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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묻다 - 예술, 건축을 의심하고 건축, 예술을 의심하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9년 7월
평점 :
책의 제목처럼 저자는 진지하게 건축에 관하여 묻는다. 그의 학자다운 치열함이 책 전체를 통해 풍겨 나온다. 향기롭다. 저자는 첫 장에서 묻는다. “건축은 예술인가?” 대답을 하기 전에 그는 석봉의 예를 들며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예술이라는 것을 범주적 조건으로 보느냐 평가적 조건으로 보느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예술의 범주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가?” 이것은 예술의 분류와 경계에 관한 질문이기에 다시 탐구를 시작한다. 예술이 무엇인지 - 예술이라는 단어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건축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되며 저자는 중세 이전, 르네상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하나 하나 파헤치기 시작한다. 해변의 모래알 가운데서 쌀알을 고르듯 말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증거로 삼고, 영국, 프랑스, 독일의 예술과 건축 양상을 보여주며, 풍부한 그림들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촘촘한 각주들이 이해를 돕고, 원문(라틴어)을 표기하여 정확성을 더하며, 간결한 언어 속에 유머가 넘치도록 담겨 있다. 단어 하나도 정확하게 배치하는 저자의 글쓰기에 푹 빠져 감탄을 백번쯤 하다보면 책읽기가 끝난다. 이렇게 재미있는 건축에 관한 책이 있다니. 사실 다른 건축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 남아 있는 책 중에서 골라 온 것인데 완전 행운이구나.
중세 유럽에 건축 이론서나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건축쟁이들이 글을 몰라서라기 보다 그들이 건물을 만드는 방법을 철저히 대외비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고려청자의 제작 방법을 모르듯이 중세 유럽 성당의 건립 방식도 상당부분을 추측에 의존해 해설하고 있다고 한다. 내재적 용도와 파생적 용도, 용도와 기능/테크닉과 기교의 차이점, 공간의 정의도 여기서 배웠다.
첫 장에서 질문한 “건축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맺는데 이 과정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정확하게 정의한다. 건축은 기능적 목적에 의하여 공간을 만드는 예술이다 >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기 위하여 공간을 조직하는 예술이다 >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는 예술이다 >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는 작업이다 >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재조직하는 작업이다.”
드디어 답을 내놓았다. 하나의 질문으로 한권의 책을 만들 수 있는 저자의 역량에 기립 박수를 보낸다. 꼼꼼함으로 따지면 한 권의 철학서를 읽는 듯하다. 하지만 철학서보다 10배는 재밌다. 심지어 건축을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 회화는 시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시는 인간이 임의로 고안해서 사용하는 언어를 도구로삼는 반면, 회화는 자연의 작업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는 음악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공통으로 조화로운 비례를 다루고 있기는 하나, 음악이 순간적인 반면, 회화의 비례는 훨씬 더 오래 음미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라고네> 레오나르도. 43.
# 회화에 관한 플라톤의 입장은 뚜렷하고 명료하다. 모방이라는 것이다. 의자는 무엇인가. 의자에는 그 존재를 설명하는 추상적인 이데아가 있다. 이데아를 모방해서 의자 제조공이 만든 것은 실물 의자다. 그리고 이를 다시 모방한 허상이 그림이다. -플라톤. 47.
#. ‘숭고함’은 아름다움과 구분되는 예술의 가치이고, 용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만 그 대상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 미학의 요체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건물은 용도에서 자유롭지 않다. 칸트는 ‘독립적인 아름다움’이 참된 예술적 판단의 대상이라고 정리한다. 꽃이나 새, 조개껍데기 같은 자연물, 혹은 가사, 주제가 없는 음악이 이런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용도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지거나 음미되는 아름다움은 ‘의존적 아름다움’이다. 77.
#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올 수 없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붙어 있다는 전설의 문구가 바로 이것이다. 84.
#. 최초와 최고는 거기 이르기까지는 진보적이지만, 일단 이르고 나면 보수적이 된다. 96.
# 건축적 공간은 비어 있음과 물질적 경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방이라는 단어가 벽과 그 벽이 둘러싼 내부를 포함하는 것과 같다. 건축적 공간은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포용하는 단어다. 건축적 공간은 비어 있음이 존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즉 건축적 공간은 비어 있음 자체가 이나고 비어 있음이 조직된 체계다. 233.
# 즉 어떤 구조물, 건축적 구조물에서 용도가 사라졌을 때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건물이다. 그러나 용도가 사라졌더라도 존재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건축이다. 275
# 대형마트가 지닌 문제는 자동차 의존형 소비의 결과면서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형 마트는 매장 자체보다 더 넓은 주차장을 요구한다. 그리고 주말이면 인근의 도로를 마비시키는 주범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소비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것은 크게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구조에 대한 질문이면서, 작게는 개별 상품의 과다한 포장에 대한 질문이고, 사서 쟁여 놓았다가 썩혀 버리는 수요 초과 구매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