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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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 작품들의 리뷰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읽고, 그중에서 고른 수많은 철학 작품들을 너와 나, 우리들과의 관계 속에서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동네 카페에 있는 책장에서 발견한 것인데, 카페에 갈 때마다 틈틈히 읽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떠올리면 커피 향이 나는 기분이다.

   총 3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음에 읽기 시작할 때는, 뭐 이정도야 누구나 알고 있지 하며 휙휙 넘겼는데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들이 끝없이 펼쳐지자 점점 삐딱한 자세를 바로하고 읽게 되었다. 맨 뒷장에서 저자가 말하듯이 48권의 책들 중 (전혀 관심이 없거나 무시하고 싶은 책들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삶을 뒤흔들어놓는 한두 가지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울리는 순간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성찰하고 시작하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나에게 그런 목소리는 공자의 타인에 대한 배려였다. 그렇다고 책을 읽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란 매우 어렵겠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만날 때, 나의 행동을 점검하는 모습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자가 소개한 책들은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책에서 소개한 작품들을 적어 본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캉 <에크리>, 에픽테토리 <엥케이리디온>, 이지 <분서>, 임제 <임제어록>, 이통 <연평답문>, 나가르주나 <중론>, 혜능 <육조단경>, 최시형 <해월신사법설>,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지눌 <보조법어>,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칸트 <실천이성비판>,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사르트르 <존재와 무>, 공자 <논어>, 정약용 <맹자요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스파노자 <에티카>, 데리다 <주어진 시간>, 정호 <이정집>, 라이프니츠 <신 인간 오성론>, 이리가라이 <나, 너, 우리>, 장자 <장자>, 원효 <대승기신론소. 별기>, 한비자 <한비자>, 아리스토텔레스 <분석론 전서>, 베르그송 <웃음>,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바타유 <저주의 몫>,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왕충 <논형>, 왕간 <왕심재전집>, 노자 <도덕경>, 묵자 <묵자>, 베유 <중력과 은총>, 바디우 <윤리학>, 헤겔 <법철학>, 들뢰즈 <천 개의 고원>,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랑시에르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 비트겐슈타인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에서 언어를 숙고했던 철학자는 아니였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윤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그가 혐오했던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하는 인간의 허영이나 과시욕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속내에 대해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을 오직 두 사람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에만 한정 시킨다. “서쪽으로 200미터만 가면 우체국이 있어요.” ,“겨울이 되면 동백이 피겠지요.” 반면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과 같은 인간 내면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실연으로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아.”, “네 영혼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99

 

# 보통 사람들은 칸트가 보수적인 철학자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공동체의 관습적 규범에 비판적이었다. 관습적으로 인정된 선한 행동이라고 해도 인간의 자율적 결정이 없다면 선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칸트는 혁명적이다. 그렇지만 칸트의 진정한 혁명성은 타인을 수단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있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는 돈을 목적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체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보자는 칸트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인간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돈은 수단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5.

 

# 공자가 태묘에 들어갔을 때 일일이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누가 저런 추인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했는가? 태묘에 들어가서 일일이 묻고 있다니!”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다.” - <논어> ‘팔일’ 중에서-

태묘에 들어왔으면 태묘 관리인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것(태묘 참배 예절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이 바로 예라는 것이다. 공자는 태묘 관리인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던 것이다. 141.

 

# 자공이 물엇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일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 <논어> ‘위령공’ 중에서

142.

 

# 사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언어는 남성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가 차이를 배제하려는 남성적 몸으로부터 유래한 언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성은 남성의 언어라는 외국어를 학습하여, 그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던 것이다.....타자와 차이를 포용하는 여성적 경험이야말로 구체적인 현실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표현하는 데 있어, 여성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남성의 담화를 통해서만 표현하도록 강제되어 있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성의 담화가 논리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삶의 중요한 대목은 대부분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애매한 것 아닐까?.....보통 여성은 남성보다 수다스럽고, 혹은 잔소리를 많이 한다는 통념이 있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여성은 상대방이 제대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면 반복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찾을 수 밖에 없다. 187-88.

 

# 깨달은 자의 마음은 맑다. 그렇지만 맑고 고요한 물이 외부의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맑은 마음은 타자에 대해 섬세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이다. 201.

 

# 베르그송의 말대로 웃음은 기계와 같이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말과 행동을 교정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웃음이 지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유연하고 생생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은 두 종류로 분할된다. 하나는 자본에 고용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직장을 떠나서 보내는, 기 드보르가 ‘비활동’이라고 부르는 여가 시간이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252.

 

#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어휘나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한 하나의 기계(machine)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다. 무엇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안하든가, 그뿐이다.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다. - 들뢰즈<대담> 중에서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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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박준상 지음 / 인간사랑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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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블랑쇼.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1907년-2003년. <하느님>, <사형선고>, <최후의 인간>, <재난의 글쓰기>, <우정을 위하여> 등등.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왠지 책이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블랑쇼에 대한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에 대해 논의한 글을 읽으니 더더욱 어려울 수 밖에. 하긴 벤자민의 작품들도 이런 식으로 접근했으니 이제 블랑쇼의 작품을 읽는 것에 더 이상 두려움은 없을거야 작은 희망을 가져 본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떠올리며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적었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래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블랑쇼의 작품을 읽지 않아서 그런 거야.’ 긍정하며 묵묵히 페이지를 넘겼다. 가끔 이 책이 번역본이어서 더 어려운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안되는(한국 저자가 블랑쇼에 대해 쓴 글이지만 오죽하면...)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쨌든 읽기를 마쳤고, 무거운 표정으로 글을 읽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S는 “독자가 이해할 수 없게 쓴 책들은 다 잘못된 책이다.” 라고 주장하며 애써 나를 위로했다. 물론 전혀 위로가 안되었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블랑쇼의 ‘바깥’과 ‘글쓰기’의 개념이다. 블랑쇼의 글쓰기 자체가 결국 바깥에 대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왜 바깥에서 문학이 유래하며, 어떻게 바깥에서 글 읽는 자와 글 쓰는 자 사이의 관계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인지 살펴보고 있다. 그렇다면 바깥은 어디인가? 바깥은 이 현실의 세계로, 이상적이고 본래적인 또 다른 세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자가 추방당해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경험은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존재하는 경험이며 사물들에 대해 적극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경험이다.

   예를 들면 죽음(자살, 병으로 인한 죽음 등등)이 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사물을 통제할 수 없다. 또한 죽음의 고통과 경험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다. 블랑쇼에게 죽음의 경험은 자아에게 고유한 것으로 여겨졌을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건에 대한 경험이다.(저자는 하이데거의 죽음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죽음은 사물들을 관리, 지배할 수 있는 나의 힘이 무로 돌아가는 사건이며, 자신과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타인의 손에 맡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죽음 앞에서 자신 너머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타인을 향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죽음의 순간에 나의 존재는 내재성 가운데, 자신과의 관계 가운데 완성될 수 없다. 그러나 내재성의 파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 너머라는 가능성을 알리는 암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니, 역시 철학자는...)

   그렇다면 이제 글쓰기를 살펴보자. 글쓰기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완전히 다른 관계, 제3의 유형의 관계를 예감하도록 이끈다. 작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소통은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품을 통한 문학적 소통은 저자와 독자 사이에 어떤 끈을 놓을 수 있다. 문학적 소통은 그 자체 어떤 공동의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경험은 블랑쇼에게서 “완전히 다른 관계” 또는 제3의 유형의 관계를 전제하고 작품 가운데 실현되는 제3의 인물에 대한 경험이다. 제3의 인물, 즉 나와 타인 모두에게 공동의 타자는 우리가 본 대로 ‘그’ 또는 ‘그 누구’이다. 그는 명사로 지정될 수 있는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동사적 사건, 즉 어떤 관계맺음의 실현이다. 글쓰기가 창조한 언어적 가능성은, 언어가 표상한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수렴되는 지점인 ‘그’의 윤각이 드러나는(나와 타인 사이의, 작가와 독자 사이의) “사이에서-말함”의 가능성이다.

   미술에서 블랑쇼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은 자코메티(그의 작품에서 모든 형상들은 엿가락처럼 길고, 날씬하다)이다. 자코메티는 말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걷어내는 일입니다. 원상태로 돌려놓으면서 만들어 가는 거에요. 모든 게 한번 더 사라지게 되겠지요. 모든 것을 없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붓질을 해야만 되는 거지요.”(p.157) 자코메티의 작품은 사물에 대한 모방을 넘어 있으며, 작가의 자아가 상상력을 통해 투영되어 있지도 않다. 자코메티의 작품이 “모든 것을 없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붓질”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문학작품은 사물을 이미지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블랑쇼에게서 문학적 언어는 단순히 사물들을 비유와 수사에 따라 시적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들과 주객관계 바깥에서 관계를 맺는 사건을, 바깥의 힘을 이미지로 드러내는 언어인 것이다. 이러한 언어를 그는 ‘본질적 언어’라고 부른다.

   블랑쇼는 잡담을 말하는 것을 모방, 가장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잡담한다는 것은 언어의 수치인 것이다. 잡담한다는 것, 그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다는 말을 막는 동시에 깨뜨린다. 우리가 잡담할 때, 우리는 설령 아무런 거짓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진리도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37) 그러나 잡담은 글쓰기와 관계가 있다. 잡담을 내뱉는 경험과 글쓰기의 급진적 경험은 서로 겹쳐진다. 잡담은 글쓰기로 향해 있는 언어이다.

   <하느님>에서 주인공 소르주는 죽는 순간에 이렇게 말한다. “지금, 바로 지금 내가 말합니다.”(p,262) 결국 소르주의 죽음은 죽는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이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실 그 안에 어떠한 단어도 들어 있지 않은 최후의 말들 중 하나이다. 목소리는 작품의 궁극적 이미지 자체, 즉 중성적인 이미지이다. (아, 이 부분은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된다. --)

   독자 편에서 보면, 주어진 단어들 바깥에서, 말하여진 것 바깥에서 목소리를 듣는 것이 작품에 대한 마지막 경험, 또는 작품에 대한 긍정으로서 궁극적 경험이다. 저자는 독자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온다고 말한다. 작품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앞에서 독자와 저자는 동등하다. 왜냐하면 독자는 작가 못지않게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작품의 경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 블랑쇼는 이렇게 쓴다. “자살이 갖는 약점은 자살을 수행하는 자가 아직도 너무 강하다는 데에 있다. 자살을 행하는 자는 이 세계의 시민에게나 정당화될 수 있는 힘을 입증해 보인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자는 살 능력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는 희망에 얽매여 있다. 끝장을 내버리겠다는 희망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 희망은 시작하고자 하는 욕망, 종말에서 시작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죽어 가면서 문제 삼고자 했던 의미를 새롭게 열려는 욕망을 드러내 준다.” 45.

 

# 레비나스는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였다. 레비나스에게 자아로서의 회귀인 양태인 욕구는, 대상을 소유하고 즐기는 데에서 오는 만족에서 끝나는 한, 대상으로의 유한한 움직임인 반면, 욕망은 관념과 사물의 일치 너머의 타자로 향한-타인의 타자성의 현전을 향한-무한의 움직음으로 정의된다. 욕망은 그 무한의 현전 앞에서 만족할 수 없다. 욕망은 그 자신이 욕망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욕망한다. 또한 욕망은 자신이 사유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사유하는 사유이다. 91.

 

# 말라르메는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물을 그리지 말고 사물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그릴 것. 거기서 시는 단어들로 구성되어서는 안되고 지향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모든 말들은 감각 앞에서 지워져야만 하네.”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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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묻다 - 예술, 건축을 의심하고 건축, 예술을 의심하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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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처럼 저자는 진지하게 건축에 관하여 묻는다. 그의 학자다운 치열함이 책 전체를 통해 풍겨 나온다. 향기롭다. 저자는 첫 장에서 묻는다. “건축은 예술인가?” 대답을 하기 전에 그는 석봉의 예를 들며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예술이라는 것을 범주적 조건으로 보느냐 평가적 조건으로 보느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예술의 범주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가?” 이것은 예술의 분류와 경계에 관한 질문이기에 다시 탐구를 시작한다. 예술이 무엇인지 - 예술이라는 단어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건축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되며 저자는 중세 이전, 르네상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하나 하나 파헤치기 시작한다. 해변의 모래알 가운데서 쌀알을 고르듯 말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증거로 삼고, 영국, 프랑스, 독일의 예술과 건축 양상을 보여주며, 풍부한 그림들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촘촘한 각주들이 이해를 돕고, 원문(라틴어)을 표기하여 정확성을 더하며, 간결한 언어 속에 유머가 넘치도록 담겨 있다. 단어 하나도 정확하게 배치하는 저자의 글쓰기에 푹 빠져 감탄을 백번쯤 하다보면 책읽기가 끝난다. 이렇게 재미있는 건축에 관한 책이 있다니. 사실 다른 건축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 남아 있는 책 중에서 골라 온 것인데 완전 행운이구나.

   중세 유럽에 건축 이론서나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건축쟁이들이 글을 몰라서라기 보다 그들이 건물을 만드는 방법을 철저히 대외비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고려청자의 제작 방법을 모르듯이 중세 유럽 성당의 건립 방식도 상당부분을 추측에 의존해 해설하고 있다고 한다. 내재적 용도와 파생적 용도, 용도와 기능/테크닉과 기교의 차이점, 공간의 정의도 여기서 배웠다.

   첫 장에서 질문한 “건축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맺는데 이 과정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정확하게 정의한다. 건축은 기능적 목적에 의하여 공간을 만드는 예술이다 >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기 위하여 공간을 조직하는 예술이다 >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는 예술이다 >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는 작업이다 >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재조직하는 작업이다.”

    드디어 답을 내놓았다. 하나의 질문으로 한권의 책을 만들 수 있는 저자의 역량에 기립 박수를 보낸다. 꼼꼼함으로 따지면 한 권의 철학서를 읽는 듯하다. 하지만 철학서보다 10배는 재밌다. 심지어 건축을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 회화는 시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시는 인간이 임의로 고안해서 사용하는 언어를 도구로삼는 반면, 회화는 자연의 작업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는 음악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공통으로 조화로운 비례를 다루고 있기는 하나, 음악이 순간적인 반면, 회화의 비례는 훨씬 더 오래 음미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라고네> 레오나르도. 43.

 

# 회화에 관한 플라톤의 입장은 뚜렷하고 명료하다. 모방이라는 것이다. 의자는 무엇인가. 의자에는 그 존재를 설명하는 추상적인 이데아가 있다. 이데아를 모방해서 의자 제조공이 만든 것은 실물 의자다. 그리고 이를 다시 모방한 허상이 그림이다. -플라톤. 47.

 

#. ‘숭고함’은 아름다움과 구분되는 예술의 가치이고, 용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만 그 대상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 미학의 요체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건물은 용도에서 자유롭지 않다. 칸트는 ‘독립적인 아름다움’이 참된 예술적 판단의 대상이라고 정리한다. 꽃이나 새, 조개껍데기 같은 자연물, 혹은 가사, 주제가 없는 음악이 이런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용도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지거나 음미되는 아름다움은 ‘의존적 아름다움’이다. 77.

 

#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올 수 없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붙어 있다는 전설의 문구가 바로 이것이다. 84.

 

#. 최초와 최고는 거기 이르기까지는 진보적이지만, 일단 이르고 나면 보수적이 된다. 96.

 

# 건축적 공간은 비어 있음과 물질적 경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방이라는 단어가 벽과 그 벽이 둘러싼 내부를 포함하는 것과 같다. 건축적 공간은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포용하는 단어다. 건축적 공간은 비어 있음이 존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즉 건축적 공간은 비어 있음 자체가 이나고 비어 있음이 조직된 체계다. 233.

 

# 즉 어떤 구조물, 건축적 구조물에서 용도가 사라졌을 때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건물이다. 그러나 용도가 사라졌더라도 존재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건축이다. 275

 

# 대형마트가 지닌 문제는 자동차 의존형 소비의 결과면서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형 마트는 매장 자체보다 더 넓은 주차장을 요구한다. 그리고 주말이면 인근의 도로를 마비시키는 주범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소비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것은 크게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구조에 대한 질문이면서, 작게는 개별 상품의 과다한 포장에 대한 질문이고, 사서 쟁여 놓았다가 썩혀 버리는 수요 초과 구매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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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spora and Hybridity (Hardcover)
Virinder S. Kalra / Sage Pubns Ltd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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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디아스포라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지, 혼종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그전까지는 디아스포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유대인이었고, 단순히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말았는데 세상에,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디아스포라를 정의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사례와 수많은 학자들의 담론을 보다보면 눈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디아스포라와 연관지어 혼종성의 개념을 설명할 때 사이버보그와 동성애까지 언급할 때는 와, 이런 것까지 다 생각한다는 말인가 입이 딱 벌어질 뿐. 폴 길로이, 호미 바바, 스파박, 스튜어드 홀, 브라 등 쟁쟁한 학자들의 이름이 수시로 거론되거니와 보드리야드, 데리다 같은 철학자까지 등장하니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뿐.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고(7장은 국제적 테러에 관한 내용이라 읽지 않았다), 각 장에서 저자들의 논지를 조금씩 진행시키고 있다. 문제는 다 읽고 나도 명확하게 디아스포라와 혼종성에 대해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범위를 어디까지 정의해야 될지는 독자의 몫이다.

 

1장. Home and Away: Social Configurations of Diaspora

   디아스포라의 개념에 대한 관심 급증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미국의 외교정책의 주 관심이 구소련에게 제한받지 않기 시작한 때와 맞물려서 생기기 시작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6세기부터 시작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실, 추방, 괴로움이 수반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전형적인 디아스포라 개념이라는 것은 놀랍다.

   Cohen은 디아스포라를 이렇게 규정하였다. 1. 고국으로부터의 흩어짐. 2. 집단적 상흔. 3. 문화적 개화. 4. 이주한 국가에서 주된 민족국가의 갈등. 5. 국경을 넘어서는 공동체 의식. 6.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움직임 추진. 그러나 이 분류로 디아스포라를 구분짓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Cohen은 다시 세분화했지만 여전히 장단점이 있다. 1. 희생자 2. 노동자 3.무역 4.제국주의적 5. 문화적.

   Steven은 디아스포라를 사회적 양식, 정신적 의식, 문화적 생산양식으로 구분하였다.

   디아스포라와 비슷한 개념은 immigration인데, 디아스포라는 한 방향의 이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민과 다르다. 디아스포라를 논할 때 ethnicity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것은 민족적 절대주의 체제 내에서 디아스포라 집단이 다른 어느 집단들처럼 작동된다는 것이다.

 

2. Cultural Configurations of Diaspora

   이 장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문화적 형태와 과도한 문화적 산업과 맞닥뜨려 있는 디아스포라적 문화적 산물의 위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Hall은 디아스포라를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라고 정의하며 Gilory는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이다. 디아스포라는 여전히 민족국가 체제 안에서 작동되지만, 이것은 국가가 하나의 영토를 가진 단일한 민족이라는 정의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이다. 디아스포라는 경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고 단지 국가를 초월한 더 큰 문제들에만 참여해 왔다. 여기서 초국가주의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민족국가는 문화적 연대(음악, 영화, 종교)가 대항할 때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디아스포라적 의식은 잠재적으로 국가의 제한을 넘는다는 생각이다.

   디아스포라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Hebdige는 자르고 섞임의 문화적 형태를 이야기한다. 음악-아시안 덥 파운데이션, 펀더맨탈-은 디아스포라의 저항의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레코드 산업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상품화 될 수 있다.(ex.마돈나가 빈디, 헤나로 치장) 디아스포라 영화 또한 점점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문학은 큰 힘을 발휘한다. 디아스포라의 소설 읽기는 사회적 행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루시디 사건’을 예로 든다면, 대답은 그렇다 이다.

 

3. Sexual Limits of Diaspora

   이 장은 성문제의 관련하여 디아스포라의 한계들에 관한 내용이다. 이주와 정착의 과정에서 남성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운송수단으로 보았고, 여성은 문화를 수용하는 용기로 여겨졌다. 디아스포라 여성들은 채무에 허덕이고, 착취를 당하며, 때로는 성학대의 대상물로 전락하였다. 그들은 이주한 국가에서 남성들의 억압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남성의 억압을 받는, 이중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백인 남성들의 왜곡된 아시아, 중동 여성들의 이미지가 있으며, 중매 결혼, 클리토리스 할례, 베일 착용 등으로 자연스럽게 여성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고착화시킨다. 점차 여성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관습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 여성으로서의 권리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상충한다. Queer Theory도 등장하는데, 이는 여성을 문화전달자로 보는 관점이 통상 이성애 중심이라는 것이다. 현대에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이 작동하는 방식 속에서 개인의 고정된 단일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 될 수 있다.

 

4. Hybrid Connections

   이 장은 혼정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혼종성은 문화간의 결합, 담론, 정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담론들을 제시한다. 혼종은 섞임을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과연 순수한 상태가 있었을까? Gilory는 순수 자체가 없었고 따라서 혼종이란 것도 없다고 말한다. 혼종성을 이야기할 때 언어의 번역도 빼놓을 수 있다. Derrida는 모든 것은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이보그도 등장하는데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를 예로 들고 있다. 음악 부분에서는 크로스오버를 언급한다. 즉 혼종성은 긍정적인 부분이 많지만 수많은 한계점도 있다는 내용이다.

 

5. Hybridity and Openness

   혼종성과 개방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혼종성은 하이픈으로 연결한 두 문화의 공존이다. 혼종성과 다양성이라는 표현은 자본주의적 의도가 들어있기도 하다. 혼종성이라는 개념에는 경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이 고려되지 않는다. 도시화는 혼종성을 야기시킨다. 문화의 혼종성, 디아스포라와 혼합에 관한 평온한 농의는 중산층의 안전을 확실히 하고, 날조되고 상업화된 다양성이라는 헤게모니로 다른 것들을 끌어들인다. Rey Chow는 혼종성, 다양성, 다윈주의 등의 개념들이 불평등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의문을 지우고 그로 인해 식민지의 시선으로 이해했던 식민주의의 잔재를 가리며, 독립 이후에도 남아 있는 가난, 종속, 피지배의 경험을 무시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6. Journeys of Whiteness

   이 장은 디아스포라가 비 백인에게 주로 적용되고 백인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다룬다. 소설가 엘리슨은 흑인성이 비인간화의 맥락에서 비가시성을 내포하며, 백인성은 표면적인 권리, 특권, 지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시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피부색이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기에는 모호하다. 그렇다면 제외자(expatriate), TCK(Third culture kid), 여행자들은 디아스포라가 아닌가? Gordeon은 디아스포라가 뿌리뽑힘에 의한 추방이라면, 재외자들은 ‘이식, 옮겨심기’의 개념으로 묘사된다. 문화 중간자로서 TCK는 디아스포라와 달리 병리적으로도, 문제를 야기하는 혼종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디아스포라 라는 단어가 세계를 가로지르는 특권층을 포함하여도 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아일리쉬 디아스포라 집단을 보면, 한때 역사적 탄압을 받으며 흑인성의 영역에 있던 아이리쉬가 백인성을 획득하게 된 것처럼 백인성이란 고정된 권력관계라기 보다 과정임을 보인다. 백인성이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다른 예는 유대인의 경우다. 과거 유대인들은 흑인 혹은 거무잡잡한 인종으로 취급받았다. 자코비안은 이러한 양면적인 유대인 정체성에 대해 “유대인은 백인인가? 이는 그들이 백인인가 아닌가, 왜 백인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닌 어떻게 그들이 동시에 백인이며 타자였는지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7. Transnational Terror

9/11 테러와 관련한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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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 연구 프로이트 전집 3
프로이트, 김미리혜 / 열린책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브로이어와 프로이트가 함께 연구하고 발표한 결과를 모아놓은 책이다. 무궁무진한 히스테리 사례들을 읽다보면 아니 그 옛날에는 히스테리 환자들이 이렇게 많았나 놀랍기도 하고, 요즘에는 히스테리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나 궁금하기도 한다. 가끔 성격이 좋지 않은 노처녀를 보고 히스테리를 부린다 라고 얘기하는데, 프로이트와 브로이어에 따르면 성적으로 억압받을 때 히스테리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경미한 히스테리라고 할수도 있겠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자궁’에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왜 히스테리는 여자하고만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 것일까? 여기에 나온 사례들도 그렇고. 보통 성관계나 일상 생활에서 남성이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위치이고 여성들은 참아야 하는 경우가 많이 때문에 그런가?

    책에는 5가지의 사례 연구가 적혀 있다. 안나 O양은 브로이어가 기술하였고, 나머지 네 여성 에미 폰 N. 부인, 루시 R.양, 카타리나, 엘리자베스 폰 R.양은 프로이트의 연구 결과이다. 여기다 예로 드는 수많은 다른 환자들의 사례까지 합하면 무궁무진하다. 간단하게 다섯명 여성들을 살펴보자면, 안나 O양은 1880년 21살 때 처음 아프게 시작했다. 심한 시력 장애, 마비, 착어증 등이 나타났다. 이것은 아버지가 병에 걸리기 시작한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헌신적으로 간호하였는데 결국 아버지가 죽게 되자 그녀의 증상은 심해졌다. 브로이어는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들을 하나하나 밝혀나간다. 안나 O는 Bertha Pappenheim이라는 여성으로 나중에 여성 해방자이자 사회복지사로 활약을 펼쳤다. 서독 정부는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니, 와우~ 멋지군.

    에마부인은 40세 가량의 여성으로 프로이트가 3주간 기록한 내용이다. 그녀는 틱 증상, 수전증과 유사한 유사한 손떨림, <짤깍>하는 소리를 내기, 환각 등의 증상이 있었다. 그녀는 열네 명의 아이들 중 열세 번째 아이였는데 그들 중 단지 네 명만 살아남았다. 또 남편이 죽은 후부터 항상 아팠다. 어렸을 때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과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갖가지 소문들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루시 양은 만성적 화농성 비염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후각을 잃어버렸는데 한두가지 자기만이 맡는 냄새에 거의 항상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가정의 가정교사로 있었는데, 아이들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과 관련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원인이 되어 그러한 병이 생긴 것이다.

   카타리나 양은 18살로 숨이 자꾸 차서 고생하고 있었다. 누가 목을 쥐어 짜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것이다. 상담 결과 함께 살던 숙부가 그녀를 계속 범하려고 하였고, 또 숙부와 다른 여성이 함께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생긴 병이었다.

    엘리자베스 양은 24살로 양쪽 다리에 통증이 있어 걷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곧바로 결혼한 언니가 출산 후에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쓰러졌다. 그 모든 어려움과 가족의 간병을 모두 엘리자베스 혼자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은 분석 결과 그녀는 형부를 사랑하고 있었고, 언니가 죽자 그러면 이제 자신은 형부와 결혼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언니를 향한 죄의식이 그녀를 눌러온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고 하였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어떤 체계적인 탐구 방법도 없었다. 브로이어 처음 사용한 ‘최면 암시’를 프로이트도 사용하였지만 얼마 안가서 곧 그 방법은 불규칙하거나 불명확하게 작용하고, 불완전한 것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때 환자의 ‘저항’이 일어나 치료가 완벽하게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점차 ‘자유연상’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환자에게 단순히 무엇이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꿈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정신의 무의식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과 의식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의 엄청난 차이점들을 분류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젯밤 꾸었던 꿈이 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엄청나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왜 어제부터 식탁 의자에만 앉아 책을 읽으면 긴장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를 만날 길이 없으니, 스스로 상담심리를 공부하여 내 자신을 분석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역시, 모든 병에는 다 근원이 있다. 프로이트가 한국에 있었다면 수많은 한국 여성들의 ‘화병’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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