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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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다.

  그냥 주위에 널리고 널려있는 것들. 너무 흔해빠져 내게는 별 의미조차 있지 않았던 것 같은 것들. 이를테면 노란 고무줄이나 칫솔, 소금이나 책받침 등 사소하다면 너무 사소한 것들이 에쿠니 가오리를 통하고 나니 말 그대로 하나하나의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이 책에는 에쿠니 가오리의 주위에서 오래도록 그녀에게 의미가 되어주고 있는 소품, 소재들이 60가지로 정리되어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이 목록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에는 별 다른 게 없다. 어떤 물건이든 색깔이든 멜로디든 음식이든 장면이든 생각이든 그녀에게 조그마한 의미라도 되는 것이면, 그녀의 머릿속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오케이.




  처음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를 접했던 게 아마 <냉정과 열정사이>였던 것 같다. 그 땐 ‘일본 소설’이라는 장르에 상당히 거부감을 갖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그럼에도 유명한 책이었기에 봐야만 했었다.- 그 책 역시 내게는 별로 큰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다시 그 책을 집어 들었고, 그 후로도 그녀의 다른 작품 몇 권을, 이제는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겨우나마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책 역시 가벼우면서도 기분 좋은 마음으로, 기꺼이 공감할 수 있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에도 에쿠니 가오리의 감성이 참 잘, 그리고 아름답게 녹아들어 있었다. 저자의 에세이는 처음 읽어봤기 때문에 기분이 조금 묘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저자가 눈여겨 봐왔던 거라든지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나름대로 소중히 다루는 것이라든지 유독 좋아하는 풍경이라든지 그녀가 작은 것 하나하나에 갖고 있는 애착을 이 책 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치 내가 에쿠니 가오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것 같았다. 작가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뭔가 모르게 아주 다를 것만 같았다. 별세계 사람 같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뇌를 갖고 있을 것만 같은. 저자가 사물의 이면을 바라보고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에서 나는 그 동안의 내 생각이 맞았구나, 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고 흔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독자들,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눈과 생각과 손을 거쳐 태어난 이 책의 리스트 속 그것들은 원래의 이미지에 새로움이 더해져 또 다른 하나의 개체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소소하기에 일상과 참 잘 어울린다. 소소한 아름다움, 소소한 행복, 소소한 기쁨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을 일상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들이 그 시간만큼 기억 속에서도 점차 잊혀져가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일기장을 펼쳐 보았을 때 내가 실은 기억 저편에 잠시 보관해 놓고 꺼내보지 않았을 뿐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다시 내 것이 된 기억들을 모아모아 보면 그것들이 새로운 하나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나만의 ‘소품 리스트’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조금 무례하고 건방진 생각이기는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도 내 목록에 살포시 집어넣어 앉힐 것이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산뜻하고 상쾌한 책 표지와 달콤한 책 내용이 참 잘 어우러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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