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임당 평전 - 스스로 빛났던 예술가
유정은 지음 / 리베르 / 2016년 7월
평점 :
여성으로써 거의 유일하게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인물이 신사임당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화는 사실확인이 불명치 않은 유명한 일화 위주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실제 사임당이라는 호만 알뿐 기록에 의한 사실이라기 보다 후대의 인물들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평가한 내용들이며, 이는 사임당의 아들인 이이가 훌륭한 학자이며 인품이 뛰어나 더불어 찬양되는 일종의 과찬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조차 들었던게 사실이다.
신사임당이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무시되고 학문조차 익힐수 없고 남자의 부속품 정도로만 여겨지던 조선 후기(17세기 중엽 이후 정착된 사상이 남녀칠세 부동석으로 대변되는 시대라고 한다)의 인물보다는 조금은 여성이 대우 받았던 조선 전기즈음 (16세기)의 인물이어서 작품활동은 물론 집안에서도 어느정도 발언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역시 성리학을 근본으로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자란 탓에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를 산 여성임은 분명하다.
아버지 신명화는 연산군직위하의 서슬퍼런 사화가 있던 시절이었으나 그는 스스로 관직을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윗감 이원수의 가문이나 신랑이 될 이원수의 재능보다는 사임당의 서화활동을 도와주고 지지해 줄수수 있는 사윗감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세가 되던 1522년 사임당은 이원수와 결혼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아버지 신명화가 세상을 떠나자 사임당은 홀로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이같은 일화로 볼수 있듯 사임당의 생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예의는 물론 남편을 대우하고 자녀를 잘 교육시키고 ㅣ부모또한 잘 모시는 것 외에도 미술, 자수, 그림, 시등의 문예활동도 활발히 했던 여인이었다.
지금 많이 남아 있는 사임당의 작품과 사임당 주변의 인물들이 평가한 그녀에 대한 자료, 사임당의 부친과 모친, 사임당의 시댁쪽의 자료등은 물론 시대적 정치 문화 경제등 다방면에 대한 기본 해설은 사임당의 자료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생을 잘 조명한 유일한 사임당 평전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