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세종이 큰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끊임없는 학문을 닦고 준비해온 결과이고 자신감과 긍지를 갖고 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그 어렵고 힘든 제왕의 길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비록 셋째였지만 형들보다 더 뛰어난 왕재라는 것을 아버지인 태종이나 신하들에게 납득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왕이 된 세종은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을 확보하여서 최대한 전문가들을 활용하여서 각 분야에서의 훌륭한 업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과학의 위대한 발명인 자격루와 혼천의, 측우기, 금속활자에 있어서의 갑인자, 음악에 있어 아악의 정리, 황종율관의 제작 실험, 편경과 편종의 악기 제작, 신악의 창제와 정간보의 간행이 있었고,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의 오례가 정리되었다. 그리고 집현전을 활성화시켜서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집중 배치시켜 공부하게 하여서 조선 고유 문자인 훈민정음 창제가 이루어진 점이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의 최대의 발명이자 업적인 것이다. 그 만큼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또한 4군 6진 개척과 파저강 정벌을 실시하여 북방 땅을 개척 오늘 날의 국경선으로 확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도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뒷받침을 해주지 못한 것이다. 눈병을 비롯하여서 풍증,  임질 등 온갖 병에 시달리게 되면서 결국 마음의 병도 깊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증세는 차츰 고집스럽고, 괴팍한 늙은이기 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더니, 후대에 들어서는 사소한 일에 고집을 부리거나, 화를 내거나, 원칙 없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병들이 세종의 많은 업적에 대하여 더 깊은 그림자로 짙어지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세자인 문종마저도 병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세종의 근심은 깊어지게 되었고 결국 즉위한 지 32년 만에 54세의 나이로 막내아들인 영웅대군 집에서 승하하고 만다. 세종은 위대한 군주로 나라가 자라나고, 문화와 사람이 자라날 수 있는 때를 마련하였고, 안목은 현재와 먼 미래까지 보면서 정책을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조선역사에 있어서 세종은 과거와 동시에 미래의 왕이고, “조선 그 자체”라고 하여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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