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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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여고나 여대 앞에서 출몰하는, 여학생이 지나가면 입고 있던 바바리코트를 짠하고 펼치며 자신의 은밀한 곳을 보여주는 남정네들, 일명 바바리맨 말이다. 그런데 이 바바리맨이 우리가 매일같이 이용하는 사이버상에 나타났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바바리맨은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타인에게 보여주며 그 반응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싸이월드, 블로그에 자신의 내면까지 드러내며 타인과의 공감을 원하는 현대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판 바바리맨은 아닐까? (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터넷상에서 스스럼없이 자신을 공개하고 타인의 생활 뿐 아니라 마음까지 훔쳐보고, 보여주는 일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재밋거리다. 사이버 공간을 통해 별 것 아닌 '내 이야기'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흥! 그까짓 별거아닌 일상 중얼거리는 게 어쨋다고!' 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재미없는 사람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바로 '내 이야기'들이 세상에 충만할 때 비로소 세상은 재밌어지고, 건강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솔직한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졸깃하니 재밌다. 재미를 챙기다보니 그 속에 숨겨진 문화심리학이 절로 따라오는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샘앤파커스.2009).

 

저자인 김정운은 주구장창 '재미'를 강조한다. 재미있는 삶이 건강한 삶이고, 재미를 추구해야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 잘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니, 다들 바쁘게 일하느라 정신없는 세상에서 좀 배웠다 싶은 사람이 한다는 말이 놀으라고? 미치고 환장하겠다. 그런데 이 사람 얘기 들다보니, 틀린 말 하나 없다.

 

그가 말하는 재미있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법은 사실 별거없다. 곱씹어보면 사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행복하고 싶으면 구체적으로 자기만의 행복을 정의하고,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리추얼화(의식화)한다. 인생사 어쩌피 하던 안하던 후회하는 법,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덜 후회하고 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일단 저지르고 보라고 충고한다. -하지 말걸의 후회가 -했어야 하는데 후회보다 짧다나? 한편 우울해지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무조건 움직이는 게 약이라고 말한다. 집 밖에 나가 건물 상호만 봐도 집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니 만성적으로 우울과 친구 먹은 내가 필히 기억해야 할 문구다.

 

그러나 무엇보다 '재미'있는 삶을 위한 첫 번째 처방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재미의 비밀은 모두 자신 안에 숨어 있다. 그걸 찾아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만 하면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나의 존재는 타인의 인정, 사회적 지위 없이도 꿋꿋하게 나를 지탱해주고, 근면성실은 절로 따라온다. 나를 내가 컨트롤 한다고 느낄 때 삶은 그저 살아가는 데서 '재미'있게 사는 일로 변신한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여기까지 읽고 뭐가 그렇게 복잡해? 라며 머리 긁적이는 분이 있다면, 좋다. 저자가 말하는 초특급 시크릿을 알려주겠다. 바로... 감탄하기. 사소한 일이라도 좋다. 하루에 몇 번이고 감탄하라.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아낌없이. 그리고 감탄받아라. 엄청난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당신이란 존재에 대해. 별 것 아닌 일들에 대해. 처음엔 쑥쓰러울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은 어느새 얼씨구, 지화자같은 멋진 감탄사들을 잃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감탄도 습관이다. 여기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너그럽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놀라게 될지도.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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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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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아름다운걸! 이 아름다움을!"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홀함을 맛본 후 오스카가 남긴 말이고, 책을 덮으며 내가 해야 했던 말이다. 사실 이 대단한 책에 대한 감상은 이 한 줄이면 끝이다. 더 부연 설명을 해 무엇 하랴. 당신이 지금 할 일은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문학동네.2009)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나 고작 책에서 베껴온 문장 하나로 감상을 대신하려니 400여페이지를 열심히 채웠을 작가에게 미안해지는바, 얘기를 좀 더 해봐야겠다.

 

아. 잊을 뻔 했다. 이 책을 읽기 전 주의사항이 있다. 먼저 이 책을 끝낼 용기가 없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마라. 괜히 중도하차하고는 이후에 찾아오는 모든 일을 '푸쿠'(주1)에 뒤집어 씌우면 곤란하니까. 그렇다고 중도하차 한 후에 '사파'(주2)를 외치고 다니지 마라.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사이비 신자로 오인할 지 모르니. 자, 주의사항을 숙지했다면 본격적으로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들어가볼까?

 (주1. 어디나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 그런 존재. 요컨대 저주 따위.

  주2. 푸쿠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역주문)

 

이 책은 산토도밍고의 도미니카인 3대를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은 오스카, 그의 누나 롤라, 그들의 어머니 벨리시아. 그리고 화자인 유니오르.  3대를 다뤘다면 가족소설?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지독한 저주에 걸린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치열한 데 레온 가족의 이야기다. 요컨대 푸쿠에 대한. 때론 질려 한숨이 나온다. 절망스런 모습에 기어이 쉰웃음이 흘러나온다. 웃긴 건, 근데도 웃기다는거다. 어떻게 한숨을 쉬며, 쯧 혀를 차며, 웃을 수 있냐고? 그럴 수 있다. 적어도 이 책에선.  

 

오스카는 빌어먹게 뚱뚱한 녀석이다. 도미니카 남자로서 치명적이게도 여자 홀릴 줄도 모른다. (하긴 그 거구에 달라붙는 여자가 있다면 신기할 뿐이다. 게다가 상상 이상의 애늙은이다.)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찌질한 녀석, 불행하게도 그가 우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매번 여자를 짝사랑하고 볼품없이 차인다. 그럼에도 사랑하고, 결국 사랑 때문에 짧게 살다 간 녀석. 그런데 죽음 직전. 놀랍게도!!! 푸쿠는 예외 없이 그를 덮쳤으나 죽어가는 길 오스카는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찌질이가 아니었다고만 밝혀두자.

 

표면상 데 레온 가족의 역사는 푸쿠의 역사였다. 그러나 진정 그들의 삶이 저주에 휩싸였다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 감히 아니란 대답을 하고 싶다. (이 시점에서 데 레온 가족 푸쿠의 근원인 트루히요의 마수가 나에게까지 뻗치는 듯한 위화감이 드는건 왜일까.) 비록 죽을뻔한 위기까지 겪으며 불행의 연속에서 살아가지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간다. 그들이 사는 모습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위기를 건너 온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짧고 놀라운 오스카 와오의 삶으로 인해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유니오르. 비록 오랜 시간에 걸친 롤라와의 사랑은 무참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으니 이쪽도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해둘까). 새사람이 된 그는 데 레온 가족의 푸쿠를 들려준다. 그리고 롤라의 딸인 이시스, 언젠가 데 레온 가족의 푸쿠를 끝장내줄지 모를 소녀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게 결말인지 새로운 시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푸쿠를 이겨낸 그들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파가 아닐까.' 푸쿠는 어디에나 있는 존재, 우리에게도 소리소문 없이 들러붙어있을지 모른다. 그 때 가만히 이 책을 펼쳐보자. 사파! 라고 한 마디 던지는 것보다 강력하게 당신을 둘러싼 푸쿠를 물러내 줄지 모르니. 지금 당신에게 사파의 주문을 담은 초대장을 보낸다. 자, 놓치지 말고 잘 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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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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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험한 독서

 

위험한 독서라니, 실로 매혹적인 말이다. 80년대 이념이 다른 책을 읽는 것은 사회적으로 위험한 독서였다. 그러나 김경욱은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에게 독서란 책을 넘어 사람을 읽는 행위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16p) 고 말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 '나'의 독백을 통해 독서란 행위를 들여다본다.

 

김경욱의 소설집 <위험한 독서>의 표제작은 독서가들에게 매혹적으로 들릴만한 이야기이다.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짧은 이야기 속 풍성한 책 이야기를 찾아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 '나'는 독서치료사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당한 책을 권해준다.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로 마음을 치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여자를 만난다. 소설은 그녀의 변신을 쫓는 '나'의 독백이 주를 이룬다.

 

'나'는 그녀가 읽어온 책들을 듣고, 권해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를 '읽는다'. 그러나 오만이 아닐까. 읽은 책 몇권 만으로 한 사람을 읽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취향이란 게 있는 법이고 그 안에서 대략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를 분석해나가는 '나'의 모습은 낯설다.

 

이야기의 끝, 그녀는 변한다. 소심하고 의미없는 삶을 지속하던 그녀는 밝고 바빠진다. 그러나 '나'는 수동적으로 그녀만을 쫓는다. 매일 올라오는 인터넷 속의 그녀를 계속해서 읽기만을 고집한다. 능동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는 단 한마디만을 두려워한다. "최근 2주간 새 게시물이 없습니다."

 

김경욱의 소설에서 독서란 중독이다. 때론 긍정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때론 사람을 한없이 나락에 빠뜨리는 안정제 마약과도 같이. 그렇기에 독서는 위험하다. 

 

나에게도 독서는 중독이다. 일상이고, 때론 삶에서의 도피이며, 습관과도 같은 무의식적 반복이다. 생각이 빠진 즐김이 주가 되는 행위, 그렇기에 나에게도 독서는 위험하다. 그러나 나의 독서에 잘못이란 넝울을 뒤집어씌우지는 않는다. 독서란 자유로운 것이기에. '독자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니라 공감이니'(21p). 배움이 아니라 쾌락이 주가 되는 독서라도 좋다. 그래서 난 이 문장에 밑줄을 좌악 그었는지도.

 

배우기 위한 책읽기도, 시간을 때우기 위한 책읽기도, 쾌락을 위한 책읽기도, 아무것도 아닌 책읽기도 좋다. 독서에 정답 따위는 없다. 자유로운 위험함에 자신을 송두리채 내버리기.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2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

 

김경욱과 만나는 4번째 소설집이다. 그 사이 그의 글은 달라졌다. 맨 처음 그를 만났던 <베티를 만나러 가다>에서는 첫 이야기다운 괴상한 상상력이 주를 이루었다. 두 권쯤의 소설집을 넘어 만난 <위험한 독서>는 상상력이 현실과 조화로워졌다. 그의 발칙한 공상은 그대로이지만 어딘가 현실에서 일어남직도 하다. 그의 글을 읽는 손과 머리에 힘이 덜 들어간다.

 

총 8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딘가 불쌍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집이 어려워 남이 하지 않는 일까지 떠맡게 된 맥도널드 점원(맥도날드 사수 대작전), 도둑글쓰기로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아 일을 때려치웠지만 결국 좌절하는 사내(천년여왕), 천재로 태어났으나 퀴즈대회에서조차 우습게 져버린 남자(게임이 규칙).

 

그런가하면 현대사회의 고독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이야기들도 있다. 부녀자 살인 사건이라는 삭막한 기사로 시작되는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에서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혼자 빌딩 숲 위 관람차를 타며 과거를 회상하는 여인이 나온다. 제목조차 <고독을 빌려드립니다>인 이야기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빌릴 수 있는 세태를 꼬집으면서, 그 향락에 빠져 사라져버린 한 사내의 빈자리와 마주치게 된다. 일상의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겨우 달팽이에게 전가시켜버리는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를 통해 나약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 속의 우리 모습을 전보다 담담하게 그려내는 김경욱. 처음의 발칙함이 날아간 자리에 묵직한 현실이 자리잡았다. 조금씩 모습이 바뀌었을 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주인공들에 어느새 내가 겹쳐진다. 책 속에 나를 일치시키기. <위험한 독서>에서 '나'의 목소리를 빌어 그가 했던 주문이 어느새 내 몸에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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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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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표지 속 소녀가 말을 건다. 너의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거부할 수 없다. 가녀린 몸, 갈구하는 눈동자(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고개는 끄덕, 입은 "들어와"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소녀는 내 안에 침투했다. <렛미인>(문학동네.2009)이란 끝나지 않을만큼 긴 이야기를 가지고.

 

뱀파이어 소설. 여지없이 피가 등장하고, 어느정도 문란함이 예상되는 어른의 장르. 그러나 <렛미인>의 주인공은 소녀 혹은 소년이다. 물론 소녀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어른이 있지만 그 속을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세계, 즉 피터팬 세계의 어둠 버전이 스웨덴의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위험하고 고독한 아이들의 세계에 이질적인 존재 -엘리가 등장하면서 블라케베리의 조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서서히 그러나 눈에 보이게.

 

뱀파이어 소설의 색은 붉거나 검다. 그러나 <렛미인>은 하얗고 푸르다. 인물들의 마음이 너무나 얼어있어서 피조차 붉을 수 없다는 듯.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야 할 학교 안에는 냉정한 공기만이 떠돌 뿐이고, 아이보다 노인이 많은 교외의 주거단지에는 처량함이 감돈다. 아이들은 풀밭이 아닌 언 눈덩이 위를, 차가운 냉기의 지하실을 돌아다닌다. 렛미인의 따뜻함은 일상적인 인물이 아닌, 뱀파이어-엘리로 인해 나타난다. 벰파이어가 따뜻함을?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는 왕따 소년 오스카르, 매일 상상으로 나무에 칼질을 하는 그에게 낯선 친구가 생긴다. 밤에만 만날 수 있고, 초대를 해줘야 들어올 수 있으며, 추운 겨울에도 옷 한 겹만 입는, 루빅스 큐빅을 잘 맞추는 가녀린 여자아이. 한편 그 즈음 블라케베리 근교에서 살인사건이 연이어 터진다. 피가 사라진 시체, 염산으로 얼굴이 뭉게진 남자, 죽었으나 다시 살아난 시체, 만신창이가 된 채 피를 갈구하는 여자... 조용하던 스웨덴의 교외 지역은 소란스러워진다. 그 중심엔 언제나 엘리가 있다. 그러나 혐오스럽다면서도 그녀 곁을 떠나지 못하는 오스카르. 점점 그들에게 엮여오는 사건. 오스카르와 엘리의 선택은 무엇일까.

 

<렛미인>에선 기존 뱀파이어 소설의 잔혹함, 문란함, 재미를 기대한다면 곤란하다. 이건 뱀파이어 소설이기 전에 한 편의 슬픈 동화니 말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몸만 커버려 여전히 아동을 갈구하는 남자 호칸의 엘리를 향한 사랑은 무섭다. 엘리가 여자아이가 아님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오스카르를 보는 건 슬프고. 그 애정에 답이 없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에 더욱.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면서 누구와도 진짜 애정을 나눌 수 없는 엘리의 고독에는 감정을 느끼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아우르는 막연함. 그게 이 책의 매력이라면 매력일지도.

 

책을 봤다면 영화를 꼭 보길 권한다. 책이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라면 영화는 액기스만을 쪽 뽑아내 만든 상징시이니. 소설에서 느끼던 서늘한 푸른빛을 눈으로 만나는 즐거움은 책 이상의 감동을 전해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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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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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기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책을 읽어주고, 듣는 행위는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러나 그 이면에는 차마 밝히지 못한 슬픈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 읽어주는 남자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여자. 숨겨진 사랑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 소년이 길을 가던 중 토악질을 한다. 한 여자가 소년을 도와준다.  첫 번째 만남에서 스타킹 신는 그녀를 보고 매혹당하는 소년, 두 번째 만남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선다. 서른 여섯 여인과 열 다섯 소년의 사랑, 어딘가 밸런스가 맞지 않는 듯 서로에게 빨려들어간다.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소년에게 책 읽기를 요구한다. '오디세이'로 시작한 소설 읽기는 그들 사랑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녀에게 그의 목소리는 그리도 매혹적이었던걸까?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그녀에 대해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던 소년은 어느 새 법대생이 되어 있다. 우연히 나치시대 감시자들을 처벌하는 재판에서 마주친 소년과 여인. 그 때서야 소년은 지난 날 그녀가 고집한 책 읽기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 비밀을 고집스레 지키기 위해 가중된 처벌을 받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그녀. 어느 덧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은 그녀에게 녹음된 테이프를 보낸다. 다시 책읽기로 이어진 인연의 끝은 어디일까.

 

소설을 통해 저자인 슐링크는 많은 걸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치 전범에 대한 처벌, 그 세대에 대한 시각과 같은 무거운 주제. 정의의 실현과 개인 의지 사이의 줄다리기와 같은 철학적 질문.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건 한나(여인)와 미하엘(소년)의 사랑이다. 숨막히게 정적인,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그들의 사랑.

 

이 책은 숨막히도록 빨리 진행되는 책도, 간들어지게 들뜨게 하는 책도 아니다. 오히려 장면 하나하나가 스냅 사진처럼 멈춰있는 조용한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한 번으론 부족하다.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다른 의미를 캐야할 것 같은 책이다.

 

첫 번째의 감상은 이뿐이다. '숨막히는 에로티시즘의 순간'. 목소리를 통해 기억되는 그들의 순간은 영원을 얻었다.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 슐링크가 던진 도덕적 의문들은 한참을 곱씹은 후에야 한두줄짜리 답변이라도 내어줄 수 있겠다. 그 때까진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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