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아버지와 아들

이반 투르게네프 / 이 항재 옮김


러시아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가 있다. ‘움늬’ 번역하면 ‘지혜로운, 현명한’ 뜻이다. 그들에게는 현명함이란 무엇일까? 바자로프처럼 혁명적인 사고를 하며 시대를 변혁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아르카디처럼 현실에 충실 하는 것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실 나는 학창시절 러시아 소설들을 좀 딱딱하게 여겼다. 의미가 뚜렷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흥미롭게 읽었다. 책꽂이를 뒤져 오래 두었던 러시어로 된 ‘아버지와 아들’을 꺼내 비교해 가며 읽었다. 우리글이 조금은 딱딱해 러시아어 고유의 리듬감은 없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바자로프의 귀족과 평민들 사이에 끼어서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시들어 가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다. 그는 때로는 자충우돌 한다. 그렇게 싫어하는 감정들에 쉽게 휘말려들고 사람들과 충돌하고 괴로워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자주 보인다. 오딘초바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생각이 너무 앞서 일찍 늙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반면 그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산 아버지의 고백은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자신들을 두고 떠나는 아들을 보내며 그는 말한다. “버렸어, 우리를 버렸어!” “우릴 버렸어. 우리와 있는 게 답답했던 거야. 이젠 혼자야, 이 손가락처럼 혼자 남았어!” 이런 그에게 그의 아내는 말한다. “바샤,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이란 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거예요. 그 애는 매처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지만, 우리는 한 구멍 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지요. 나만은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지요.” 그러자 바실리 이바니치는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자기 아내를, 자기 반려자를 포옹했다. 젊었을 때도 하지 않았던 힘찬 포옹이었다.


조용한 관찰자 카차는 바자로프를 이렇게 평가한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 사람은 길들여지지 않았고, 당신과 저는 길들여졌어요.” 반박하는 아르카디에게 그녀는 일침을 가한다. “그럼 당신은 맹수가 되고 싶으세요?” 어쩌면 바자로프는 그들에게 맹수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상황에서 기성세대와 젊은이들과 충돌이 잘 드러나고 러시아인들 특유의 언어적 감각들도 잘 드러난다. 군데군데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 있어 그를 간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서 이런 눈물을 보지 못한 사람은 감사와 부끄러움으로 숨이 넘어갈듯 할 때,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해 할 수 있는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아르카디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흘리는 카차의 눈물과 기쁨을 보고 저자가 한 말이다)


문화와 시대적 상황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는 힘든 것 같다.(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은 공유할 수 있겠지만) 오랜만에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러시아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할 수 있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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