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2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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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처럼 재밌게 쓰인 중동 전쟁사이다. 최근에는 인도나 중동 등 여러 나라에 대해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박사님들의 유튜브를 듣기도 했는데, 저자인 임용한 님도 [임용한 TV], [인문체널휴]를 운영하며 인문학을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유대인은 ‘토지 소유 금지’라는 특별한 조항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상인, 수공업, 고리대금, 무역을 장악하는데 특화된다. 1697 런던 주식 중개인 100명 중 20명이 유대인이었을 정도다.

예루살렘에는 ‘시온산’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시온이 본향, 고국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2차대전 중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전부터 유대인들만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시오니즘 운동’의 노력은 결국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세우게 해주겠다는 약속(벨푸어선언 1917)과 팔레스타인을 오스만제국에서 독립시켜주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했고, 결국 팔레스타인을 분할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두나라는 중립지역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각각 독립국가를 세운다.

UN에서 승인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경은 애초부터 화합 불가능한 국경이었다. 이스라엘과 다르게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이 국가의 개념 없이 전통과 관습에 의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스라엘은 발 빠르게 영국이 물러나자마자 건국을 선언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이스라엘은 총과 대포로 싸우는 전쟁과 공포와 충격으로 주민들을 몰아내는 전쟁을 동시에 했는데, 피해자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이들의 마을에 대한 공격과 주민 학살은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양산한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1947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나라를 세워주며 알아서 살아라는 식의 국경선은 시오니즘의 영향으로 전 세계에 떠돌던 인재들이 모이고 미국과 영국이라는 우방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에 너무나 유리한 전쟁 역사였다. 나라의 개념 없이 소수끼리 모여 전통과 종교에 의해 살았던 팔레스타인인은 난민으로 떠돌고 주변국들은 아랍의 명예를 걸고 전쟁에 참여했지만, 주변국 들도 이제 막 나라에서 갖춰야 할 모든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로 많은 피를 흘리는 참패를 맛보게 된 전쟁사였다.


 

 

1차 중동전쟁 (1948.5.15. -1949.3.10)

이스라엘의 만행은 아랍권 전체에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ALA로 구성된 병력이 20만여 명으로 구성된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유엔의 금수조치에도 이스라엘은 외국에서 계속 무기를 들여왔고, 반면 아랍군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이 전쟁의 결과 유대인 지역은 56%에서 80%로 늘었고, 65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겨났지만, 2차대전 복구로 바쁜 서방은 어떠한 원조도 관심도 없었다. 설상가상 주변국들도 팔레스타인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체적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만들었지만 변변한 무기 없이 게릴라 공격과 민간인 대상 테러 등의 활동 방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1956.10.29. - 11.7)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 장교였던 나세르는 쿠데타로 이집트의 정권을 잡은 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 프랑스의 힘으로 건설되었고, 영국이 45%의 주식을 매입하면서 제1주 주가 된 운하였다. 나세르는 이에 더해 아카바만을 봉쇄하면서 이스라엘에도 선전포고를 한 셈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군대를 몰고 진격한다. 이스라엘에 수에즈까지 뺏길 위기에 놓인 영국과 프랑스는 1956.11.5. 일 부랴부랴 참전하게 되고 소련이 이집트 편에 참전 선언을 하며 핵위협으로 맞선다. 2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세계의 패권은 유럽에서 소련과 미국으로 넘어가며 세계정세의 판도가 바뀌어 갔다.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1967.6.5.-.6.10)

2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전성기를 누렸고, 10년간 전쟁은 없었지만, 끊임없는 접경 지역의 분쟁은 있었고, 이때마다 이스라엘 측의 과도한 보복은 언제나 문제가 돼왔었다. 이에 대한 이집트와 아랍 동맹의 공격설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선제공격을 하며 단번에 공군을 제압해 버리고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다.


4차 중동전쟁(1973.10.6.-10.25)

나세르에 이어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군 체질을 개선하고 대 반격을 도모하게 된다.

‘사다트는 수에즈운하를 되찾지 않고서는 이집트의 미래는 없었고, 사나이 탈환은 민족의 자존심 회복에 중요한 문제였기에 전쟁을 결심한다. 상황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4차 중동전쟁마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1-3차와 다르게 4차 전쟁에서 이집트는 많은 인명피해와 손실을 입게 된다.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이 아랍의 명예를 위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중동의 중심은 사우디, 쿠웨이트, 이라크, 이란과 같은 오일달러 벨트로 옮겨갔다

p.529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에 둘려 싸인 폭이 좁은 땅에 어느 날 강압적으로 들어온 이웃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지만, 4차에 걸친 전쟁은 주변국과 이스라엘에 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교훈을 남겼지만, 여전히 이곳은 불안한 곳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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