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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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40대 중반의 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호주 출신으로 한국에 있는 한 영어 학원에서 2년간 계약을 맺고 강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성실하고 섬세한 성격이라 학생과 교사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나 또한 차분한 그를 좋아하였고 그가 한국에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점차 나이를 뛰어넘은 진솔한 친구가 되었고, 나는 여태껏 싱글인 그가 안타까워 멋진 여자를 소개시켜주려고 몇 번이나 그에게 만나보라고 제안하였다. 그 때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포기했다.

  그는 가끔 호주에 있는 제일 친하다는 친구의 사진을 나에게 보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였는데, 역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구나 하였다. 한 번은 가장 친하다는 그의 친구가 한국에 놀러 오기까지 하였고,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둘이 진짜 친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한국을 떠날 쯤 되서야 다른 외국인에게 그가 게이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끝까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고, 바보같이 나는 끝까지 그가 게이인줄 알 지 못했다. 멜번에 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그때의 그 친구와 함께 살고 있고, 우리는 페이스북으로 안부를 묻는다. 이제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와 그의 친구의 안부를 물으며 잘 어울린다는 말을 전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에게 미안하다. 그는 자신을 ‘게이’라고 밝히면 내가 혹시 불편해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나의 행동과 말들이 ‘게이’나 ‘레즈비언’을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는 혹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나타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 있니?’ 라고 묻는 대신 ‘사귀는 사람 혹은 좋아하는 사람 있니?’라고 묻는다. 상대방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이 아닌 동성일 수 있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다시는 나의 질문이 상처를 주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가면의 고백>은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유년 시절이 많은 부분 담겨 있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가면은 미사마이자 등장인물인 ‘나’가 쓰고 있는 이성애자로서의 가면이다. 그 가면을 벗으면 동성애자로서의 ‘나’가 존재한다. 소설은 나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나의 20대 중반까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시기이기에 개인의 정체성 혼란과 전쟁의 공포가 뒤섞여 그로테스크한 심상을 자아낸다.

  태어날 태부터 연약한 몸을 가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 활력이 넘치는 젊은이들이나 비극적 결말을 맞는 왕자에 대한 동경심을 품게 된다. 나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남자들에게 욕망을 느끼며 남자의 땀 냄새, 털, 야성에 매료된다. 나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래 친구들이 여성의 나체 사진을 보며 흥분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그 시기의 남자들이 하는 행동과 말들을 모방하여 여자를 좋아하는 척 연기한다. 나는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도 남들과 똑같다며 가까스로 위안을 삼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자기 암시를 걸고 소노코와 연애를 하며 마침내 그녀와 키스를 하게 된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덮었다. 일초가 지났다. 아무런 쾌감도 없었다. 이 초가 지났다. 마찬가지. 삼 초가 지났다.-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뿐이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신의 생각과 육체를 저주하면서, 정상인인척 살아야 한다.

  책을 읽으며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가 떠올랐다. 소설의 ‘나’는 유미주의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뒤섞인 모습이다. 문체는 극단의 미를 추구하며, 독자는 ‘나’의 이야기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우리 주위에도 수많은 ‘나’가 있다.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누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가?

 

#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게는 이성의 육감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좋은 증거로 나는 여자의 나체를 보고 싶다는 어떤 종류의 욕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자에 대한 사랑을 성실하게 연구했고, 예의 짜증스러운 피곤함이 마음에 빗발쳐 이 ‘성실한 연구’를 계속할 수 없게 방해하면, 이번에는 자신이 이성으로 육욕을 물리쳐내는 승리를 이뤄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그리고 나 자신의 냉랭하고도 지속성 없는 감정을, 여자에 이미 질려버린 남자에 빗대어 사뭇 어른인 척하는 자만심의 만족까지 겸하여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십 엔짜리 동전을 넣으면 작동해서 캐러멜을 톡 내미는 과자가게의 기계처럼 내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육체적 욕망도 거의 품지 않은 채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미화했다. 123.

 

# 내가 소노코를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은 신의 이름을 걸고 진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육체적인 욕망이라고는 결코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지금 이 욕구는 어떤 종류의 욕구인 것일까? 육욕이 전혀 없다는 게 이미 명백한 이 정열은 나를 현혹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만일 이것이 진실한 정열이라고 해도 금방 잡힐 불길을 놓고 떠들썩하게 소란을 떠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육체적 욕망에 전혀 뿌리를 두지 않는 사랑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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