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강영안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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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죽음 앞에서는, 영웅이 붙잡는 마지막 기회가 있을 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웅은 항상 마지막 기회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완강하게 기회의 발견을 고집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죽음은 수용되지 않는다. 죽음은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모순적 개념이다. 죽음의 영원한 위협은 그의 본질의 일부이다.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일종의 목숨을 건 모험, 일종의 모순을 통해 죽음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희망의 죽음의 언저리에, 죽음의 순간에, 죽어가는 주체에게 주어진다. “나는 숨신다. 나는 희망한다.” 햄릿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다. 무는 불가능하다. 죽음을 받아들일 가능성, 존재의 노예 상태로부터 최고의 지배권을 탈취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것 같다. “존재하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말은 자신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의 자각이다. 82

 

 

* 애무는 주체의 존재방식이다. 애무를 통해 주체는 타자와의 접촉에서 단지 접촉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감각 활동으로서의 접촉은 빛의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다. 하지만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접촉에서 주어지는 손의 미지근함이나 부드러움, 이것이 애무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모른다>는 것, 근본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음, 이것이 애무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애무는 마치 도망가는 어떤 것과 하는 놀이, 어떤 목표나 계획이 전혀 없이 하는 놀이, 우리 것과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무엇과 하는 놀이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언제나 다른 것, 언제나 접근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미래에서 와야 할 것과 하는 놀이처럼 보인다. 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순수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이다.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는 이러한 배고픔의 증대, 점점 더 풍요해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애무는 헤아릴 수 없는 배고픔을 먹고 산다.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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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3-1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과 애무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군요.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