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재 고개를 넘었다.

그 길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던 그 길은, 사력을 다해야만 넘을 수 있는 길이었다.


 고숙은 사활을 걸고 차를 몰았다. 그런데 그런 고숙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모는 연신 담배를 태우며 한쪽 창문 밖만 응시했다.


 달빛이 없어도 별빛이 없어도. 어둠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눈빛을 따라 여원재 고개 굽이굽이 유려한 능선을 바라보는 고모는 하염없이 담배연기만을
뿜어냈다.
담배를 피운 적이 없던 고숙은 그날 담배를 태워보고 싶다고 여겼다.
그래야 저 여인과 얘기를 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
고모는 지금도 말이 없는데 그때는 더 말이 없었나 보다.


 굽이굽이 도는 고개마다 창문 옆으로 보이는 나무 가지가지 눈을 한보따리씩 이고 있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와르르 쏟아질것같은 눈사태를 일으킬 것 같은 나무들이 눈을 이고 있었다.
바퀴는 윙윙 크르륵 소리를 지르며 힘겨워 했는데 고숙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젊은 여자가 전혀 겁을 내지 않고 한마디 말없이 담배만 태우는 모습에 고숙도  겁을 상실했다 한다 저 여인은 과연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런 생각만 들고. 겁없이 차를 몰았다 한다.

남원역에서부터 두시간 가까이 지나고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여원재 고개를 넘고 두 사람은 운봉 입구에 도착했다.

고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원역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 기사 양반, 갈 수 있지요?


 하고는 차안에서 한마디도 없던 고모가  운봉 입구에 들어서자


 - 기사 양반,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했다 고숙은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고, 애써서 왔는데 고생했다는 한마디도 못들었는데도, 그 이유를 따지기는 커녕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는, 오히려 엉뚱하게도.


 - 인월 가셔야죠? 그냥 가십시다.


  했단다.


- 아니, 그냥 남원으로 돌아갑시다.


- 아니, 이 아가씨가 여기까지 죽을 둥 살 둥 왔으면 목적지까지 가야지. 이런 법은 아니죠. 인월 갑시다. 죽을 고비 다 넘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자니 말이 됩니까?


 고숙 무슨 용기가 났는지.
 오히려 손님보다 기사가 더 적극적으로 손님이 가야할 곳을 앞장서서 가고자 한 셈이다.
 고모 가만히 고숙 하는 양을 보더니,


 - 왜 가야 하죠? 이 밤길에 눈길에, 고갯길을 넘나들며 왜 가야합니까? 내가 미친년이죠.


 -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거 같은데 가십시다. 그리고 미치시지 않으신거 같습니다.


 - 꼭 하고 싶은 일요...


 - ,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은게 여기 오셨죠.


 - 그래요... 


  고모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거 같네요. 그래요. 그럽시다. 가십시다...

그렇게 자동차는 또 눈빛을 가로등 삼아 밤길을 달려 인월에 도착했다.

그렇게 고숙은 고모 인생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끼어들었고 고모는 불쑥 나타나서 고숙 인생을 뒤바꿔 놓아버렸다.

그날 한밤중에 인월에 도착한 고모는  또 한마디 말이 없었다.
매고 왔던 가방에서 큰 지갑을 꺼냈고. 돈을 주고 받던 두사람은  그곳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서로 갈길로 돌아섰다.

그런데...
고숙은 그곳에서 차를 돌리지 않았다.
밤새워 차안에서 고모를 기다렸다.

고모가 고모의 엄마와 그 엄마가 낳은 열두살 어린 동생, 나의 아버지를 만나서, 서럽도록 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그 원망의 시간 내내, 고숙은 차안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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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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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하면서

 

1.
만남과 이별에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
나이가 많든 적든
여자든 남자든
차가운 마음을 가졌든 뜨거운 심장을 지녔든
누구에게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매번 그 순간이 아쉬움일 게다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 정도의 인연이 있었다
오늘 그녀와 공식적으로 마지막 날이다
함께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인 날로서 마지막인 날

엊그제 그녀와 차를 마시고 헤어지는 순간에
그녀가 나를 안아 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최근에 그녀만큼 나를 허물없이 대하고 웃어 주고 안아 주던 사람이
또 있었던가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또 이렇게 헤어지는구나

내가 흉허물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그녀가 우리 동네 사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잠시 이별이다 생각하면
그러다 서로 마음이 통하여 움직이고
그렇게 어제 만났듯이 다시 만나지리라

2.
그래서 그녀에게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으려 했는데
마치 이별 선물 같아서 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잠시 이별이니
그 이별하는 동안이라도 내 마음 전해 주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가 읽고 있던 책과
내가 집에서 쓰고 있는 마스크 팩을
선물한다

잠시 이별을 기념하는 마음으로!

3.
우리 이렇게 잠시 이별했던 인연처럼
또 그렇게 잠시 만나는 인연이 될거라
여기며
책을 보낸다

4.
그녀 나이 47
나의 나이 54
그런데 여전히
30대인 82년생 김지영도
우리를 닮아 있으니

세상이 안 변했니
우리가 안 변했니

우문현답을 기대하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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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1
에밀리 디킨슨 지음, 강은교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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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고독하게 살다 간 시인의 생애가 담겨 있는 아픔의 시들,
그래서 나처럼 일반인의 가슴에 새기기에는 다소 벅차다는 느낌이 든다
 

만약 내가 아픈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 에밀리 디킨슨 -

 

에밀리 디킨슨, 미국 시인. 철저하게 고독한 생애를 살다 간 시인.
그녀의 수많은 시에서 고독, 슬픔, 상처, 영혼, 바람, 공포, 사랑, 소멸 등의 단어를 만날 수 있다.

단호하게 부딪혔던 그 시절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절망했던 아픔과 고독을 합리화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일까.
그녀의 시는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파고 들다가도 , 어린 아이의 살갗처럼 고운 향기를 뿜어내기도 한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
그러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시이다.

사랑으로 충분하다고, 충만한 마음을 전했다가, 다시 그 말을 거두면서 현실을 직시하는 초라한 인생을 고백한다.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라고.

그녀의 시에는 붙임줄(-)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시행을 끝맺지 못하는 습성 때문인가?

 

영혼이 날 비난했네 그래 난 두려워 떨었네 -
금강석의 혀가 욕하기라도 한 듯
모두 모두 날 비난했네 - 허나 난 웃음 지었네 -
내 영혼은 - 그 아침 - 내 친구였네

에밀리 디킨슨의 시 "영혼이 날 비난했네"1연이다.


영혼이 비난했다, 그래서 두렵다고 하는 말은, 시인이 그만큼 영혼과의 대화를 시도했다거나 영혼의 순수함을 간직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생애에 대한 순수와 인간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간직했던 그녀의 삶은 그야말고 철저하게 고립되고 외로운 삶이었을 것이다.
가시밭 같은 길을 자처하며 홀로 외롭게 자신의 영혼과 싸움을 하는 일. 순수하게 시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려는 노력.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런 나날이었을까.

 

그래서 그녀는 하찮은 돌멩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할까하면서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던 것일까.

 

얼마나 행복할까 저 하찮은 돌멩이들은
길 위에 홀로 뒹구는,
... (중간 생략)
태양처럼 자유로이
결합하고 또는 홀로 빛나며,
절대적인 신의 섭리를 지키며
덧없이 꾸밈없이 -

"저 하찮은 돌멩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의 일부분이다.

이 시는 어쩐지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절망적인 고독과 슬픔의 생애를 자기 스스로 대변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이다.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

- 신형철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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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고모와 고숙의 만남, 사랑, 생애

 

2. 여원재 고개를 넘다

 

 

 

- 눈이 펑펑 쏟아졌다.


저 위에서 줄 것이라곤 이 눈밖에 없다 하는 모냥. 하늘에서 진종일 눈이 쏟아졌다.
불려놓은 쌀 알갱이가 기계에 들어가 처음에 빻아져서 나오는 모냥처럼.
눈가루가 넙적 넙적하게 착 퍼져 떨어지는 게. 그걸 맞고 있으면 꼭 밀가루 한 포대 뒤집어 쓴 모냥. 잘 떨어지지도 않는 눈이었다.

내가 고숙을 만난 지 5년째다. 1972년 남원 고모네 집에 여덜 살에 와서는, 5년 동안 고숙을 보았다. 그렇게 5년을 보는 동안, 여기까지만 해도, 그 동안 들었던 말보다 지금 이 때가 더 많은 말을 들은 것 같다


 펌프물이 한번 콸콸 쏟아지면 시원하게 솩솩 물이 올라 온다.

고숙의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되려나 보다. 나는 이렇게 얘기를 잘 하시는 고숙을 보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고모를 만나기 전에는 유교 관련 책만 읽고 공부만 하셨다는데. 고모 말이 맞나 - 살짝 의심을 하면서도. 5년 동안 허튼 말 한마디 하신 적 없었으니 믿어야겠지!
아무튼 고숙은 고모를 엄청 좋아하시는 게 분명하다. 40년도 넘은 것 같은 얘기를 지난해 겨울인 것처럼 저렇게 생생하게 말씀하시니 말이다.

- 그 눈 오는 밤에 남원역 대합실에서 나오는 고모를 보았다. 나는 그때 자가용이 있었다. 낮에는 소방대 일을 잠깐씩 도와주고 밤에는 급하게 연락 오는 사람들을 태워다 줬다. 그날은 역무원이 전화를 해서 와달라고 했다. 인월을 갈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밤에, 눈길에, 여원재 고개를 넘어 인월을 간다는 것이다. 그 밤에 그 눈길에 여원재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간다는 말이나 같다.
나는 못 간다, 미친 짓이다했다.

그런데 역무원 말이. 아주 젊은 여자가 양장을 입고 와서 꼭 가야한다고(그 당시 양장을 입은 젊은 여자는 아주 눈에 띄기 마련이니). 자기는 거길 다녀와야 안 죽는다고. 그래야 여한이 없다고. 꼭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다녀와야 한다고 했단다.
여자 하나 목숨 살려 준다 셈 치고. 데려다 주라고 했단다. 데려다 주는 사람 목숨 값도 쳐준다고 했단다.

고숙. 듣기에 사연이 하도 희한하여. 그래 가서 한번 보기나 하자. 하고 나오셨단다.
그래서 그렇게 고모와 고숙이 만나게 되었단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 밤에, 남원역 앞에서 자가용을 가지고 나온, 아주 깡마르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이 남자를 고모는 만난 것이다.
운명의 지침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줄 한 남자를 만났다, 우리 고모는.

- 참 위험한 짓이었다. 내가 그곳에 왜 갔을까...


- 젊은 여자가 궁금하셨죠?


- 나는 그 답을 아직도 모르겠다...


- 운명 같은 건거죠?


- 이 남원 바닥에 양장 입은 여자가 흔치 않았다. 아주 젊은 여자라고 해서 일본 여자인갑다 생각도 했다. 일본여자가 여원재를 밤에 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만나봐야겠다- 한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이고.


- 여원재는 저도 너무 힘들어요. 작년 겨울방학 때도 아버지랑 타고 가면서 죽을 뻔 했어요. 특히 남원에서 올라갈 때가 더 힘들어요.


고개 하나씩 돌때마다, 아 옆으로 쏠릴 것 같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것 같고. 귀도 아프고. 아 고개만 넘고 나면 토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고개 아흔아홉 고개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침 꿀꺽 꿀꺽 삼켜가며 세 보았는데,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맨날 아흔 아홉 고개 그러던데.


- 지금은 도로를 넓히면서 많이 줄었지만. 고모랑 올라갈 당시만 해도... 저승길이 이 길인가 싶었다. 끔찍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날... 그때에 니 고모가 제일 예뻤다..

, 우리 고숙 최고,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
줄리엣을 사랑했던 로미오가 이보다 더 용감했을까.
우리 고숙의 저 대책 없는 용기가 없었다면 무모한 사랑의 시작도 없었겠지.

 

 (3회차에 이어집니다)

 

*지명 사전 찾기*

 

여원재

백두대간 구계에 있는 이곳 전북 남원시 이백면 여원재(477m)는 연재 또는 연치라 하고 고개 북쪽에는 그 이름을 딴 마을도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역원에는 고개 아래에 여원(女院)이 있다 했으니 연재 마을 즈음이 아닐까 여겨집니다만, 5000분의1 지형도에는 연재 마을 북쪽의 장교리에 '원터골'이라 적어 두었습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곧장 우리나라 대표 고원(高原)인 운봉읍입니다. 운봉은 고개인 여원재와 바닥을 이루는 들판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서림 북쪽의 선두들이 고도가 460m 안팎이고, 운봉 남쪽의 동천리 신덕들은 고개보다 더 높은 480m 안팎일 정돕니다. 이래서 운봉은 모를 일찍 내어 인접한 남원이나 함양보다 20일이나 빨리 7월 중순이면 벼이삭이 팬다고 합니다.

운봉읍

운봉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이라고도 함)으로 아영성(阿英城) 또는 아막성(阿莫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운봉현(雲峰縣)으로 고쳐 경상도 천령군(지금 함양)에 속하게 했다가 고려 때 남원부에 편입됐습니다. 운봉으로 드는 길가에 많은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데, 장교리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고, 들머리인 서천(西川)에는 독을 굽던 가마터도 있습니다.

지금 운봉읍 소재지인 서천리가 옛 운봉현의 치소인데,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지에 있기에 따로 읍성은 쌓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왜구에게 시달림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서 살피겠습니다. 관아와 객사 및 그 앞에 둔 협선루(挾仙樓)는 지금의 운봉초등학교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서쪽으로 당산거리라고 냇가에 잘 조성된 숲이 눈에 듭니다. 당산(堂山)과 돌장승 2기를 비롯하여 여러 빗돌이 있습니다. 이 마을숲은 운봉을 비보하기 위해 동림(東林)과 함께 조성한 서림(西林)입니다. 현두(懸頭)숲 또는 선두숲이라고도 하는데 운봉 사람들이 이곳을 고을의 머리로 인식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북쪽 서천 다리의 이름도 현두교입니다. 당산거리 입구 두 장승(중요민속자료 제20)은 방어(防禦진서(鎭西)대장군인데, 목이 부러진 장승이 남자라고 합니다. 선정비 2기와 불망비 2기 등 갖가지 기념비도 있어 운봉 사람들이 이 숲을 대하는 마음을 잘 드러납니다.

 

(출처 :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황산대첩비.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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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의 농담을 마주친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너무나 적확한 표현에 유쾌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간담이 서늘해진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사금파리보다 더 날카롭게 빛나는 한마디에 으스스해질 정도다.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비유가 아니었네. 이 사람아.

살인 행위와 살인의 과정을 생생한 언어로 비유한다.
.
시인이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인 것을.
주인공 '병수'는 실제로 그렇게 숙련된 킬러이다.
천부적인 살인자
살인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
..
그런 그가 치매를 앓는다
그리고 혼돈이 시작된다
죄의식 하나 없는 인간이
의식과 기억 사이를 오고 가며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린다
기억하려고 애를 쓸수록 그것은 무의미한 망상에 불과하다
..
은희를 살리기 위해
은희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살인을 준비하는 의식은
이미 무의식의 지배에서 농락당한
또는 패배당한 망상일 뿐이다
.
간결하고도 명료한 빛나는 문장들로 이루어낸
살인자의 기억법.
.
.
역시 영화와 문학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읽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서로 같을 수도 없고, 같은 빛깔이 되어서도 안 되는고유의 영역이다.
.
그래서 문학도 영화도
따로따로 아름답다
.
김영하 작가는 말한다.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그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김영하 작가는 그만의 방식으로 세로운 세계에 방문하고 온 것 같다.
글 쓰는 일을 여행에 비유했던 것만큼
그만의 글여행 경험이 녹아 있는 것 같다.
.
아주 좋은 작품을 읽었다. 신선했다
.
농담의 공포
악마적인 재능과 허물어가는 인간의 의식
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고통
.
(없다, 비다, 아무것도 아니다)의 세계로 돌아가는 인간의 마지막 여정
.
그 망가지는 인간 기억의 여정을
참으로 빛나는 언어로 잘 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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