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 시선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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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1865 까바르네 소비뇽은 인기가 많다. 선물하기도 좋고, 가끔 호사롭게 혼자 마시기에도 적당한 가격이다. 물론 맛도 끝내준다. 1865는 칠레를 대표하는 와인 중 하나이다. 수년 전부터 저렴한 칠레 와인(호주 와인과 함께)이 한국에 대거 수입되기 시작했고, 프랑스 와인 대신 칠레 와인을 자주 구입하면서부터 칠레=와인 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고 있다. 칠레의 독재정치와 군사정권의 역사가 와인에 묻혀 조금씩 잊혀진다.

  네루다는 칠레 출신의 위대한 민중 시인이다. 그는 시를 통해 칠레의 정치를 비판하였는데, 그의 시를 읽으며 칠레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는 1904년 태어났고 열아홉살 때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라는 시집을 내놓았다. 아름다운 연애시들이 실려 있다. 1944년 네루다는 노동자들의 요청에 의해 지역 상원에 당선되었고 칠레의 정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우익 독재자 곤살레스 비달레에 의해 반역죄인으로 몰려 파리로 도망간다. 비델라 정부가 무너진 후 그는 다시 칠레로 돌아왔다. 1970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네루다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하였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네루다는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3년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아옌데가 죽고, 그해 네루다도 산티아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네루다의 죽음 후 그가 살았던 집이 샅샅이 파헤쳐지고 파괴되어 세계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네루다는 칠레의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신조를 지키며 글을 써내려갔다. 그가 노동자의 비참과 죽음을 노래할 때, 그는 분노와 고발을 넘어 고통에 동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네루다는 편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민중의 삶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는 소박하지만 힘이 있고 아름답다. <네루다 시선>은 네루다의 5권의 시집과 그 안에서 고른 시 여러 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 시집 중 여기에 실려 있는 7편의 시는 다 외우고 싶을 정도이다.

  번역은 정현종 시인이 하셨다. 이 분이 스페인어도 배우셨나 깜짝 놀라 옮긴이 후기를 보니 영역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본인도 중역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고백한다. 영시를 번역해본 사람은 안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시는 단어 하나하나가 함축적이기 때문에 번역이 매우 어렵다. 그런데 번역도 아닌 중역이라면 그 시는 얼마나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살짝 든다(물론 책에 번역된 시를 읽으면서 충분히 감동과 기쁨을 느꼈지만).

 

 

* 내 양말을 기리는 노래

 

마루 모리가 나한테 가져왔다

양말

한 켤레

그건 그녀의 양 치는

손으로 짠 것,

토끼처럼

부드러운 양말 한 켤레.

나는 두 발을

그 속에 넣는다

마치

황혼과

양가죽으로

두 개의 상자 속으로

밀어 넣듯이.

 

강렬한 양말,

내 두 발은

양털로 만들어진

두 마리 고기,

금색 실 한 가닥이

들어가 있는

남청빛

두 마리 기다란 상어,

두 마리 거대한 검은 새,

두 개의 대포:

내 두 발은

거룩한

양말들로 하여

이렇게 명예스러워졌느니.

처음에

그것들은

너무 훌륭해서

내 발은 도무지

두 늙어빠진

소방수처럼

거기에 걸맞지 않게

보였다, 그

짜인 불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소방수,

그 불타는

양말에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마치 학생들이

부나비를

보관하고,

학자들이

신성한 책들을

모으듯이,

그것들을 보관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나는 물리쳤다

그것들을

금으로 된

새장에

 

넣고

매일

모이와

분홍색 참외 조각을

주고 싶은

엄청난 충동을

물리쳤다.

아주 희귀한

녹색 사슴을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서

가책을 느끼며

먹는

정글의 탐험가들처럼,

나는 두 발을

뻗어

그 멋진

양말을

신고

그리고 구두를 신었다.

내 송시의

덕목은 이렇다:

아름다운 건 갑절로

아름답고

좋은 건 두 배로

좋다, 그게

겨울에

양털로 만든

한 켤레 양말의 일일 때에는.

 

 

* 산보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을 때가 있다.

나는 양복점에도 들어가 보고 영화관에도 들어가 본다

펠트로 만든 백조처럼 시들고, 뚫고 들어갈 수 없이 되어,

근원의 물과 재 속으로 나아간다.

 

이발관 냄새는 나로 하여금 문득 쉰 소리로 흐느껴 울게 한다.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돌이나 양모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더 이상 상점들을 보지 않고, 정원들,

상품, 안경들, 엘리베이터들을 보지 않는 것.

 

내 발이 싫어지고 내 손톱과

내 머리카락 그리고 내 그림자가 싫을 때가 싫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싫을 때가 있다.

 

하지만 멋진 일일 거야

한 송이 자른 백합으로 법원 직원을 놀라게 하고

따귀를 갈겨 수녀를 죽이는 건 말야.

참 근사할 거야

푸른 칼을 들고 거리를 헤매며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소리를 지르는 건 말야.

 

나는 줄곧 암흑 속에서 뿌리로 잇는 걸 바라지 않는다,

불안정하고, 길게 뻗어 있으며, 잠으로 몸서리치고,

땅의 축축한 내장 속으로, 계속 내려가,

흡수하고 생각하며, 매일 먹는 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너무 심한 비참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계속 뿌리나 무덤이기를 원치 않는다,

시체들의 창고인 땅 밑에서 혼자

거의 얼어서, 슬픔으로 죽어가는 걸 원치 않는다.

 

그게 바로 월요일이, 내가 가책받은 얼굴로

오고 있는 걸 볼 때, 가솔린처럼 불타고,

상처 입은 바퀴처럼 진행하면서 울부짖고,

밤을 향해 가며 뜨거운 피로 가득 찬 자국을 남기는이유.

 

그리고 그건 나를 어떤 구석으로 몰아넣고, 어떤 축축한 집으로,

뼈들이 창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병원들로,

식초 냄새 나는 구둣방으로 몰아넣고,

균열처럼 무서운 어떤 거리로 몰아넣는다.

 

유황색 새들, 내가 증오하는 집들 문 위에 걸려 있는

끔찍한 내장들

커피포트 속에 잊힌 틀니,

수치와 공포 때문에 울었을

겨울들,

사방에 우산들, 독액, 그리고 탯줄.

 

나는 조용히 거닌다, 두 눈을 가지고, 구두와

분노를 지니고, 모든 걸 잊어버리며,

나는 걷는다, 사무실 건물들과 정형외과 의료기구상들 사이로,

그리고 줄에 빨래가 널려 있는 안뜰들-

속옷, 수건, 셔츠들에서 더러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는 거길 지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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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1-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스파냐말 전공자가 없는 한국도 아닌데,
새로운 번역으로 꾸며서 내놓지 않은
민음사 출판사 책 매무새가 아쉽네요.

생각해 보면, 한국에 스웨덴말 전공자와 교수가 있어도,
아직 린드그렌 할머님 동화책을 스웨덴말에서 옮겨서 나온 책은
딱 한 권 빼놓고는 없으니, 그럴 만도 할 수 있겠지요.

안네 프랑크 일기책도 네덜란드말 아닌 독일말로 다시 옮긴 책으로
중역하는 현실이고요.
 
고독의 권유 - 시골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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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석주는 시인이다. ‘대추 한 알’이란 시를 읽으면 그가 단번에 좋아질 것이다. 에세이집 <고독의 권유>는 2000년에 서울 생활을 접고 안성 시골로 내려간 그가 쓴 시골 예찬?이다. 그는 적막한 시골에서 비로소 숨을 쉬고 평안을 느낀다. 그는 적극적으로 고독에 동참하며 시골에서의 참을 수 없는 고요를 즐긴다. 시인의 글을 읽다보면 당장 짐을 싸서 시골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시인처럼 멋지게 행동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시골로 내려가면 무엇으로 돈을 벌어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시인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 나 하나 뿐이랴... 그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고독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소음이 넘치는 세상에서 고독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지만, 버튼만 누르면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홀로 있기를 선택하기란 정말 쉽지 않지만 올해는 좀 더 조용하고 침묵하는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 나는 진정으로 사람들과 떨어져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들과 만나 덧없는 잡담으로 소모하는 시간은 끔찍하다. 내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정한 삶의 규범들을 깨뜨리고, 내가 지향하는 ‘깊고 고요한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 견고한 책상, 펜과 백지, 나만의 시간, 무서운 집중력....들을 꿈꾼다. 강한 자만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낼 수 있고, 강한 자만이 자기만의 시간을 취한다. 인류에게 유익한 그 무언가 경이로운 것은 모두 정금과도 같은 순도 높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탄생한다. 자기만의 시간의 그 초인적 인내, 그 몰입, 그 황홀한 자기 연소 없이는 진부한 삶 외에 아무것도 없다. 59.

 

* 우리 시대에 침묵하는 자들은 소수다. 그들은 계율이 엄격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거나 묵언정진하는 절집의 스님들, 그리고 소수의 화가나 시인들이다. 화가나 시인들에게 침묵은 창조의 불가결한 질료이며 자양분이다. 그러므로 침묵은 도무지 억제할 수 없는 내면으로부터 분출되는 말이다. 침묵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다. 72.

 

* 도시를 한가롭게 걷는 산책은 도시의 삶을 지배하는 광속의 네트워크로부터 자신의 삶을 단절하는 행위다. 시인은 도심을 느릿느릿 걸으며 그 몸이 잃어버린 저 농경사회적 저속의 시간을 제 몸으로 이전하려고 한다. 77.

 

* 의자가 있는 찻집에서의 휴식, 읽고 싶은 책과 음반 구입, 갓 구워낸 빵들과 같은 일상적 쾌락을 향한 나의 욕망이 시골에서는 지체되거나 좌절된다. 매우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그 불편을 통해 나는 참을성을 키우고 나의 조급한 욕망들에 대해 유연해질 수 있다. 또한 고립은 사유를 깊게 하고, 본질에 보다 가까이 가게 만든다. 105.

 

* 사랑이란 범박하게 말하자면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혹은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끌려 서로 마음의 소통을 하고, 그 이전까지 전혀 다른 배경과 방식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몸과 마음과 영혼 전체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두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한 사람만의 일방적인 것일 수 없다. 154

 

* 사람에겐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은 법이다. 우리 생에서 어떤 일을 과감하게 저질러버림으로써 생겨나는 후회보다는, 바로 그 일을 저지르지 않고 그냥 흘려보냄으로써 생겨나는 후회가 더 크다. 그 후회는 짧은 한 생애에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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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위기
우디 앨런 감독, 미아 패로우 외 출연 / 퍼니스크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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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Alice이다. 가끔 영화건 소설이건 원제를 바꾸지 말고 표기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중년의 위기>는 적절한 제목이고 대중들에게 훨씬 매력적이게 다가오긴 하지만, 감독이 여주인공 ‘엘리스’를 영화 제목으로 선정했으면 그 뜻에 따라 그대로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제목 그대로 영화는 중년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아 패로우가 주연인 엘리스 역을 맡았는데, 그녀는는 그 당시 우디 알렌의 실제 부인이기도 하였다. 순이 사건만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지금까지 행복한 부부로 지냈을지도 모른다. 알렌의 개인적인 삶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감소되는 건 아니다.

  엘리스는 결혼 16년차로 유능하고 잘생긴 남편과 명품 유치원에 다니는 남매를 둔 뉴욕의 최상류층 삶을 살고 있다. 방은 셀 수 없이 많고, 집안은 명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요리사, 가정부, 운전사, 개인 피트니스 트레이너도 집에서 일을 한다. 엘리스는 어렸을 때 수녀가 되고 싶었을 정도로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좋아하였고, 패션 관련 일을 하면서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나 현재의 남편을 만나 호화로운 삶 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그녀는 무언가 공허함을 느끼나 그것의 실체를 찾을 수 없고, 그 공허함은 육체의 아픔으로 나타난다.

  주변인들의 추천으로 엘리스는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의사 닥터 양을 찾아가고, 그는 최면을 통해 엘리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이때부터 지극히 현실적이고, 도회적인 이야기가 갑자기 상상의 세계와 섞여버린다. 엘리스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투명 인간이 되기도 하고, 그녀가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유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엘리스의 성격이 완전 다르게 변하기도 하고 그녀의 뮤즈가 등장하여 글쓰기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영화가 막 진전되려는 순간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 웃음이 나올 수 밖에. 감독은 어리둥절한 관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뉴욕의 삶과 판타지를 버무려간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얌전히 따라갈 수 밖에.

  엘리스는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남편이 바람 피운 사실을 알게 되고, 남편은 미안하다고 사죄를 하고, 엘리스는 남편과 이혼하려고 마음을 먹고, 새로운 남자는 예전 아내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때 닥터 양은 엘리스에게 마지막으로 약을 처방해 주는데, 그 약은 누구에게든지 먹이면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사랑의 묘약. 그렇다면 우리의 엘리스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녀는 약을 개수통에 버리고, 두 아이를 데리고 켈커타로 떠난다. 그곳에서 몇 년간 봉사를 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작은 집에서 두 아이를 기르며 빈민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삶을 산다.

  마지막은 엘리스가 허름한 놀이터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그네에 태우고 뒤에서 밀어주는 장면이다. 이때 그녀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 늘 단정했던 단발머리와 밍크코트를 입었던 그녀는 없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 모양을 하고 헐렁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엘리스가 환하게 웃는다. 늘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했던 그녀가 거침없이 활짝 웃는 모습은 그 장면이 처음이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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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코와 리타 - 아웃케이스 없음
페르난도 트루에바 외 감독, 에만 소르 오냐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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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라는 나라는 내게 재즈와 더불어 모히또를 생각나게 한다. 쿠바의 아바나(하바나)는 헤밍웨이가 20년을 살았던 장소이며, 그는 아바나의 단골 술집에서 모히또를 줄기차게 마시며 <노인과 바다>를 비롯한 위대한 작품들을 써내려갔다. 언젠가는, 반드시. 기필코 아바나의 해변에 앉아 모히또를 마시며 재즈 음악을 들을 것이다. 에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는 재즈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치코는 클럽의 재즈 피아니스인데 그는 실제 쿠바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베보 발데즈가 모델이다(2013년에 사망하였다). 영화에 나오는 피아노 음악은 발데즈가 직접 녹음한 것이라 한다. 영화의 시작부분은 1940년~50년대 쿠바 음악의 황금기를 보여준다. 치코는 어느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름다운 리타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목소리에 반한다. 그때 리타가 부르는 곡은 베사베 무초. 둘은 사랑에 빠지나 평탄한 사랑은 없는 법. 치코의 전 애인이 둘 사이를 훼방놓고 치코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리타는 이에 실망하여 자신을 캐스팅한 미국 사업가를 따라 뉴욕으로 떠난다.

  리타는 그곳에서 점점 유명해지고, 치코는 그녀를 잊지 못해 뉴욕으로 건너간다.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만, 여전히 장애물은 존재하며 결국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치코와 리타가 결혼하기로 한 전날 치코는 마약을 소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미국에서 강제 출국 당하며, 치코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리타는 술을 마시고 라스베가의 한 무대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을 고발한다(백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공연하는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없는 미국의 흑인 스타들. 1955년 흑인 여성이었던 로자 파크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체포되기 전까지 흑인과 백인은 버스에서조차 따로 앉아야만 했던 역사를 기억하는가?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 흑인들이 그러한 차별을 받고 살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 힘들 정도이다). 그로 인해 그녀는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다.

  영화의 시작은 노인이 된 치코가 구두닦이를 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로 이어진다. 치코는 1961년 카스트로 정권하에서 재즈가 불손한 음악이라고 억압받을 때 피아노 치기를 그만두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과거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치코에게 미국의 유명한 여가수가 찾아와 그와 함께 음반을 녹음하고 싶다고 제안하는 현재의 장면으로 이어진다(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떠오른다). 치코는 예전의 리타처럼 전성기를 누비며 젊은 여가수와 함께 공연을 하고, 마침내 리타를 찾아낸다. 노인이 된 리타와 치코가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둘의 해피엔딩을 예상했기에 울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역시나 눈물이 났다.

  재즈가 주요 소재이기에 당연히 끊임없이 재즈가 흘러나온다. 찰피 파커, 차노 포소, 넷 킹 콜 등 그 당시 쟁쟁했던 음악가들이 치코와 리타와 함께 등장하여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한다. 에니메이션은 유쾌하고 감각적인 디자이너 하비에르 마르스칼이 담당하였는데, 현재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코비를 만든 작가이다). <치코와 리타>는 재즈와 함께 온 생애를 살았던 음악가들의 이야기이다. 음악이 있어, 사랑이 있고, 음악이 있어, 삶이 이어진다. 누군가 당신에게 치코처럼 온 생애를 바쳐 사랑한 대상이 있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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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걸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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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신 홍 킹스턴의 <여전사>를 처음 읽었던 때가 떠오른다. 그녀가 풀어놓는 중국의 신화와 전설들에 흠뻑 취해 눈과 목을 꾹꾹 누르면서도 몇 시간을 꼼짝 못하고 읽었다. <열세 걸음>을 펴고 ‘두 걸음’까지 읽은 후, 이 책이 도중에 나를 놔두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였다. 결국 오후 내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고, 간식을 먹으며 책에 붙들려 있었다. 겨우 읽기를 마친 나는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책을 노려보고 있다. 때로는 장편 소설을 읽는 것이 두렵다. 위대한 소설은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열세 걸음>이란 제목은 러시아 민담에서 비롯되었는데, 두 발로 종종 뛰지 않고 한 발 한 발 걷는 참새를 본 사람에게는 행운이 온다는 민담이다. 참새가 열 두 걸음까지 걷는 것을 보는 사람은 열 두 가지의 다른 행운을 얻게 되지만, 열 세번째 걸음은 절대 보면 안된다. 열세번째 걸음을 보게 되면 앞서의 모든 행운이 갑절의 악운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목차를 보니 열세 걸음까지 있다. 이런, 그렇다면 열두 걸음까지만 읽고 책을 덮어야 하나? 한 걸음, 두 걸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심장이 두근거리고, 소설은 긴장과 갈등을 더해간다.

  소설은 중국의 소도시에서 중학교 물리 선생인 팡푸구이가 수업 중 쓰러져 죽는 사건을 계기로 전개된다. 이 죽음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교사 봉급을 인상하고 교사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그는 교직을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과로로 기절했을 뿐이다. 장례식장으로 이송할 때쯤 그는 깨어나지만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왜? 그의 죽음이 도시의 교사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 교사들의 열악한 처지를 고발하고 있으니까? 따라서 그는 살았지만 대의를 위해 살아나서는 안된다. 팡푸구이는 집으로 가나 아내는 그가 귀신이라고 받아주지 않는다. 그는 할 수 없이 이웃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이웃집에는 그의 동료 물리교사인 장츠추와 장례미용사인 그의 아내가 살고 있다. 팡푸구이의 사정을 들은 리위찬은 그의 얼굴을 남편 장츠추와 똑같이 성형을 시킨다. 그리고 팡푸구이를 다시 학교로 보내고, 장츠추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도록 계획한다.

  이제 팡푸구이는 가짜 장츠추가 되어 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고, 진짜 장츠추는 밖에서 물건을 팔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괴로워한다. 상황은 점점 비극으로 치닫는다. 과부가 된 팡푸구이의 아내 투샤오잉은 토끼가죽 벗기는 공장에서 공장 작업 주임과 밀애를 나누다 들키고, 자살한다. 팡푸구이도 장츠추로 살아야 하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장츠추는 장사를 하러 나섰지만 돈도 벌도 못하고,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고, 범죄자로 오해를 받기도 하며 온갖 고생을 겪으며 유령처럼 도시를 떠돈다. 모두들 본래의 자신을 잃고, 어찌해야 될지 몰라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이다(왠지 토마스 하디의 작품이 떠오른다).

  등장인물들의 비극적인 삶은 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병든 사회체제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끔찍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학교와 사회에서는 입시와 성공만을 강조하고, 모든 행위들은 국가의 충성을 위해 행해져야 되며, 매체는 대중을 조작하고, 신문기사는 진실을 왜곡한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 수가 없다.

  소설을 풍부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매력은 형식에서 비롯된다. 소설의 화자는 철망에 갇힌 ‘나’가 분필을 먹으며 ‘우리’에게 말하는 형태이다. 한편으로는 듣는 ‘나’가 ‘너’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화자와 청자가 수시로 위치를 바꾸어 이야기를 구술하기 때문에 시간과 사건이 뒤엉키고 관점이 달라진다. 이렇게 복잡한 구성을 취하면서도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에게 누가 존경을 표하지 않으랴.

 

# 그녀는 참새가 병아리처럼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걸 보면 하늘에서 행운이 뚝 떨어진다고 했지. 참새가 한 걸음 내디디면 자네한테 횡재수를 안겨주고, 두 걸음을 내디디면 관운을 안겨주고, 세 걸음을 내디디면 여복을 안겨주고, 네 걸음을 내디디면 건강운을 안겨주고, 다섯 걸음을 내디디면 자세의 기분이 늘 유쾌한 상태를 누리게 되고, 여섯 걸음을 내디디면 자세 사업이 순조로워지지. 일곱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의 지혜가 곱절로 늘어나고, 여덞 걸음을 내디디면 아내가 자네한테 잘하고, 아홉 걸음을 내디디면 이름을 온 세상에 떨치게 되며, 열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 생김새가 멋지게 바뀌고, 열한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 아내가 아름다워지며, 열두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 아내와 자네 애인이 화목하게 어울려 자매처럼 친한 사이가 된다는 거야. 하지만 절대로 열세번째 걸음을 보아선 안 된다네. 만일 참새가 열세번째 걸음을 내딛는 걸 보았다가는 앞서의 모든 행운이 죄다 곱절의 악운으로 바뀌어 자네 머리 위로 뚝 떨어져내린다지 뭔가! 4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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