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화 1 위대한 영화 1
로저 에버트 지음, 최보은.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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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위대한 영화들에 관한 소개이자 짧은 분석이다. 책에 실려 있는 92편의 영화 중에서 개인에 따라 위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영화가 있을 수도 있으나 글을 읽다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중 내가 본 영화는 46편이다. 높은 콧대가 팍 꺾이는 기분이다. 위대한 영화들은 왜 이리 많단 말인가? 저자는 600쪽에 걸쳐 영화와 감독들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꼼꼼히 읽으면 지칠 것 같아 보지 못했던 영화가 나오면 대충 훑어보고, 봤던 영화가 나오면 자세히 읽었다.

  전문가의 비평이나 리뷰를 읽음으로서 우리가 얻게 되는 이득은 다른 사람의 생각은 나와 어떻게 다른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지에 대해 기준점을 가지고 측정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말에 맞장구치거나 감탄하며 혹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읽기 때문에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또한 까맣게 잊어버렸던 영화(혹은 문학)의 장면들을 저자가 묘사할 때 느끼는 기쁨 또한 크다.

  책을 읽으며 보지 못한 영화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들도 있었다.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영화가 저자의 글을 읽고 나니 대단한 영화를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의 시각은 예리하고, 유연하게 흐르는 글은 독자를 편안하게 한다. 물론 유머도 있다. 봐야 할 영화들이 쌓여 있으나 욕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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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 민음사 모던 클래식 5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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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ng around your neck(원제)

  Ted 강연을 즐겨 본다. 소원 중 하나는 테드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것이다. 입장료가 어마어마하게 비싸 복권이 당첨되지 않는 한 갈 확률이 거의 제로이긴 하지만. 예전에 핸드폰으로 한 흑인 작가의 강연을 보았다. 젊은 여성이었는데 강연이 얼마나 좋던지. 그녀가 말한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있으니 한 면만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보통 우리는 아프리카 하면 무지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꿈과 희망 없이 겨우 살아가는 나라들을 떠올린다. 미국인에게 멕시코인은 불법체류자들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 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듯이. 그녀는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하나의 이야기만 보고 듣지 말라고. 그 강연은 매우 훌륭했고, 한동안 내 카카오톡 문구는 ‘No single story'였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서 잊혀졌다.

  얼마 전 지인에게 좋은 작가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아디치에를 아냐고 물었다. 아디? 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그는 무척이나 길고 어려운 이름을 노트에 적어주었고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이름을 검색했다. 그래, 바로 그 젊은 흑인 작가이다. 테드 강연에서 그녀가 작가라고 소개했을 때, 사실 그녀가 너무 젊고 멀고도 먼 아프리카의 흑인 작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의 책이 한국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녀가 미국이나 영국처럼 주류가 아닌 ‘흑인 작가’ 이고, 무엇인가 위대한 작품을 쓰기엔 너무 ‘어리고’, 아프리카는 왠지 ‘한국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이 한국에 알려질 리가 없다는 하나의 인식(편견)만을 은연중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알았다. 이미 민음사에서 그녀의 책이 두 권이나 번역되어 나온 사실을.

  <숨통>은 아디치에가 32살에 쓴 단편집이다. 사람들이 21세기의 치누아 아체베의 딸이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로 그녀의 글은 매력이 있다.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났으나 1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석사학위를 마쳤다. 두 나라의 삶을 모두 경험하였기에 그녀의 단편들 역시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나이지리아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나이지리아의 부정부패와 가난, 폭력과 미신들이 그대로 보여지고, 미국을 동경하는 나이지리아인의 모습, 미국으로 이민을 와 그곳의 문화에 적응하려는 나이지리아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미국에 살고 있는 그들은 주변인으로 분리된다. 한 나라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주변인이 된다는 것. 은근한 혹은 대놓고 인종차별을 받는다는 것.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친구와 시드니에 있는 어느 고급스런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여종업원 두 명이 황인종인 우리를 쓱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속닥거리며 깔깔 웃어대는 모습을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로마에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할 때 앞에 서 있었던 한 노인이 내 무릎에 침을 뱉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던 그 순간 느꼈던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이후 백인이 사는 나라에서 황인이나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모멸을 견뎌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영어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모국어를 쓰지 않고 영어만 사용하며 백인들 앞에서 되도록이면 잘 보이기 위해 활짝 웃는다. 미국 영주권을 받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며, 백인과 가짜 결혼을 하기도 한다. 미국인들이 음식을 남기고 비싼 유기농 야채를 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모든 일에 약속을 정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놀라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나이지리안 사람들을 넘어 다른 주변인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미국에서 그들이 사는 모습은 한국인과 바꾸어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소설은 흥미진진하고 굉장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책을 덮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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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그리고 사랑이야기
폴 마줄스키 감독, 레나 올린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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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신녀 에리카> DVD가 알라딘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폴 마줄스키의 다른 작품을 선택했지만, 이 리뷰는 그가 만든 <독신녀 에리카>에 관한 것이다.

  이 감독이 누군가 봤더니 <쿵푸팬더 2>를 만들었구나. 아름다운 여주인공 에리카(질 클레이버) 삼십대 중반의 여성으로 남편은 잘나가는 주식 중매인이고, 자신은 화랑에서 일한다. 딸은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고층 아파트에 사는 그녀는 전형적인 뉴요커로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한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에리카는 깊은 충격을 받는다. 왜? 그녀는 17년 동안의 결혼 생활 동안 바람 한 번 피우지 않고 남편만 바라보며 살았던 순수한 여성이었으니까. 에리카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친구들을 만나며 외로움을 이겨 나간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새로운 사랑은 찾아오는 법. 우연히 화랑에서 만난 영국인 추상 화가와 점심을 함께 한 뒤 그녀는 따뜻하고 매력적인 화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둘은 점차 사랑하게 되고, 화가는 함께 다른 도시로 여름 휴가를 가서 지내다 오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예전의 에리카가 아니다. 에리카는 간곡한 화가의 부탁을 거절하고 뉴욕에 남아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사실 너무 뻔 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제작된 연도가 1978년도이고, 그 당시 이혼한 여성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게다가 에리카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떠는 모습은 <섹스 엔 시티>의 여성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역시 모든 예술은 모방에서 나온다). 그리고 에리카로 분한 질 클레이버의 우아한 자태를 보라. 그녀가 입은 의상들 하나하나가 너무 멋져 질투가 난다. 영화 중간 중간에 흘러나오는 재즈 노래들(피츠제럴드 혹은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아니면 어쩌지), 에리카가 홀짝거리는 화이트 와인(냉장고를 열어보니 브라운 레페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다. 이건 꿩 대신 닭만도 못한 걸), 뉴욕의 골목들과 밤거리는 영화를 한층 맛있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왜 바람을 피우고, 집을 나가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 대부분의 유부남과 유부녀들은 나중에 후회를 하고 다시 배우자에게로 돌아오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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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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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40대 중반의 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호주 출신으로 한국에 있는 한 영어 학원에서 2년간 계약을 맺고 강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성실하고 섬세한 성격이라 학생과 교사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나 또한 차분한 그를 좋아하였고 그가 한국에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점차 나이를 뛰어넘은 진솔한 친구가 되었고, 나는 여태껏 싱글인 그가 안타까워 멋진 여자를 소개시켜주려고 몇 번이나 그에게 만나보라고 제안하였다. 그 때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포기했다.

  그는 가끔 호주에 있는 제일 친하다는 친구의 사진을 나에게 보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였는데, 역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구나 하였다. 한 번은 가장 친하다는 그의 친구가 한국에 놀러 오기까지 하였고,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둘이 진짜 친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한국을 떠날 쯤 되서야 다른 외국인에게 그가 게이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끝까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고, 바보같이 나는 끝까지 그가 게이인줄 알 지 못했다. 멜번에 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그때의 그 친구와 함께 살고 있고, 우리는 페이스북으로 안부를 묻는다. 이제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와 그의 친구의 안부를 물으며 잘 어울린다는 말을 전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에게 미안하다. 그는 자신을 ‘게이’라고 밝히면 내가 혹시 불편해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나의 행동과 말들이 ‘게이’나 ‘레즈비언’을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는 혹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나타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 있니?’ 라고 묻는 대신 ‘사귀는 사람 혹은 좋아하는 사람 있니?’라고 묻는다. 상대방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이 아닌 동성일 수 있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다시는 나의 질문이 상처를 주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가면의 고백>은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유년 시절이 많은 부분 담겨 있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가면은 미사마이자 등장인물인 ‘나’가 쓰고 있는 이성애자로서의 가면이다. 그 가면을 벗으면 동성애자로서의 ‘나’가 존재한다. 소설은 나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나의 20대 중반까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시기이기에 개인의 정체성 혼란과 전쟁의 공포가 뒤섞여 그로테스크한 심상을 자아낸다.

  태어날 태부터 연약한 몸을 가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 활력이 넘치는 젊은이들이나 비극적 결말을 맞는 왕자에 대한 동경심을 품게 된다. 나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남자들에게 욕망을 느끼며 남자의 땀 냄새, 털, 야성에 매료된다. 나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래 친구들이 여성의 나체 사진을 보며 흥분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그 시기의 남자들이 하는 행동과 말들을 모방하여 여자를 좋아하는 척 연기한다. 나는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도 남들과 똑같다며 가까스로 위안을 삼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자기 암시를 걸고 소노코와 연애를 하며 마침내 그녀와 키스를 하게 된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덮었다. 일초가 지났다. 아무런 쾌감도 없었다. 이 초가 지났다. 마찬가지. 삼 초가 지났다.-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뿐이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신의 생각과 육체를 저주하면서, 정상인인척 살아야 한다.

  책을 읽으며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가 떠올랐다. 소설의 ‘나’는 유미주의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뒤섞인 모습이다. 문체는 극단의 미를 추구하며, 독자는 ‘나’의 이야기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우리 주위에도 수많은 ‘나’가 있다.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누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가?

 

#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게는 이성의 육감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좋은 증거로 나는 여자의 나체를 보고 싶다는 어떤 종류의 욕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자에 대한 사랑을 성실하게 연구했고, 예의 짜증스러운 피곤함이 마음에 빗발쳐 이 ‘성실한 연구’를 계속할 수 없게 방해하면, 이번에는 자신이 이성으로 육욕을 물리쳐내는 승리를 이뤄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그리고 나 자신의 냉랭하고도 지속성 없는 감정을, 여자에 이미 질려버린 남자에 빗대어 사뭇 어른인 척하는 자만심의 만족까지 겸하여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십 엔짜리 동전을 넣으면 작동해서 캐러멜을 톡 내미는 과자가게의 기계처럼 내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육체적 욕망도 거의 품지 않은 채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미화했다. 123.

 

# 내가 소노코를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은 신의 이름을 걸고 진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육체적인 욕망이라고는 결코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지금 이 욕구는 어떤 종류의 욕구인 것일까? 육욕이 전혀 없다는 게 이미 명백한 이 정열은 나를 현혹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만일 이것이 진실한 정열이라고 해도 금방 잡힐 불길을 놓고 떠들썩하게 소란을 떠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육체적 욕망에 전혀 뿌리를 두지 않는 사랑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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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 64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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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런던 여행을 갈 때 모스크바 항공에 잠시 스탑 오버를 한 적이 있다.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다른 여행객들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떤 외국인이 여직원에게 항의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아하니 공항 쪽 잘못 인 것 같은데도 직원은 고객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고객이 계속 불평을 하자 직원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F*** you" 직원의 한마디에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 얼어붙었다. 세상에, 공항 직원이 고객에게 그런 욕을 하다니. 나는 순간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외국인은 충격을 받아 어디론가 가 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직원들이 요구하는 대로 신발을 벗고, 심지어 벨트도 풀러 플라스틱 통에 담아야 했다. 그 뒤로 수 많은 공항을 가보았지만, 모스크바 공항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고골은 폴란드-우크라이나계 출신으로 러시아를 배경으로 많은 단편을 창작하였고 모스크바에 묻힌 작가이다. 그가 쓴 몇 편의 단편들을 읽다보니 문득 모스크바 공항에서 겪었던 관료주의의 횡포?가 생각난다. 이 책은 고골의 유명한 단편인 <코>, <외투>, <광인일기>와 희곡인 <감찰관>이 실려 있다. 이 네 편의 단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구분된 조직사회에서의 개인과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일 것이다.

  <코>의 주인공 코발료프는 8등관(관료조직의 등급)인데 여자들을 쫒아다니는 바람둥이이며,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자를 학대하고 무시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그는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코가 사라지다니! 그는 사라진 코 때문에 여자들을 유혹하지 못하고 거드름을 피울 수도 없다. 코를 찾으러 나선 그는 자신의 코가 멋진 제복을 입은 5등 문관 신사로 둔갑한 채 거리를 나다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코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당신은 자신의 코라고 이야기하나 그 코는 이해할 수가 없다며 가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한 경찰관이 코발료프의 코를 찾아 그에게 갖다주고 그는 자신의 코를 갖게 된다. 다시 코가 생긴 코발료프는 당당하게 예쁜 부인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거만하게 살아간다. 우리에게 코발료프의 코와 같은 것은 무엇일까? 높은 지위, 돈, 외모, 학력, 힘,....만약 우리 개개인이 하나쯤은 내세울 수 있는 그 ‘코’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예전의 ‘우리’로 살아 갈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코발료프처럼 ‘코’가 있기 때문에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는 어느 관청에서 일하는 평범한 말단 9등문관이다. 그가 하는 일은 서류를 정서하는 것이고, 그는 늘 같은 자리 같은 직급에서 한결같이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아카키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어떠한 여흥도 즐기지 않은 채 오직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카키는 자신의 외투가 더 이상 수선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았음을 알게되고 새 외투를 사야할 상황에 처한다. 그가 사는 페테르부르크에는 북방의 혹한이 밀어닥치기 때문에 외투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새 외투는 값이 너무 비싸 그가 몇 년간 모은 돈을 보태도 절반은 더 모아야 한다. 따라서 그는 지출을 더 줄이기로 결심했다. 아카키는 저녁마다 차 마시는 일을 그만두고, 초를 켜지 않으며, 심지어 저녁도 굶었다.

  그렇게 몇 달을 아껴 그는 마침내 새 외투를 얻게 되었고 주위 동료들은 그의 새 외투를 보고 멋지다고 칭찬하였다. 그 모습을 본 한 관리가 아카키에게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청하게 되고 그는 얼떨결에 연회에 참석한다. 그러나 밤이 늦도록 파티가 지속되자 그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을 나섰고 광장을 지나다 나쁜 사람들에게 그만 새 외투를 도둑맞고 만다. 충격에 휩싸인 그는 경찰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나 도움을 얻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아는 고위직 친구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중요한 인사’인 그 친구는 그에게 사무직원에게 청원을 먼저 넣어 차례로 보고되도록 일을 처리해야지 지금 감히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냐고 고함을 친다. 태어나 처음으로 상관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아카키는 추운 눈보라를 뚫고 집에 겨우 도착하나 곧 앓아눕더니 죽고 만다. 그에게 남은 재산은 거위 깃털 펜 한 다스, 관청용 백지 한 묶음, 양말 세 켤레, 바지에서 떨어진 단추 두세 개, 그리고 낡은 외투가 전부이다. 그가 죽은 후 페테르부르크 전역에서는 밤마다 관리 모양을 한 유령이 강탈당한 외투를 찾는다며 외투를 걸친 사람에게 무작정 외투를 빼앗아 간다는 소문이 퍼진다.

  평생 말단 직원으로 살아야 했던 아카키. 아무리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아도 자신을 위한 새 외투 한 벌 사기 어려운 아카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다. 관료주의의 틀에 갖혀 버린 그는 스스로를 그 안의 작은 부속품으로 여길 뿐이다. 자신보다 높은 관등에 있는 관료를 두려워하며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카키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감찰관> 이 극은 5막으로 된 희극인데 대단히 풍자적이고 유머가 넘친다. 한 시골 지역에 감찰관이 시찰 온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소식을 접한 지역 군수와 관리직원들은 난리가 났다. 언제 감찰관이 올 지 모르니 정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교육감은 학교 시설물을 점검해야 하고, 재판소장은 주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며, 자선병원장은 환자들을 최소한으로 남기고, 식단도 개선시켜야 한다. 또한 우체국장은 모든 우편물들을 미리 점검하여 검찰관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하며 경찰서장은 청원과 항의가 들어오지 않게 조치해야 한다. 관료들이 분주하게 일을 처리하는 가운데 한 여관에 낮선 젊은이와 하인이 숙박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관료들은 이 사람이 감찰관이라고 확신한다. 군주는 여관을 방문하여 그 젊은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이때부터 관료들의 아부와 뇌물들이 쏟아진다. 젊은이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나 나중에는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높은 관료인 척 연기를 하여 그곳에서 편하게 쉬고 놀다가 떠난다.

  이 희곡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그러나 매우 코믹하게 보여준다. 에이 설마 하는 일들도 여기에서는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지며, 그 모습이 오늘날의 정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우스우면서도 씁쓸하다.

 

# 그 후 이 가엾은 청년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비인간적인 면이 있는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상류층에게, 맙소사, 심지어는 세상에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흉폭하고 무례한 면이 숨어 있는지를 목격했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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