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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평점 :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 작품들의 리뷰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읽고, 그중에서 고른 수많은 철학 작품들을 너와 나, 우리들과의 관계 속에서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동네 카페에 있는 책장에서 발견한 것인데, 카페에 갈 때마다 틈틈히 읽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떠올리면 커피 향이 나는 기분이다.
총 3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음에 읽기 시작할 때는, 뭐 이정도야 누구나 알고 있지 하며 휙휙 넘겼는데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들이 끝없이 펼쳐지자 점점 삐딱한 자세를 바로하고 읽게 되었다. 맨 뒷장에서 저자가 말하듯이 48권의 책들 중 (전혀 관심이 없거나 무시하고 싶은 책들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삶을 뒤흔들어놓는 한두 가지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울리는 순간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성찰하고 시작하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나에게 그런 목소리는 공자의 타인에 대한 배려였다. 그렇다고 책을 읽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란 매우 어렵겠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만날 때, 나의 행동을 점검하는 모습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자가 소개한 책들은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책에서 소개한 작품들을 적어 본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캉 <에크리>, 에픽테토리 <엥케이리디온>, 이지 <분서>, 임제 <임제어록>, 이통 <연평답문>, 나가르주나 <중론>, 혜능 <육조단경>, 최시형 <해월신사법설>,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지눌 <보조법어>,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칸트 <실천이성비판>,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사르트르 <존재와 무>, 공자 <논어>, 정약용 <맹자요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스파노자 <에티카>, 데리다 <주어진 시간>, 정호 <이정집>, 라이프니츠 <신 인간 오성론>, 이리가라이 <나, 너, 우리>, 장자 <장자>, 원효 <대승기신론소. 별기>, 한비자 <한비자>, 아리스토텔레스 <분석론 전서>, 베르그송 <웃음>,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바타유 <저주의 몫>,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왕충 <논형>, 왕간 <왕심재전집>, 노자 <도덕경>, 묵자 <묵자>, 베유 <중력과 은총>, 바디우 <윤리학>, 헤겔 <법철학>, 들뢰즈 <천 개의 고원>,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랑시에르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 비트겐슈타인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에서 언어를 숙고했던 철학자는 아니였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윤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그가 혐오했던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하는 인간의 허영이나 과시욕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속내에 대해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을 오직 두 사람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에만 한정 시킨다. “서쪽으로 200미터만 가면 우체국이 있어요.” ,“겨울이 되면 동백이 피겠지요.” 반면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과 같은 인간 내면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실연으로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아.”, “네 영혼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99
# 보통 사람들은 칸트가 보수적인 철학자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공동체의 관습적 규범에 비판적이었다. 관습적으로 인정된 선한 행동이라고 해도 인간의 자율적 결정이 없다면 선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칸트는 혁명적이다. 그렇지만 칸트의 진정한 혁명성은 타인을 수단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있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는 돈을 목적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체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보자는 칸트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인간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돈은 수단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5.
# 공자가 태묘에 들어갔을 때 일일이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누가 저런 추인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했는가? 태묘에 들어가서 일일이 묻고 있다니!”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다.” - <논어> ‘팔일’ 중에서-
태묘에 들어왔으면 태묘 관리인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것(태묘 참배 예절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이 바로 예라는 것이다. 공자는 태묘 관리인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던 것이다. 141.
# 자공이 물엇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일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 <논어> ‘위령공’ 중에서
142.
# 사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언어는 남성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가 차이를 배제하려는 남성적 몸으로부터 유래한 언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성은 남성의 언어라는 외국어를 학습하여, 그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던 것이다.....타자와 차이를 포용하는 여성적 경험이야말로 구체적인 현실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표현하는 데 있어, 여성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남성의 담화를 통해서만 표현하도록 강제되어 있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성의 담화가 논리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삶의 중요한 대목은 대부분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애매한 것 아닐까?.....보통 여성은 남성보다 수다스럽고, 혹은 잔소리를 많이 한다는 통념이 있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여성은 상대방이 제대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면 반복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찾을 수 밖에 없다. 187-88.
# 깨달은 자의 마음은 맑다. 그렇지만 맑고 고요한 물이 외부의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맑은 마음은 타자에 대해 섬세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이다. 201.
# 베르그송의 말대로 웃음은 기계와 같이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말과 행동을 교정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웃음이 지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유연하고 생생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은 두 종류로 분할된다. 하나는 자본에 고용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직장을 떠나서 보내는, 기 드보르가 ‘비활동’이라고 부르는 여가 시간이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252.
#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어휘나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한 하나의 기계(machine)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다. 무엇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안하든가, 그뿐이다.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다. - 들뢰즈<대담> 중에서 -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