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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기다리며
소담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기억 속에 있는 사랑. 가슴 아파 놓을 수 없는 사랑.
잊고 싶은 기억.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
책의 두께도 두께지만 거기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간과 공간의 무게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태양을 기다리며>를 읽으면서 지금까지의 그의 작품들과는 무언가 조금은 다른 듯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을 기다리며>는 크게 ‘루즈 마이 메모리’, ‘지로의 세계’, ‘후지사와의 과거수첩’, ‘크레이그 부샤르의 수기’, ‘훼이팡의 비극’, ‘빛의 사체’라는 소제목 아래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반복되고 교차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소제목을 따라, 그리고 저자의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2000년 여름의 촬영장에서 1937년의 난징, 1945년의 히로시마, 1970년의 도쿄를 정신없이, 그러나 분명한 의식으로 넘나들게 된다. ‘루즈 마이 메모리’에서는 영화 촬영장에서의 이야기가, ‘지로의 세계’에서는 머리에 총을 맞고 혼수상태가 된 지로의 세계가, ‘후지사와의 과거수첩’에서는 후지사와의 출생 이야기가, ‘크레이그 부샤르의 수기’에서는 후지사와의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이, ‘훼이팡의 비극’에서는 젊은 시절 이노우에 감독이 훼이팡과 사랑에 빠지는 모습과 아픔이, ‘빛의 사체’에서는 지로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기억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교차되는 흐름은 지로의 ‘머릿속 세계’를 통해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로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매개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란도셀’.
이제는 노장이 된 이노우에 감독은 영화촬영장에서 태양의 빛에 집착하며 조금씩 정신을 잃어간다. 이를 특히 이상하게 여긴 것은 시로와 도모코. 시로는 지로의 동생이며 도모코는 지로의 첫사랑이자 영원했던 여인이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이 둘. 그리고 이제는 시로의 사랑을 받는 도모코. 점점 이노우에 감독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결국 우연한 기회를 통해 시로와 도모코는 이노우에 감독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오래전 기억 속에서의 사랑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시로는 총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 형 때문에 곤경 아닌 곤경에 빠진다. 후지사와로부터의 전화 한 통. 자신의 란도셀을 돌려주지 않으면 형과 똑같은 처지로 만들어주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 이렇게 <태양을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복잡한 상황을 두어 개씩은 끌어안고 있다. 그것이 자의이든 타의이든 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다가도 연결고리에 따라 어느 순간 모두 한 점으로 모여들고 만난다. 그런 그들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그냥 자취도 없이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지로를 따라 시공간의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껴보기도 하고 인종을 넘어선, 언어장벽을 넘어선 사랑을 경험하기도 한다. 운명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절망 속 상황에서 비치는 한 줄기 희망.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을 각 시대에서 각 공간에서 그들은 애타게 바라고 바란다.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기억,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기억을 각자의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억지로 잊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돼. 기억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죽음 앞에서의 고민들. 모든 것을 다 떨쳐내고서 남은 원초적인 사고들. 삶의 반대말은 죽음, 죽음의 반대말은 사랑, 사랑의 반대말은....... 하지만 죽음. 사람은 결코 삶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거야.
제한된 삶을 제한 없이 살아가려면,
지금을 소중히 하고,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멋진 추억의 거목이 되어
해마다 너의 인생에 아름다운 녹색 잎을 무성하게 피워낼 테니.
언젠가 찾아올 죽음 직전에, 너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