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상처받지 않을 권리'


나에게는 이 책 제목이 유쾌하지 않았다. 굳이 상처받지 않았다고 느꼈으며, 나온지는 꽤 되었지만 아픈 현실을 위로하려는 어느 책과 비슷한 제목으로 거짓 위안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이 책을 봤을 때 다른 책과 차이를 느낀 이유는 저자 강신주 때문이었다. 책의 제목에서 전제되는,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한 숨겨진 사실은 우리는 다 상처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토닥이는 위로의 말보다 아픈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이야기 하는 멘토링, 혹은 현실을 위로하는 심리학은 대증요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은 우리 개인의 행동, 내면의 의식, 감정을 컨트롤하고 다시 사회로 되돌려보내지 사회 구조를 직시하게 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개인을 돌아볼 필요도 있지만 과연 반복되는 아픔이 꼭 개인의 잘못인가? 우리는 너무 개인을 혹사시키고 단련하고 남의 탓 하지 못하게 하는 독립적인, 자유를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혁명과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우리의 삶을 종교보다 더한 신념과 믿음으로 다스리는 산업자본주의는 그 의도를 교묘하게 은폐하고 반짝이는 보석과 에로티즘, 욕망을 사로잡게 하며 기독교와 비슷한 논리로 그를 유예하게 하여 더 폭발시킨다. 욕망은 참을수록, 금욕을 실행할수록 이를 얻고 난 이후의 효과는 더 커진다. 하지만 순간의 빛처럼, 오징어를 모이게 하는 집어등처럼 이는 파멸을 전제한다. 우리는 다시 소외로, 멋진 소비자에서 금욕을 실행하는 노동자로 변한다. 또한 독립과 자유를 가진 개인은 우리의 관계속에 삽입된 돈으로 인해 자유와 동시에 고독을 앓으며 괴로워하거나 무감각해져야한다.


 문학의 힘과 철학의 힘


이런 자유와 고독, 생산과 소비, 순간의 쾌락과 인내해야 하는 고통을 견뎌야하는, 그래서 어쩌면 분열증을 모두 앓고 있을 개인에 대해 저자는 문학과 철학으로 우리의 상황을, 결코 아름답지 않은, 탐닉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은 더 날카롭게, 숨겨진 구조와 상황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보통 이런 과정은 어렵고 복잡해서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강신주는 믿어도 된다. 그가 하는 설명, 혹여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말이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가 안내하는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철학의 무거움이나 복잡한 이야기를 문학, 보들레르의 시나 유하의 시로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꽤 이상적인 조합이다. 그리고 그런 피드백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것을 돕는다.


 우리의 계급을, 우리가 우리를 구별짓는 행위를 취향을 통해서 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을 때 보이지 말아야 할 곳을 들킨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듣게 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야기는 보다 더 상세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구별짓는 행위, 그리고 그 취향의 폭력성을 조금씩 보여준다. 취향은 너무나 당연한 개인의 것이라 믿었던 우리의 생각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이야기를 패러디한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금요일)'을 통해 자각하고 느낄 수 있다. 행하고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다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강신주는 그의 저작에서 항상 사랑을 이야기한다. 산업자본주의에 희생되는, 집어등에 이끌려 환희의 빛을 찾다가 결국에는 배 위에서 삶을 끝낼 오징어들처럼, 우리의 모습에 안타까운 시선을 던진다. 우리는 철학자가 누구건, 그들이 파헤치는 공통된 사실, 사람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과연 우리는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가?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돈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고, 페티시즘보다 사람 그 자체에게 애정을 느끼고, 휘황찬란한 보석과 명품이 주는 만족과 계급차이, 그보다 본질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모두 대할 수 있다면, 자본이 가지는 논리와 힘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말을 몽상가의 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가져다 주는 힘을 알고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의 모순, 양극화, 소외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 그 어떤 힘에도 포섭되지 않는 사랑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현실, 우리가 취했던 마약과 같은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나면 허하다. 하지만 보들레르가 취하고 싶었던 '악의 꽃'보다 유하가 바람이 불어도 혹은 불지 않아도 가야했던 '압구정동'보다 우리는 '사랑'과 사람을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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