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꽃말을 읽다
안상학 엮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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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이기철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듯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미친 약속 -문정희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페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네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수평선에의 초대 -박용하

 

삶이란 게, 단 한 번 지구 위로 받은 초대라는 생각을 문득 합니다.

달빛이 고요를 항해하는 바다에서는 특히 더합니다.

아직까지 자연보다 더 훌륭한 책을 본 적은 없습니다.

지구는 우주의 오아이스입니다.

바다는 지구의 오아시스입니다.

오늘도 인류는 파아란 별 위에서 타락했습니다.

별 촘촘 싹트는 대양에서, 삶이란 게 지구 위로 초대받은 축제라는 생각을 밑도끝도없이 하곤 합니다.

 

 

* 여름꽃들 -문성해

 

사는 일이 강퍅하여

우리도 가끔씩 살짝 돌아버릴 때가 있지만

그래서 머릿골 속에 조금 맺힌 꽃봉오리가

새벽달도 뜨기 전에 아주 시들어버리기도 하지만

 

부용화나 능소화나 목백일홍 같은 것들은

속내 같은 거 우회로 같은 거 은유 같은 거 빌리지 않고

정면으로 핀다

그래 나 미쳤다고 솔직하게 핀다

 

한바탕 눈이 뒤집어진 게지

심장이 발광하여 피가 역류한 거지

 

거참, 풍성하다 싶어 만질라치면

꽃은 것들을 몽땅 뽑아버리고 내뺄 것 같은

예측 불허의

파문 같은

폭염 같은

깔깔거림이

 

작년의 광증이 재발하였다고

파랗게 머리에 용접 불꽃이 인다고

불쑥불쑥 병동을 뛰쳐나온 목젖 속에

소복하게 나방의 분가루가 쌓이는 7월이다

 

 

* 우물 -박형권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번 귀뚜라미를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오늘 밤에는 귀뚜라미로 변신하여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봐야겠다

 

 

* 태산이시다 -김주대

 

경비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네셔서 죄송한 마음에 나중에는

내가 화장실에서든 어디서든 마주치기만 하면 얼른 고개를 숙

인거라. 그래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우편함

배달물들을 2층 사무실까지 갖다 주기 시작하시는데. 나대로는

또 그게 고맙고 해서 비 오는 날 뜨거운 물 부어 컵라면을 하나

갖다 드렸지 뭐. 그랬더니 글쎄 시골서 올라온 거라며 이틑날

자두를 한 보따리 갖다 주시는 게 아닌가. 하이고, 참말로 갈

수록 태산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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