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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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난,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가족’이라는 생활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가족 공동체들은 저마다 자기들만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인식하는 다양한 가족의 모습처럼, 어떤 가족은 상냥한 사랑과 배려 등으로 똘똘 뭉쳐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가족은 애증이 가득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띄기도 하고, 아예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래도 보통은 서로를 향한 사랑과 관심, 배려와 헌신이 ‘가족’이란 것을 유지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여기, 조금은 보통에서 벗어난 가족이 있었다. <너는 모른다>의 저자 정이현이 책 속에 그려낸 가족은 그 구성원에서부터 조금의 차이를 빚어내었다.

 

장기 밀매라는 불법적인 일에 몸을 담고 그것으로 가족들이 부족함 없이 살게 하는 그 집안의 가장 김상호, 화교인 새 아내 진옥영과 그들의 딸 김유지, 그리고 김상호가 진옥영과 재혼하기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혜성과 딸 김은성. 아마 이 가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화목하고 부유한 집안이라고 여기고 어쩌면 동경하는 마음까지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는 알 수 있었다. 가족 구성원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균열이 그들을 너무나도 위태롭게 해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혜성과 은성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아버지란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특히 내지르는 성격을 지닌 은성은 견디지 못하고 밖의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섯, 실은 넷이서 방배동 서래마을의 한 빌라를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집은 몹시도 조용하다. 종종 감정을 제멋대로 분출해대는 김상호를 제외하면, 옥영도, 혜성도, 그리고 까마득하게 어린 유지마저도 감정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다, 절대. 하지만 정작 그들의 가슴 속에는 엉킬 대로 얽히고설킨 무언가가 그들을 갉아대고 있었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상처를 품고 있었다. 발신목록엔 전화번호가 가득하지만 정작 착신목록에서는 어떤 전화번호도 찾아볼 수 없는 은성의 애처롭기까지 한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남몰래 길거리 자동차 타이어에 불을 붙여야 한다는 욕망을 느끼는 혜성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모든 친구들을 왕따시키고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어 살고 있는 유지를 보면서 공유할 수 없는 외로움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사이에서 대화다운 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집 안에서 오히려 ‘말’이라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될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타인이라도, 이보다 더 적막감을 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균열은 어느 순간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단 한 번도 말썽은커녕 걱정스러울 만한 일을 일으켜본 적이 없는 유지의 ‘증발’이 조용하기만 한 그 집에 ‘소리’라는 것을 가져다주었다. 가족 구성원 중 하나의 실종은, 남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큰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아니 그것은, 상실감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 몸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 등.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서로에게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그들은 이제, 유지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가출을 한 것인지, 납치를 당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유지의 행방을 찾느라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까지가 특히 더 힘들게 느껴졌던 것은, 저자의 펜이 이쪽으로 가는가 하면 또 저쪽으로 가는 등, 도저히 방향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것 때문이었다. 이제 다 왔다 싶으면, 갑자기 출발선에 돌아와 있는 듯한 막막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결말에 다다랐을 때는 오히려 허무하고 힘이 빠지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유지의 사라짐으로 인해, 온 가족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에 존재하던 서로를 향한 ‘사랑과 이해’라는 것을 끄집어내었다. 혼자서 열심히 유지를 찾는 전단지를 만드는 혜성을 보면서, 어쩌면 자기 때문일 것이라 자책하는 은성을 보면서, 유지를 찾기 위해 미친 듯 장기밀매를 해야 했던 김상호를 보면서 더욱 안타깝고 슬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것이 아직은 조금 서툴지라도. 하나로 묶일 수 없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스스로를 바꾸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가족이라는 건, 결국엔 이렇게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한 사람의 부재 때문이라 해도 말이다. 결국 ‘너는 모른다’며 서로를 있는 대로 밀어댔던 그들이, 실은 ‘나를 알아달라’며 투정을 부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결단코 바뀌지 않는 것을 진실이라고 부를까?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타인을 겨냥한 악의는

어쩌면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 풍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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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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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뤄왔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왜 그렇게 이 책 읽는 걸 미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연애 에세이일 거’라고 지레짐작해버린 탓이 컸던 것 같다. 얼핏 ‘남녀 간 연애심리를 파헤친다’는 등의 책 소개를 읽고 내 맘대로 그렇게 단정해버렸다.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를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것도 있는 대로 뜸 들이다 결국 펼친 책이었는데, 이 책 한 권은 나를, 당장에 그의 다른 ‘작품’들을 사러 서점에 가게 만들었다. 정말... 손끝을 통해 나온 그의 생각과 이야기는 마법이 따로 없었다. 사랑, 소통, 여행과 건축, 그리고 철학에까지 그가 관심을 쏟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우아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 책 <우리는 사랑일까>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과 함께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 중에서도 2부란 이름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흔히 사랑이 달콤하고 상냥해야만 할 거라고 여기는 생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다. 배려와 온갖 긍정적인 요소들만 가득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들이 피하기만 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할 매력적인 요소임을, 앨리스와 에릭, 그리고 필립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상상 속 이상형을 꿈꾸어오던 이십대 앨리스가 조금은 나이차이가 나는, 안정적이고 윤택하고 우아한 생활을 하는 에릭을 만나는 이야기,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또 곳곳에서 조그만 균열을 비집고 얼굴을 내미는 갈등들이 아주 현실감 있게 펼쳐져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생각을 나누고, 여행을 떠나고, 싸움을 벌이고, 혼자서 토라지고, 불안에 떨고, 이별을 맞게 되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는, 사랑하는 사람의 일련의 과정이 마법 같은 언어로 묘사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좋았던 점은 사랑에 철학이 곁들여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한 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서 더 나아가 인간관계를 파악하고, 또 거기에 담긴 철학적인 부분들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책 읽는 재미를 배로 늘려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책 곳곳에서 등장하는 철학과 깊은 이야기 덕분에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의 무언가를 더 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사랑에 빠진 남녀 사이의 이야기 속에서 알랭 드 보통의 재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고, 또 적당히 냉소적이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부분에서는 이 책 속에 더욱이 빠져들게 되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고수해오던 생활과 사고방식을 조금은 바꾸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바꾸는 것이 불편은 하겠지만 절대 억지로가 아닌, 기쁨과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야 탄탄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진실한 사랑과 인간의 본질을 한층 깊이 파고들어 공감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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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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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동물농장>으로도 유명한 조지 오웰의 작품, <1984>를 이제야 읽은 것은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 유명한 탓에 대강의 이렇다,는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충격에 가까웠다. 이 책은 1940년대에 저자가 예측해본 어두운 미래를 그린 소설인데, 이보다 더한 디스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고, 말로만 듣던 ‘빅 브라더’를 그 속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빅 브라더의 가공할 만한 정보 수집을 가능하게 해주는 텔레스크린은 사무실, 집 할 것 없이 어느 곳이나, 심지어 화장실에까지도 설치되어 있어 감시카메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텔레스크린을 의식하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모든 언어와 행동은 철저하게 빅 브라더의 지배하에 놓여 있고, 맛에 대한 본능, 성에 대한 본능들 역시 철저하게 제한되는 아주 억압적인 세계로 전체주의의 미래가 그려져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세상이 바로 이 책 한 권에 신랄하게 펼쳐져 있었다.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일단 그 모든 과정이 완료되면, 어떤 경우에도 거기에 허위가 섞여있다고 주장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었다.

 

 

역사가 조작된다는 사실 역시 두려운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한데,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사실이었던 과거를 순식간에 허구로 갈아치우고, 분명 방금 전까지 존재하던 것을 순식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무無가 된 그것에는 이제 이름조차 없다. 공중으로 증발해버린 그 사람 또는 그것은, 이제 다시는 회상해보아서도, 기억을 해서도 안 되며, 심지어 그렇게 머릿속에서조차 사라지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세뇌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기에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신어 정책 역시 빅 브라더의 주요 사업이었다. 언어에 변화를 준다는 것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임에도, 빅 브라더는 사람들의 사고의 폭을 줄이기 위해 어휘를 대량으로 삭제해 나간다. bad가 사라지고 good과 ungood만이 사전에 기록된다. 그렇게 사전에 실린 어휘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해서 그 수가 줄어든다. 존재하지 않는 어휘에 대해서는 이제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다. 얼마나 사고의 폭이 좁아질지 눈에 훤히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아무리 빅 브라더가 모든 것을 억제하고 억압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누군가 문제제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윈스턴의 머릿속에는 항상 그런 의구심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는 것으로, 줄리아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빅 브라더 몰래 ‘활동’을 하는 것으로 윈스턴은 자신의 사고를 꿋꿋하게 지켜내려 애를 쓴다. 결국 사상경찰에 잡혀 끌려가고, 굴복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인쇄술의 발달로 보다 쉽게 여론을 조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영화와 라디오로 인해 한층 더 용이해졌다.

특히 텔레비전의 발명으로 동일한 기계가 동시에 송수신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짐으로써

사생활은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모든 시민, 적어도 요주의 인물들을 하루 24시간 내내 경찰의 감시 아래 둘 수 있고,

다른 모든 통신망은 폐쇄시킨 채 정부 선전만 듣도록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정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게 하고 의견 통일까지 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우연치 않게도 <1984>에 흠뻑 빠져 있던 요 며칠 사이에, 모 여대에서 ‘학생 감시’ 의혹 문건이 발견되어 인권침해가 아니냐는 논란이 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1984는 내게 더욱 현실성 있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과거 조지 오웰은,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론의 조작이 더욱 용이해질 것이라 기대했고 그런 세계를 책 속에 그려내었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도입되고, 그리고 확산되면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물론 이 역시 철저히 예견되었던 일일 수도 있을 거라는 음모론에 저절로 휩싸이는 것 같다-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히려 조작에 관련해서는 인터넷이 확산됨으로 인해서 더욱 활발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우려가 높아지면서도 이미 익숙해져버린 세상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역시 현실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조작을 하려 든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저항 역시 팽팽한 힘으로 맞서려 한다. 여러 가지 생각들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하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것이 당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과거는 본질적으로 변경될 수 있음에도 여태 그런 적이 없다.

지금 진실한 것은 영원히 진실하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현실 제어’라 칭했는데, 신어로는 ‘이중사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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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 - 사랑했으므로, 사랑이 두려운 당신을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권문수 지음 / 나무수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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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두려운 당신을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종종 매체를 통해서 첫사랑과 결실을 맺어 평생을 그 사랑만 알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별을 고한 적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아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별의 방향이라는 것이 어찌되었든, 양쪽 다 상처를 남기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의 새로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사랑의 아픔을 이겨내고 치유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별로 인한 상처의 치유라는 것이 때로는 찰나의 시간을 요하기도 하지만, 상처의 골이 깊어 24시간 내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사랑에 괴로워하다 손목을 그었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들려오니 말이다. 그런 이유에선지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의 저자 권문수는, 미국에서 테라피스트로 일하며 자신의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테라피스트란 모든 치료 전문가를 일컫는 말인데, 저자는 그 중에서도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치료를 담당’하고 있다. 분야가 그래서인지 저자에게 찾아온 수많은 고객들과 환자들은 사랑으로 인한 상처를 견디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저자는 그들의 행복과 고통을 동반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절대 사랑이라는 것이 단순한 것 혹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사랑은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매일을 가슴 아파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책에는 저자에게 찾아왔던 고객 혹은 환자 아홉 명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고, 각각 ‘무감각’, ‘불안’, ‘상실’, ‘편력’, ‘중독’, ‘금기’, ‘트라우마’, ‘오해’, ‘극복’이라는 각 장의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였던 무감각부터 정말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비슷한 시간대에 여러 가지 충격을 받은 환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눈물마저도 흐르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찾아왔던 시련들은 그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녀는 무감각증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심리적인 무감각증은 어떤 충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을 때 일어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누군가 죽는 모습을 보면 처음엔 구토를 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만 그것이 반복되어 가면 나중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무감각증의 일종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누구나 크고 작은 무감각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끊임없는 상담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무감각증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실 감각을 되찾는다는 것은 꽤 힘든 고통을 수반할 수 있다. 괴로웠던 상처들의 아픔이 다시금 찾아올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무감각증의 치료를 간절히 원했고, 그 의지로 치료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이 책에는 이런 식의 상담 사례들이 실려 있었다. 그들의 증상이 제시되고, 증상에 따른 상담 과정을 보여주었으며, 증상과 관련된 심리학적 용어들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고 있어 읽는 데 흥미(?)를 더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치료 경과를 보여줌으로써, 얼마나 나은 삶으로 변화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왜 사랑의 상처를 치유해야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직 나는 이 책 속 등장인물들처럼 괴롭고 죽고만 싶었던 사랑의 상처는 없는 것 같다. 기껏해야 친구들과 술의 힘이 좀 필요하다거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그 상처가 아물었다. 때로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사랑을 경험해보고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일단, 그런 생각은 모두 지워버렸고, 오히려 앞으로는 어떤 사랑 앞에서든지 절대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 책을 읽고 고통스러웠던 자신들의 사랑을 치유하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위로를 구할 수는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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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빈자리 낮은산 키큰나무 8
사라 윅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낮은산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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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생님의 질문에는 답을 하기가 싫었다.

마지 아줌마의 질문에도.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그 누구의 질문에라도.

 

 

열한 살 소년이 감당해내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닥친다. 아끼고 아끼던 고양이가 죽고, 아빠라는 사람은 다른 여자와 도망을 가버리고, 이모는 사고로 머리를 다쳐 과거에만 머무르려 하고, 형편이 어려워 엄마와 둘이 이모가 사는 컨테이너 박스로 이사를 하고...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점점 고통으로 스스로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어떤 고통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과거, 어떤 날의 기억이 제이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자기 자신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는, 떠올리기 싫은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불쌍한 제이미. 결국 제이미는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어 자신 안에 가두어버렸다.

 

학교에서는 불우한 가정으로 인해 문제가 있는 아이로 낙인찍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찐따’가 되어 아이들의 놀림거리로 전락한다. 제이미의 담임선생님을 지켜보면서 정말 저런 사람이 교단에 설 자격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절로 분개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저런 선생님과 함께라면, 제이미는 점점 더 나쁜 길로만 가려 할 텐데, 하는 걱정을 겨우 추스르며 페이지를 넘겨 나갔다.

 

왜 제이미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스치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또 당황하면 스카치 사탕 맛이 온 입 안을 감싸는 것일까? 그 비밀의 이면에는 바로 그 끔찍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스스로 굳게 빗장을 치고 닫아버린 제이미의 마음을 조용히 다가와 두드려주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1일 교사로서 학교에 방문한 글쓰기 선생님이다. 그는 연륜으로 제이미에게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밝은 곳으로 조금씩 끌어내주었다. ‘어른들이란, 죄다 한 통속이야! 모두 똑같은 속물이야!’라고만 생각했던 제이미에게 있어서 글쓰기 선생님은,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는, 그리고 제이미 입장에서 대화가 통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오드리라는, 근처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고 있는 같은 반 친구 역시 제이미가 세상에 나서고 소통을 하려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소위 최면요법이라 부르는 치료방식으로 제이미를 치료해주겠다고 귀찮게 굴던 오드리가 언젠가부터 마음을 조금씩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로 자리매김을 한다. 그렇게 제이미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제이미에게서도 이제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를 바라보고 응원을 하고 있는 나 역시 진심으로 기뻤다.

 

제이미가 이 책 <기억의 빈자리>에서 그러했듯이, 우리 모두는 처해진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는 제이미와 래리, 혹은 담임선생님 사이의 것처럼 자신에게 악영향만을 끼치는 것이 있고, 반대로 제이미와 글쓰기 선생님, 오드리, 이모 사이의 것처럼 도움을 주고 나눌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반대로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과연 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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