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아이들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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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래 전 작가의 책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읽고 단박에 그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여러 책들을 통해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에 대해 배웠고, 아이들의 상냥함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작년 오키나와의 투명한 바다를 보며 그를 떠올렸다. 행복했다. 그의 책은 누군가에겐 뜨거운 빛이 된다. 에세이를 다시 읽었다. 여전히 새롭다. 마음이 다시 뜨거워진다.

 

 

* 어린 소녀가 자기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굴의 인간이 탄생되었다.

“.....야스코, 잘 생각해 봐.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는 건 도둑질을 한 사실이 아니라 도둑질을 한 뒤의 마음이야. 사람은 나쁜짓을 하고 나면 반드시 뭔가에 기대려는 마음을 품게 돼. 실컷 야단맞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지지. 그게 바로 인간이 기대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증거야. 아이들도 나쁜 짓을 했을 때 야단을 맞고 나면 훨씬 즐겁게 놀지 않니? 어른달도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깊이 반성했나 보다 하고 안심하지.

하지만 양쪽 다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한 번 저지른 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선생님은 생각해. 그 죄를 평생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해.” 52

 

* 지금 나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낙천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낙천주의자야말로 진정한 비판 정신의 소유자이다. 80

 

* 상냥함은 정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은 아이들이었다. 94

 

* 무거운 인생을 짊어진 아이일수록 낙천적이었다.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아이일수록 상냥했다. 왜 그럴까,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119

 

* 내가 오키나와에서 배운 것은 한 마디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인간의 상냥함은 오직 거기에서만 생겨난다. 낙천성이란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 그 자체이다. 아이들이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149

 

* 마코토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야외 글짓기 대회 때 딱지를 빼앗길 뻔했던 일 때문이었다.

 

딱지 -마코토 1학년

 

딱지는 재미있으니까

못하게 하면 안 돼

나는 딱지를 못하게 하면

밥도 안 먹을 거야

나는 딱지가 없으면

공부도 안 할 거야

딱지가 없으면

나는 죽는 게 나아

딱지를 찢으면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딱지는 내 친구니까

찢으면 안 돼

156-7

 

 

* 하야시 다케지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내 수업이 다른 사람의 수업과 조금이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소크라테스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수업은 독사(doxa, 참된 인식인 이데아에 대하여 낮은 주관적 인식을 가리키는 말. 억견.)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갖고 있는 것’을 꼼꼼히 들여다 보는 거죠. 다른 수업에는 이런 면이 좀 부족하지 않을까요?” 210

 

 

* 내 수업에서도 아이들의 반응이 뚜렷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활발하게 발표했지만, 그것은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활발하게 발표하던 아이들이 침묵했을 때, 아이들의 얼굴은 확연히 달라졌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무엇일까.

하야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 아이들은 발가벗겨진 경험을 결코 고통스럽다거나 불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것 역시 하나의 해방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 즉 정화가 아닐까요? 빌려온 지식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아이들은 해방되고 정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업중인 아이들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이 아닐까요?” 211

 

 

*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지 않는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까닭은 타인의 불행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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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의 시간
도종환 지음, 공광규 외 엮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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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 어릴 때 내 꿈은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셕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 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 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게 아이들을 속여 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 만에 내리는

큰 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 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 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에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 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 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찌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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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꽃말을 읽다
안상학 엮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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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이기철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듯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미친 약속 -문정희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페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네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수평선에의 초대 -박용하

 

삶이란 게, 단 한 번 지구 위로 받은 초대라는 생각을 문득 합니다.

달빛이 고요를 항해하는 바다에서는 특히 더합니다.

아직까지 자연보다 더 훌륭한 책을 본 적은 없습니다.

지구는 우주의 오아이스입니다.

바다는 지구의 오아시스입니다.

오늘도 인류는 파아란 별 위에서 타락했습니다.

별 촘촘 싹트는 대양에서, 삶이란 게 지구 위로 초대받은 축제라는 생각을 밑도끝도없이 하곤 합니다.

 

 

* 여름꽃들 -문성해

 

사는 일이 강퍅하여

우리도 가끔씩 살짝 돌아버릴 때가 있지만

그래서 머릿골 속에 조금 맺힌 꽃봉오리가

새벽달도 뜨기 전에 아주 시들어버리기도 하지만

 

부용화나 능소화나 목백일홍 같은 것들은

속내 같은 거 우회로 같은 거 은유 같은 거 빌리지 않고

정면으로 핀다

그래 나 미쳤다고 솔직하게 핀다

 

한바탕 눈이 뒤집어진 게지

심장이 발광하여 피가 역류한 거지

 

거참, 풍성하다 싶어 만질라치면

꽃은 것들을 몽땅 뽑아버리고 내뺄 것 같은

예측 불허의

파문 같은

폭염 같은

깔깔거림이

 

작년의 광증이 재발하였다고

파랗게 머리에 용접 불꽃이 인다고

불쑥불쑥 병동을 뛰쳐나온 목젖 속에

소복하게 나방의 분가루가 쌓이는 7월이다

 

 

* 우물 -박형권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번 귀뚜라미를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오늘 밤에는 귀뚜라미로 변신하여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봐야겠다

 

 

* 태산이시다 -김주대

 

경비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네셔서 죄송한 마음에 나중에는

내가 화장실에서든 어디서든 마주치기만 하면 얼른 고개를 숙

인거라. 그래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우편함

배달물들을 2층 사무실까지 갖다 주기 시작하시는데. 나대로는

또 그게 고맙고 해서 비 오는 날 뜨거운 물 부어 컵라면을 하나

갖다 드렸지 뭐. 그랬더니 글쎄 시골서 올라온 거라며 이틑날

자두를 한 보따리 갖다 주시는 게 아닌가. 하이고, 참말로 갈

수록 태산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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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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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미적이거나 퇴폐적인 예술이 아니더라도, 예술을 예술 되게 하는 기본 요소에서 사치는 큰 몫을 한다. 지극히 사질적인 그림에도 균형 잡힌 구도가 있고 색깔의 배합이 있다. 오페라의 가수들은 온갖 기량을 다 바쳐 가장 불편한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가장 사치스런 방법으로 대사를 읊는다. 시를 쓰는 시인이 감정의 사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운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 왜 그렇게 긴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시간과 노력이 모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 시의 까다로운 운율 장치만큼 무용한 것은 저 노숙자 시인이 원고지에 두른 금박 테두리밖에 없을 것이다. 27

 

* 사람살이는 무한하게 넘실거리며 어제 중요했던 것들의 질서를 오늘 바꾼다. 저 먼 물결의 끝에서 하찮은 것들이 하찮은 신음을 내지른다. 한 세상의 도리를 강구한다는 근엄한 선비 앞에서 갱피 훑는 여자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다. 열녀의 절개는 기생의 딸 춘향이 넘볼 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저 하찮은 것들의 말이 아니라면 어디서 숭고한 말을 찾을 것인가.60

 

 

*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진이정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허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 불러봅니다 꽃이 별이 아니 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처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량겁 후에 단지 한줄기 미소로밖에 기억되지 않을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해 봅니다 엉터리 작명가라 욕하지 마셔요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인 아주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69-70

 

 

* 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93

 

*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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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충격 - 지중해, 내 푸른 영혼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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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이곳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올 것이 아니다. 이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새우며 행복한 사람의 EKd, 프로방스는 그리하여 내게는 그토록 낯이 설었다. 49

 

* 역시 헤어지는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그냥 돌아서서 가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지중해의 맑고 다사로운 물에 그대의 젊은 살을 담아보라. 알 것이다. 참으로 그대의 살은 알 것이다. 생명이 간직하는 것은 오직 새로이 시작하는 현재, 오직 영원한 현재뿐임을. 63

 

*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두 가지 조건, 공간성과 시간성 중에서 우리는 오직 공간의 약속만을 해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우리는 그 만남의 시간을 정하지 못한 채로 있다. 206

 

*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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