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 64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 런던 여행을 갈 때 모스크바 항공에 잠시 스탑 오버를 한 적이 있다.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다른 여행객들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떤 외국인이 여직원에게 항의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아하니 공항 쪽 잘못 인 것 같은데도 직원은 고객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고객이 계속 불평을 하자 직원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F*** you" 직원의 한마디에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 얼어붙었다. 세상에, 공항 직원이 고객에게 그런 욕을 하다니. 나는 순간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외국인은 충격을 받아 어디론가 가 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직원들이 요구하는 대로 신발을 벗고, 심지어 벨트도 풀러 플라스틱 통에 담아야 했다. 그 뒤로 수 많은 공항을 가보았지만, 모스크바 공항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고골은 폴란드-우크라이나계 출신으로 러시아를 배경으로 많은 단편을 창작하였고 모스크바에 묻힌 작가이다. 그가 쓴 몇 편의 단편들을 읽다보니 문득 모스크바 공항에서 겪었던 관료주의의 횡포?가 생각난다. 이 책은 고골의 유명한 단편인 <코>, <외투>, <광인일기>와 희곡인 <감찰관>이 실려 있다. 이 네 편의 단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구분된 조직사회에서의 개인과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일 것이다.

  <코>의 주인공 코발료프는 8등관(관료조직의 등급)인데 여자들을 쫒아다니는 바람둥이이며,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자를 학대하고 무시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그는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코가 사라지다니! 그는 사라진 코 때문에 여자들을 유혹하지 못하고 거드름을 피울 수도 없다. 코를 찾으러 나선 그는 자신의 코가 멋진 제복을 입은 5등 문관 신사로 둔갑한 채 거리를 나다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코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당신은 자신의 코라고 이야기하나 그 코는 이해할 수가 없다며 가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한 경찰관이 코발료프의 코를 찾아 그에게 갖다주고 그는 자신의 코를 갖게 된다. 다시 코가 생긴 코발료프는 당당하게 예쁜 부인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거만하게 살아간다. 우리에게 코발료프의 코와 같은 것은 무엇일까? 높은 지위, 돈, 외모, 학력, 힘,....만약 우리 개개인이 하나쯤은 내세울 수 있는 그 ‘코’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예전의 ‘우리’로 살아 갈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코발료프처럼 ‘코’가 있기 때문에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는 어느 관청에서 일하는 평범한 말단 9등문관이다. 그가 하는 일은 서류를 정서하는 것이고, 그는 늘 같은 자리 같은 직급에서 한결같이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아카키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어떠한 여흥도 즐기지 않은 채 오직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카키는 자신의 외투가 더 이상 수선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았음을 알게되고 새 외투를 사야할 상황에 처한다. 그가 사는 페테르부르크에는 북방의 혹한이 밀어닥치기 때문에 외투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새 외투는 값이 너무 비싸 그가 몇 년간 모은 돈을 보태도 절반은 더 모아야 한다. 따라서 그는 지출을 더 줄이기로 결심했다. 아카키는 저녁마다 차 마시는 일을 그만두고, 초를 켜지 않으며, 심지어 저녁도 굶었다.

  그렇게 몇 달을 아껴 그는 마침내 새 외투를 얻게 되었고 주위 동료들은 그의 새 외투를 보고 멋지다고 칭찬하였다. 그 모습을 본 한 관리가 아카키에게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청하게 되고 그는 얼떨결에 연회에 참석한다. 그러나 밤이 늦도록 파티가 지속되자 그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을 나섰고 광장을 지나다 나쁜 사람들에게 그만 새 외투를 도둑맞고 만다. 충격에 휩싸인 그는 경찰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나 도움을 얻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아는 고위직 친구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중요한 인사’인 그 친구는 그에게 사무직원에게 청원을 먼저 넣어 차례로 보고되도록 일을 처리해야지 지금 감히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냐고 고함을 친다. 태어나 처음으로 상관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아카키는 추운 눈보라를 뚫고 집에 겨우 도착하나 곧 앓아눕더니 죽고 만다. 그에게 남은 재산은 거위 깃털 펜 한 다스, 관청용 백지 한 묶음, 양말 세 켤레, 바지에서 떨어진 단추 두세 개, 그리고 낡은 외투가 전부이다. 그가 죽은 후 페테르부르크 전역에서는 밤마다 관리 모양을 한 유령이 강탈당한 외투를 찾는다며 외투를 걸친 사람에게 무작정 외투를 빼앗아 간다는 소문이 퍼진다.

  평생 말단 직원으로 살아야 했던 아카키. 아무리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아도 자신을 위한 새 외투 한 벌 사기 어려운 아카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다. 관료주의의 틀에 갖혀 버린 그는 스스로를 그 안의 작은 부속품으로 여길 뿐이다. 자신보다 높은 관등에 있는 관료를 두려워하며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카키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감찰관> 이 극은 5막으로 된 희극인데 대단히 풍자적이고 유머가 넘친다. 한 시골 지역에 감찰관이 시찰 온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소식을 접한 지역 군수와 관리직원들은 난리가 났다. 언제 감찰관이 올 지 모르니 정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교육감은 학교 시설물을 점검해야 하고, 재판소장은 주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며, 자선병원장은 환자들을 최소한으로 남기고, 식단도 개선시켜야 한다. 또한 우체국장은 모든 우편물들을 미리 점검하여 검찰관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하며 경찰서장은 청원과 항의가 들어오지 않게 조치해야 한다. 관료들이 분주하게 일을 처리하는 가운데 한 여관에 낮선 젊은이와 하인이 숙박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관료들은 이 사람이 감찰관이라고 확신한다. 군주는 여관을 방문하여 그 젊은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이때부터 관료들의 아부와 뇌물들이 쏟아진다. 젊은이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나 나중에는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높은 관료인 척 연기를 하여 그곳에서 편하게 쉬고 놀다가 떠난다.

  이 희곡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그러나 매우 코믹하게 보여준다. 에이 설마 하는 일들도 여기에서는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지며, 그 모습이 오늘날의 정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우스우면서도 씁쓸하다.

 

# 그 후 이 가엾은 청년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비인간적인 면이 있는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상류층에게, 맙소사, 심지어는 세상에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흉폭하고 무례한 면이 숨어 있는지를 목격했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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