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 시선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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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1865 까바르네 소비뇽은 인기가 많다. 선물하기도 좋고, 가끔 호사롭게 혼자 마시기에도 적당한 가격이다. 물론 맛도 끝내준다. 1865는 칠레를 대표하는 와인 중 하나이다. 수년 전부터 저렴한 칠레 와인(호주 와인과 함께)이 한국에 대거 수입되기 시작했고, 프랑스 와인 대신 칠레 와인을 자주 구입하면서부터 칠레=와인 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고 있다. 칠레의 독재정치와 군사정권의 역사가 와인에 묻혀 조금씩 잊혀진다.

  네루다는 칠레 출신의 위대한 민중 시인이다. 그는 시를 통해 칠레의 정치를 비판하였는데, 그의 시를 읽으며 칠레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는 1904년 태어났고 열아홉살 때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라는 시집을 내놓았다. 아름다운 연애시들이 실려 있다. 1944년 네루다는 노동자들의 요청에 의해 지역 상원에 당선되었고 칠레의 정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우익 독재자 곤살레스 비달레에 의해 반역죄인으로 몰려 파리로 도망간다. 비델라 정부가 무너진 후 그는 다시 칠레로 돌아왔다. 1970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네루다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하였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네루다는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3년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아옌데가 죽고, 그해 네루다도 산티아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네루다의 죽음 후 그가 살았던 집이 샅샅이 파헤쳐지고 파괴되어 세계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네루다는 칠레의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신조를 지키며 글을 써내려갔다. 그가 노동자의 비참과 죽음을 노래할 때, 그는 분노와 고발을 넘어 고통에 동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네루다는 편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민중의 삶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는 소박하지만 힘이 있고 아름답다. <네루다 시선>은 네루다의 5권의 시집과 그 안에서 고른 시 여러 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 시집 중 여기에 실려 있는 7편의 시는 다 외우고 싶을 정도이다.

  번역은 정현종 시인이 하셨다. 이 분이 스페인어도 배우셨나 깜짝 놀라 옮긴이 후기를 보니 영역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본인도 중역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고백한다. 영시를 번역해본 사람은 안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시는 단어 하나하나가 함축적이기 때문에 번역이 매우 어렵다. 그런데 번역도 아닌 중역이라면 그 시는 얼마나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살짝 든다(물론 책에 번역된 시를 읽으면서 충분히 감동과 기쁨을 느꼈지만).

 

 

* 내 양말을 기리는 노래

 

마루 모리가 나한테 가져왔다

양말

한 켤레

그건 그녀의 양 치는

손으로 짠 것,

토끼처럼

부드러운 양말 한 켤레.

나는 두 발을

그 속에 넣는다

마치

황혼과

양가죽으로

두 개의 상자 속으로

밀어 넣듯이.

 

강렬한 양말,

내 두 발은

양털로 만들어진

두 마리 고기,

금색 실 한 가닥이

들어가 있는

남청빛

두 마리 기다란 상어,

두 마리 거대한 검은 새,

두 개의 대포:

내 두 발은

거룩한

양말들로 하여

이렇게 명예스러워졌느니.

처음에

그것들은

너무 훌륭해서

내 발은 도무지

두 늙어빠진

소방수처럼

거기에 걸맞지 않게

보였다, 그

짜인 불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소방수,

그 불타는

양말에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마치 학생들이

부나비를

보관하고,

학자들이

신성한 책들을

모으듯이,

그것들을 보관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나는 물리쳤다

그것들을

금으로 된

새장에

 

넣고

매일

모이와

분홍색 참외 조각을

주고 싶은

엄청난 충동을

물리쳤다.

아주 희귀한

녹색 사슴을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서

가책을 느끼며

먹는

정글의 탐험가들처럼,

나는 두 발을

뻗어

그 멋진

양말을

신고

그리고 구두를 신었다.

내 송시의

덕목은 이렇다:

아름다운 건 갑절로

아름답고

좋은 건 두 배로

좋다, 그게

겨울에

양털로 만든

한 켤레 양말의 일일 때에는.

 

 

* 산보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을 때가 있다.

나는 양복점에도 들어가 보고 영화관에도 들어가 본다

펠트로 만든 백조처럼 시들고, 뚫고 들어갈 수 없이 되어,

근원의 물과 재 속으로 나아간다.

 

이발관 냄새는 나로 하여금 문득 쉰 소리로 흐느껴 울게 한다.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돌이나 양모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더 이상 상점들을 보지 않고, 정원들,

상품, 안경들, 엘리베이터들을 보지 않는 것.

 

내 발이 싫어지고 내 손톱과

내 머리카락 그리고 내 그림자가 싫을 때가 싫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싫을 때가 있다.

 

하지만 멋진 일일 거야

한 송이 자른 백합으로 법원 직원을 놀라게 하고

따귀를 갈겨 수녀를 죽이는 건 말야.

참 근사할 거야

푸른 칼을 들고 거리를 헤매며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소리를 지르는 건 말야.

 

나는 줄곧 암흑 속에서 뿌리로 잇는 걸 바라지 않는다,

불안정하고, 길게 뻗어 있으며, 잠으로 몸서리치고,

땅의 축축한 내장 속으로, 계속 내려가,

흡수하고 생각하며, 매일 먹는 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너무 심한 비참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계속 뿌리나 무덤이기를 원치 않는다,

시체들의 창고인 땅 밑에서 혼자

거의 얼어서, 슬픔으로 죽어가는 걸 원치 않는다.

 

그게 바로 월요일이, 내가 가책받은 얼굴로

오고 있는 걸 볼 때, 가솔린처럼 불타고,

상처 입은 바퀴처럼 진행하면서 울부짖고,

밤을 향해 가며 뜨거운 피로 가득 찬 자국을 남기는이유.

 

그리고 그건 나를 어떤 구석으로 몰아넣고, 어떤 축축한 집으로,

뼈들이 창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병원들로,

식초 냄새 나는 구둣방으로 몰아넣고,

균열처럼 무서운 어떤 거리로 몰아넣는다.

 

유황색 새들, 내가 증오하는 집들 문 위에 걸려 있는

끔찍한 내장들

커피포트 속에 잊힌 틀니,

수치와 공포 때문에 울었을

겨울들,

사방에 우산들, 독액, 그리고 탯줄.

 

나는 조용히 거닌다, 두 눈을 가지고, 구두와

분노를 지니고, 모든 걸 잊어버리며,

나는 걷는다, 사무실 건물들과 정형외과 의료기구상들 사이로,

그리고 줄에 빨래가 널려 있는 안뜰들-

속옷, 수건, 셔츠들에서 더러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는 거길 지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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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스파냐말 전공자가 없는 한국도 아닌데,
새로운 번역으로 꾸며서 내놓지 않은
민음사 출판사 책 매무새가 아쉽네요.

생각해 보면, 한국에 스웨덴말 전공자와 교수가 있어도,
아직 린드그렌 할머님 동화책을 스웨덴말에서 옮겨서 나온 책은
딱 한 권 빼놓고는 없으니, 그럴 만도 할 수 있겠지요.

안네 프랑크 일기책도 네덜란드말 아닌 독일말로 다시 옮긴 책으로
중역하는 현실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