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의 시간
도종환 지음, 공광규 외 엮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 어릴 때 내 꿈은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셕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 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 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게 아이들을 속여 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 만에 내리는

큰 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 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 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에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 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 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찌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