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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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미적이거나 퇴폐적인 예술이 아니더라도, 예술을 예술 되게 하는 기본 요소에서 사치는 큰 몫을 한다. 지극히 사질적인 그림에도 균형 잡힌 구도가 있고 색깔의 배합이 있다. 오페라의 가수들은 온갖 기량을 다 바쳐 가장 불편한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가장 사치스런 방법으로 대사를 읊는다. 시를 쓰는 시인이 감정의 사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운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 왜 그렇게 긴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시간과 노력이 모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 시의 까다로운 운율 장치만큼 무용한 것은 저 노숙자 시인이 원고지에 두른 금박 테두리밖에 없을 것이다. 27

 

* 사람살이는 무한하게 넘실거리며 어제 중요했던 것들의 질서를 오늘 바꾼다. 저 먼 물결의 끝에서 하찮은 것들이 하찮은 신음을 내지른다. 한 세상의 도리를 강구한다는 근엄한 선비 앞에서 갱피 훑는 여자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다. 열녀의 절개는 기생의 딸 춘향이 넘볼 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저 하찮은 것들의 말이 아니라면 어디서 숭고한 말을 찾을 것인가.60

 

 

*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진이정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허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 불러봅니다 꽃이 별이 아니 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처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량겁 후에 단지 한줄기 미소로밖에 기억되지 않을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해 봅니다 엉터리 작명가라 욕하지 마셔요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인 아주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69-70

 

 

* 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93

 

*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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