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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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윤은 뉴욕 퀸즈에서 태어나 오랜 세월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았던 이주민 가정에서 성장했다. 조부는 한국전쟁 때 탈북한 피난민이었다. 체험을 바탕으로 정체성과 갈망에 대해 서정적으로 그리는 폴 윤의 인물들은 길 잃은 사람들이다. [벌집과 꿀] 단편소설집은 시대도 장소도 다른 혹독하고 부당한 ‘속할 수 있는 장소를 갖지 못한 채 부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대도 인물도, 각양 각양각색이지만, 어떤 애뜻하고 짠-함이 뭇어나는 내용들이다. 나처럼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감히 상상 할 수 없는 공허함, 든든하지 않은 뿌리를 갖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분하면서도 읽다보면 그 인물에 몰입되는 진중한 문체를 작가는 구사한다.

“보는 카로에게 하고 싶은 질문들을 계속 더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거기 달빛 속에 , 카로의 곁에 긴장을 풀고 가볍게 서 있는 동안, 공기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바람이 불었고, 그는 갑자기 자신이 아주 먼 길을 왔으며 무언가 굉장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리라는 걸, 오늘 밤이나 내일은 아닐지 몰라도 머지않아 일어나리라는 걸 느꼈다.” p53

[보]

1990년대 미국의 교도소에서 나온 보라고 불리는 보선이 캘리스라는 낯선 도시에 정착하면서 작은 희망을 꿈꾸는 이야기 [보]를 응원하게 된다.

“기억 안나니? 우리가 널 데려왔잖아. 넌 그 일에 결정권이 없었어. 우린 너를 네 죽은 어머니 품에서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마치 짐승을 거두듯 너를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옷을 입히고, 사람들한테 잠깐의 웃음과 즐거움을 주겠다고 네가 활을 쏴 사과를 맞히게 만들었지. 우린 널 불쌍하게 여겼다. (중략) 넌 우릴 미워해 마땅하다. 왜 우릴 미워하지 않지? 넌 이제 네가 되었어야 했던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p132

역참에서

1608년 에도시대에도 한국인 아이가 먼 나라 일본에서 나랏말도, 정체성도 잃은 채 살고 있었고, 유미라 불리는 활을 잘 쏘는 그 아이의 미래는 살아 온 만큼이나 앞으로 힘들 것 같은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저는 그들에게 유령이 나오는 장소는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고, 기꺼이 다른 땅을 물색해보겠다고 제안하고, 그들 모두 과거에 다른 어딘가를 떠나 성공해본 사람들 아니냐고 묻습니다. 제가 이 모든 걸 물을 때면, 그들은 하나같이 삼백 년 전 일본이 침략해 온 일을, 그리고 사찰들과 선교사들과 유럽에서 온 배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유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우린 비명을 지릅니다. 잠을 못자고요. 그런다고 우리가 죽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떠나야 한단 말입니까?‘” p.200

벌집과 꿀

고려인들의 삶은 조선에서의 민중의 삶 그 이상으로 혹독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견디는 이야기가 1881년 소련인의 눈으로 비춰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한국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기댈 곳 없이, 가진 것 없이 살았던 개인들의 삶은 그들의 세대가 지나면서도 결코 나아지지 않는 구조가 보였다.

한국인 이라는 지금 생각하는 한 작고 토막난 현재를 말하지 않고, 고려인부터 그 후손까지, 북한에서 탈출해 더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과 타국의 삶을 택해야만 했던 현재 한국인들의 이야기까지 짧지만 굵직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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