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고모와 고숙의 만남, 사랑, 생애
2장. 여원재 고개를 넘다
- 눈이 펑펑 쏟아졌다.
저 위에서 줄 것이라곤 이 눈밖에 없다 하는 모냥. 하늘에서 진종일 눈이 쏟아졌다.
불려놓은 쌀 알갱이가 기계에 들어가 처음에 빻아져서 나오는 모냥처럼.
눈가루가 넙적 넙적하게 착 퍼져 떨어지는 게. 그걸 맞고 있으면 꼭 밀가루 한 포대 뒤집어 쓴 모냥. 잘 떨어지지도 않는 눈이었다.
내가 고숙을 만난 지 5년째다. 1972년 남원 고모네 집에 여덜 살에 와서는, 5년 동안 고숙을 보았다. 그렇게 5년을 보는 동안, 여기까지만 해도, 그 동안 들었던 말보다 지금 이 때가 더 많은 말을 들은 것 같다.
펌프물이 한번 콸콸 쏟아지면 시원하게 솩솩 물이 올라 온다.
고숙의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되려나 보다. 나는 이렇게 얘기를 잘 하시는 고숙을 보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고모를 만나기 전에는 유교 관련 책만 읽고 공부만 하셨다는데. 고모 말이 맞나 - 살짝 의심을 하면서도. 5년 동안 허튼 말 한마디 하신 적 없었으니 믿어야겠지!
아무튼 고숙은 고모를 엄청 좋아하시는 게 분명하다. 40년도 넘은 것 같은 얘기를 지난해 겨울인 것처럼 저렇게 생생하게 말씀하시니 말이다.
- 그 눈 오는 밤에 남원역 대합실에서 나오는 고모를 보았다. 나는 그때 자가용이 있었다. 낮에는 소방대 일을 잠깐씩 도와주고 밤에는 급하게 연락 오는 사람들을 태워다 줬다. 그날은 역무원이 전화를 해서 와달라고 했다. 인월을 갈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밤에, 눈길에, 여원재 고개를 넘어 인월을 간다는 것이다. 그 밤에 그 눈길에 여원재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간다는 말이나 같다.
나는 “못 간다, 미친 짓이다”했다.
그런데 역무원 말이. 아주 젊은 여자가 양장을 입고 와서 꼭 가야한다고(그 당시 양장을 입은 젊은 여자는 아주 눈에 띄기 마련이니). 자기는 거길 다녀와야 안 죽는다고. 그래야 여한이 없다고. 꼭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다녀와야 한다고 했단다.
여자 하나 목숨 살려 준다 셈 치고. 데려다 주라고 했단다. 데려다 주는 사람 목숨 값도 쳐준다고 했단다.
고숙. 듣기에 사연이 하도 희한하여. 그래 가서 한번 보기나 하자. 하고 나오셨단다.
그래서 그렇게 고모와 고숙이 만나게 되었단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 밤에, 남원역 앞에서 자가용을 가지고 나온, 아주 깡마르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이 남자를 고모는 만난 것이다.
운명의 지침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줄 한 남자를 만났다, 우리 고모는.
- 참 위험한 짓이었다. 내가 그곳에 왜 갔을까...
- 젊은 여자가 궁금하셨죠?
- 나는 그 답을 아직도 모르겠다...
- 운명 같은 건거죠?
- 이 남원 바닥에 양장 입은 여자가 흔치 않았다. 아주 젊은 여자라고 해서 일본 여자인갑다 생각도 했다. 일본여자가 여원재를 밤에 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만나봐야겠다- 한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이고.
- 여원재는 저도 너무 힘들어요. 작년 겨울방학 때도 아버지랑 타고 가면서 죽을 뻔 했어요. 특히 남원에서 올라갈 때가 더 힘들어요.
고개 하나씩 돌때마다, 아 옆으로 쏠릴 것 같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것 같고. 귀도 아프고. 아 고개만 넘고 나면 토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고개 아흔아홉 고개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침 꿀꺽 꿀꺽 삼켜가며 세 보았는데,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맨날 아흔 아홉 고개 그러던데.
- 지금은 도로를 넓히면서 많이 줄었지만. 고모랑 올라갈 당시만 해도... 저승길이 이 길인가 싶었다. 끔찍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날... 그때에 니 고모가 제일 예뻤다..
와, 우리 고숙 최고,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
줄리엣을 사랑했던 로미오가 이보다 더 용감했을까.
우리 고숙의 저 대책 없는 용기가 없었다면 무모한 사랑의 시작도 없었겠지.
(3회차에 이어집니다)
*지명 사전 찾기*
◇여원재
백두대간 구계에 있는 이곳 전북 남원시 이백면 여원재(477m)는 연재 또는 연치라 하고 고개 북쪽에는 그 이름을 딴 마을도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역원에는 고개 아래에 여원(女院)이 있다 했으니 연재 마을 즈음이 아닐까 여겨집니다만, 5000분의1 지형도에는 연재 마을 북쪽의 장교리에 '원터골'이라 적어 두었습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곧장 우리나라 대표 고원(高原)인 운봉읍입니다. 운봉은 고개인 여원재와 바닥을 이루는 들판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서림 북쪽의 선두들이 고도가 460m 안팎이고, 운봉 남쪽의 동천리 신덕들은 고개보다 더 높은 480m 안팎일 정돕니다. 이래서 운봉은 모를 일찍 내어 인접한 남원이나 함양보다 20일이나 빨리 7월 중순이면 벼이삭이 팬다고 합니다.
◇운봉읍
운봉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이라고도 함)으로 아영성(阿英城) 또는 아막성(阿莫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운봉현(雲峰縣)으로 고쳐 경상도 천령군(지금 함양)에 속하게 했다가 고려 때 남원부에 편입됐습니다. 운봉으로 드는 길가에 많은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데, 장교리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고, 들머리인 서천(西川)에는 독을 굽던 가마터도 있습니다.
지금 운봉읍 소재지인 서천리가 옛 운봉현의 치소인데,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지에 있기에 따로 읍성은 쌓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왜구에게 시달림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서 살피겠습니다. 관아와 객사 및 그 앞에 둔 협선루(挾仙樓)는 지금의 운봉초등학교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서쪽으로 당산거리라고 냇가에 잘 조성된 숲이 눈에 듭니다. 당산(堂山)과 돌장승 2기를 비롯하여 여러 빗돌이 있습니다. 이 마을숲은 운봉을 비보하기 위해 동림(東林)과 함께 조성한 서림(西林)입니다. 현두(懸頭)숲 또는 선두숲이라고도 하는데 운봉 사람들이 이곳을 고을의 머리로 인식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북쪽 서천 다리의 이름도 현두교입니다. 당산거리 입구 두 장승(중요민속자료 제20호)은 방어(防禦)·진서(鎭西)대장군인데, 목이 부러진 장승이 남자라고 합니다. 선정비 2기와 불망비 2기 등 갖가지 기념비도 있어 운봉 사람들이 이 숲을 대하는 마음을 잘 드러납니다.
(출처 :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황산대첩비.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