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서 -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박준상 지음 / 인간사랑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모리스 블랑쇼.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1907년-2003년. <하느님>, <사형선고>, <최후의 인간>, <재난의 글쓰기>, <우정을 위하여> 등등.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왠지 책이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블랑쇼에 대한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에 대해 논의한 글을 읽으니 더더욱 어려울 수 밖에. 하긴 벤자민의 작품들도 이런 식으로 접근했으니 이제 블랑쇼의 작품을 읽는 것에 더 이상 두려움은 없을거야 작은 희망을 가져 본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떠올리며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적었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래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블랑쇼의 작품을 읽지 않아서 그런 거야.’ 긍정하며 묵묵히 페이지를 넘겼다. 가끔 이 책이 번역본이어서 더 어려운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안되는(한국 저자가 블랑쇼에 대해 쓴 글이지만 오죽하면...)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쨌든 읽기를 마쳤고, 무거운 표정으로 글을 읽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S는 “독자가 이해할 수 없게 쓴 책들은 다 잘못된 책이다.” 라고 주장하며 애써 나를 위로했다. 물론 전혀 위로가 안되었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블랑쇼의 ‘바깥’과 ‘글쓰기’의 개념이다. 블랑쇼의 글쓰기 자체가 결국 바깥에 대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왜 바깥에서 문학이 유래하며, 어떻게 바깥에서 글 읽는 자와 글 쓰는 자 사이의 관계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인지 살펴보고 있다. 그렇다면 바깥은 어디인가? 바깥은 이 현실의 세계로, 이상적이고 본래적인 또 다른 세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자가 추방당해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경험은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존재하는 경험이며 사물들에 대해 적극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경험이다.

   예를 들면 죽음(자살, 병으로 인한 죽음 등등)이 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사물을 통제할 수 없다. 또한 죽음의 고통과 경험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다. 블랑쇼에게 죽음의 경험은 자아에게 고유한 것으로 여겨졌을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건에 대한 경험이다.(저자는 하이데거의 죽음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죽음은 사물들을 관리, 지배할 수 있는 나의 힘이 무로 돌아가는 사건이며, 자신과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타인의 손에 맡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죽음 앞에서 자신 너머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타인을 향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죽음의 순간에 나의 존재는 내재성 가운데, 자신과의 관계 가운데 완성될 수 없다. 그러나 내재성의 파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 너머라는 가능성을 알리는 암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니, 역시 철학자는...)

   그렇다면 이제 글쓰기를 살펴보자. 글쓰기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완전히 다른 관계, 제3의 유형의 관계를 예감하도록 이끈다. 작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소통은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품을 통한 문학적 소통은 저자와 독자 사이에 어떤 끈을 놓을 수 있다. 문학적 소통은 그 자체 어떤 공동의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경험은 블랑쇼에게서 “완전히 다른 관계” 또는 제3의 유형의 관계를 전제하고 작품 가운데 실현되는 제3의 인물에 대한 경험이다. 제3의 인물, 즉 나와 타인 모두에게 공동의 타자는 우리가 본 대로 ‘그’ 또는 ‘그 누구’이다. 그는 명사로 지정될 수 있는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동사적 사건, 즉 어떤 관계맺음의 실현이다. 글쓰기가 창조한 언어적 가능성은, 언어가 표상한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수렴되는 지점인 ‘그’의 윤각이 드러나는(나와 타인 사이의, 작가와 독자 사이의) “사이에서-말함”의 가능성이다.

   미술에서 블랑쇼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은 자코메티(그의 작품에서 모든 형상들은 엿가락처럼 길고, 날씬하다)이다. 자코메티는 말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걷어내는 일입니다. 원상태로 돌려놓으면서 만들어 가는 거에요. 모든 게 한번 더 사라지게 되겠지요. 모든 것을 없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붓질을 해야만 되는 거지요.”(p.157) 자코메티의 작품은 사물에 대한 모방을 넘어 있으며, 작가의 자아가 상상력을 통해 투영되어 있지도 않다. 자코메티의 작품이 “모든 것을 없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붓질”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문학작품은 사물을 이미지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블랑쇼에게서 문학적 언어는 단순히 사물들을 비유와 수사에 따라 시적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들과 주객관계 바깥에서 관계를 맺는 사건을, 바깥의 힘을 이미지로 드러내는 언어인 것이다. 이러한 언어를 그는 ‘본질적 언어’라고 부른다.

   블랑쇼는 잡담을 말하는 것을 모방, 가장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잡담한다는 것은 언어의 수치인 것이다. 잡담한다는 것, 그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다는 말을 막는 동시에 깨뜨린다. 우리가 잡담할 때, 우리는 설령 아무런 거짓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진리도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37) 그러나 잡담은 글쓰기와 관계가 있다. 잡담을 내뱉는 경험과 글쓰기의 급진적 경험은 서로 겹쳐진다. 잡담은 글쓰기로 향해 있는 언어이다.

   <하느님>에서 주인공 소르주는 죽는 순간에 이렇게 말한다. “지금, 바로 지금 내가 말합니다.”(p,262) 결국 소르주의 죽음은 죽는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이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실 그 안에 어떠한 단어도 들어 있지 않은 최후의 말들 중 하나이다. 목소리는 작품의 궁극적 이미지 자체, 즉 중성적인 이미지이다. (아, 이 부분은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된다. --)

   독자 편에서 보면, 주어진 단어들 바깥에서, 말하여진 것 바깥에서 목소리를 듣는 것이 작품에 대한 마지막 경험, 또는 작품에 대한 긍정으로서 궁극적 경험이다. 저자는 독자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온다고 말한다. 작품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앞에서 독자와 저자는 동등하다. 왜냐하면 독자는 작가 못지않게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작품의 경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 블랑쇼는 이렇게 쓴다. “자살이 갖는 약점은 자살을 수행하는 자가 아직도 너무 강하다는 데에 있다. 자살을 행하는 자는 이 세계의 시민에게나 정당화될 수 있는 힘을 입증해 보인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자는 살 능력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는 희망에 얽매여 있다. 끝장을 내버리겠다는 희망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 희망은 시작하고자 하는 욕망, 종말에서 시작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죽어 가면서 문제 삼고자 했던 의미를 새롭게 열려는 욕망을 드러내 준다.” 45.

 

# 레비나스는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였다. 레비나스에게 자아로서의 회귀인 양태인 욕구는, 대상을 소유하고 즐기는 데에서 오는 만족에서 끝나는 한, 대상으로의 유한한 움직임인 반면, 욕망은 관념과 사물의 일치 너머의 타자로 향한-타인의 타자성의 현전을 향한-무한의 움직음으로 정의된다. 욕망은 그 무한의 현전 앞에서 만족할 수 없다. 욕망은 그 자신이 욕망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욕망한다. 또한 욕망은 자신이 사유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사유하는 사유이다. 91.

 

# 말라르메는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물을 그리지 말고 사물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그릴 것. 거기서 시는 단어들로 구성되어서는 안되고 지향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모든 말들은 감각 앞에서 지워져야만 하네.”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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