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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가 신의주로 떠나지 못한 이유는

 

*

 


나는 니 고모랑 어찌 해 볼 생각이 있어서 그 사람을 신의주에 못 가게 말린 것이 아니었다.

명성관에서 한달쯤 지난 뒤에, 한달 전에 보았던 몰골하고는 백팔십도 달라진 해골이 따로 없는 몰골이 되어서, 남원역으로 가자고 했다. 신의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조선으로 안 온다는 것이다.

.. 그 말을 듣자 나는 안 된다고 그랬다. 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도 있고, 동생도 있고, 그리고 어디 있는지 모르는 언니도 찾고 여동생도 찾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랬다.

 

그 사람...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참 이 양반이.. 왜 내 인생을 자꾸 간섭하고 그러요" 한다. "나를 책임질라요, 처자식 있는 사람이 그럴 수 있소?" 그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

 

그날 이후, 고모는 단 한 번도 신의주에 가지 않았다. 붙드는 고숙은 책임진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두 분은 60년이 넘게 한 집에 살았다.

고숙은 처와 자식을 두고 집을 나왔고, 고모는 그렇게 평생 처녀 호적이면서 자식 하나 얻지 못했지만,

남원 땅의 최고의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다.

 

고숙은 그날 명성관에서 "나를 책임질라요"라는 고모의 말을 가슴에 새기셨는지.

 

한 맺힌 고모의 원망과 미움이 그대로 서려 있는 죽음이지만, 고모의 엄마의 주검을 자식 손에 편안하게 가실 수 있도록 유교적 절차와 형식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거두게 하였고,

다 죽어가는 고모의 언니 내외를 찾아서, 언니의 남편을 비명횡사하지 않도록 돌보면서 길바닥에서 죽지 않게 하였고. 그 언니는 마지막 생애를 고모와 한집에서 십여 년 살다가

결국은 나랑 한 방에서 주무시다가,  옆에서 잠자듯이 평온하게 가시게 하였고.

막내 여동생을 찾아 내서 운봉으로 시집 보내고, 아들 딸 다복하게 많이 나아서 잘 건사하게 하였다. 그 후손들이 아직도 지리산 자락 어디쯤에서 훈장님을 하고 계신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팔순이 넘으신 고모 내외가 우리 아버지 장례를 온갖 정성을 다해 치러 주셨다.

그렇게 가실 분들은 가신 분들대로 뒤치다꺼리를 다 해 주셨고.

고모의 열도 넘는 조카들의 대소사 행사에 참석하시어 위엄이 넘치는 그래서 더욱 자리가 빛나게 되는 어르신의 면모를 다 보여 주셨다.

 

고모의 생애에 고숙은, 결코 손해나는 오지랖이 아니었다.

고숙의 생애에 고모는, 결코 손해나는 여인이 아니었다.

 

두 분의 만남은 곧 연리지이다. 둘로 태어나 하나가 된 나무, 나무님.

 

고전소설 중에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이 있다.

남녀의 인연으로는 삼생의 인연이 있단다. 전생, 이생, 후생의 인연. 그 삼생이 다 이루어졌을 때. 두 사람의 사랑이 완성된단다. 그래서 이생은 귀신이 되어 나타난 아내를 현처처럼 돌보았고, 그녀가 명부로 떠나자 그녀를 따라 떠나면서 마지막 후생의 사랑을 완성하려 했단다.

 

고모와 고숙은 아마도 전생에 자식을 많이 두었나 보다. 나도 그 자식 중에 한 명일 것이고.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나는 우리 고모의 자식이다. 이렇게 거두고 거둔 자식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아마도 이생에서는 자식이 없었나 보다

 

고숙과의 금슬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을 만큼 고숙의 사랑은 엄청났으니 말이다.

 

태어나야 할 자식들이 엄마 아빠를 시샘하여 잉태되지 않았으리라.

 

고모 고숙이여, 후생에서는 둘 만의 아이를 꼭 낳으셔서 후생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랑 이루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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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고모는 내가 자기를 붙든 것이라고 한다. 그날 여원재를 다녀 온 이후, 지금까지 남원에 살게 된 것이 나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신의주를 못 가게 했고, 내가 처량해 보여서 고모가 남아 준 것이라고 한다.

 

거참, 누구 말이 맞는 것인지.

 

니 고모는 명성관에 머무르는 동안 아편도 하고, 술도 많이 마셨다.

나는 그게 못할 짓이라고 날마다 찾아갔다.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볼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알아볼 때는 울기만 했다.

울고 또 울고.

그렇게 한 달이 넘은 것 같다. 나는 날마다 그 사람을 찾아갔다.

그 사람이 나를 붙든 것도 아닌데, 내가 무슨 책임이라도 져야할 사람처럼, 그렇게 날마다 찾아가서, 술도 뺏고, 아편도 못 피게 하고 그랬다.

그러던 몇날 며칠이 지나고, 니 고모가 자기를 책임질 수 있냐고 했다.

멍 하더구나. 내가 그 사람을 책임질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구나...

 

고숙은 말을 멈추고 잠시 수돗가 펌프를 응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여원재에서 넘어와서 그 길로 신의주를 바로 갔더라면,

내가 무슨 오지랖으로 그 사람 삶에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더 좋은 남자 만나서 더 행복했을라나... 싶기도 하고.

 전처 부인을 죽인 여자라는 소리도 안 들었을 것이고, 전처 자식들 눈치 보면서 명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집안 대소사 지내면서, 첩이라는 속닥거리는 소리도 안 들었을 것이다.

 

   

   - 팔십 평생 호적에 처녀 인생, 우리 고모만 가엽구나 가엽구나

   - 눈 맞은 남자 하나 육십 평생 같이 해도 호적은 남남어허 어허라

 

...

 

우리 고모 왈.

 

나의 친할머니께서 다른 집으로 아들 하나 낳아 준다고. 재가하러 가야한다고당신이 낳은 딸 셋 중에 위로 두 딸을 모두 각각 남의 집에 식모로 팔아버리고 그렇게 인월로 들어갔더란다

인월에 가서 아들 하나 낳고는 남편이 죽어버리니 생고생 개고생 지옥고생 한다는 소식이 들렸더라.

열 두살에 남의 집에 식모로 팔려가서, 육년 살이 생고생 개고생 끝에 콧물 닦고 눈물 쏟아 모은 돈으로

새롭게 살아본다고아편쟁이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단다.

 

그 길로 신의주로 넘어갔다가, 삼년 만에 옷때깔 몸때깔 사람때깔 사방천지 알아보는 이 없을 정도로 요조숙녀 뺨치고 신여성 저리가라는 모양으로 남원 땅에 내려왔단다.

 

여원재 고개 넘어, 니 할매 만나서 욕한바가지 실컷 퍼붓고, 떡살가루 눈 가득 쌓인 곳에 열두 살 어린 한을 쏟아버리고 나올라 했단다. 그런데, 니 아버지, 어린 동생 보고, 그 못사는 살림살이 보니, 어찌도 사는게 원망스러운지 모르겠더란다. 그 길에 차안에서 확 죽어버릴까 그 일만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벌써 남원역이란다.

그길로 바로 신의주로 돌아갈까 망설이며 기차를 기다리다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자꾸만 뒷골이 당기더란다.

인월에서 이 할망구나 나를 못가게 하는 것이구나- 했단다. 있는 정 미운 정 모두 잘라버리고 돌아서려는데,

자꾸 뒷통수가 뜨겁더란다.

역사에서 나와 보니, 그 택시 자동차가 그대로 있더란다.

 "저 양반이... .. 요상한 일이네. 내가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저 양반이 있네..."

 

남원에 왔다가면 고모 인생술술 풀릴거라 여겼단다.

열두 살에 자신을 팔아버린 모질고 인정머리 없는 모정만 끊어내면 새 삶을 살 것이라 여겼단다.

그런데... 에고 에고... ..." 이 소리를 육십 평생 하며 살 줄이야, 그때 어찌 알았더냐.."

 

우리 고모, 한숨마다 섞어 가며 하신 말씀이다. "내가 그때 인월을 왜 갔다냐.“

 

(6회차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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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숙은 그곳에서 차를 돌리지 않았다. 밤새워 차안에서 고모를 기다렸다. 고모가 고모의 엄마와 그 엄마가 낳은 열두 살 어린 동생, 나의 아버지를 만나서, 서럽도록 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그 원망의 시간 내내, 고숙은 차안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나는 니 고모를 만나 사십 년이 되도록 니 고모 사람들, 죽은 사람들뒤치다꺼리 한 것만 해도 내 평생 할 도리를 다 한 거 같다.”

 

 

그날 밤, 여원재를 내려오면서 고모랑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 굽이굽이 눈길을 내려오는 동안, 내가 그곳에 남아있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왜 안 가셨어요, 라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냥 그 집에서 나와서는 내 차를 보더니만, 얼굴을 돌리고 다가와서는 "이제 그만 갑시다" 했다.

남원역에 도착해서 돈만 지불하고 돌아서는 니 고모. 또 말없이 기차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또 남원역 앞 택시 대기선에서 가만히 있었다.

 

인월에서 돌아오는 내내, 담배도 태우지 않고 울기만 하는 그 사람을 무슨 수로 말을 걸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방법도 몰랐다.

나는 그냥 무슨 일인지, 그냥 차안에서 또 기다렸다. 니 고모가 그냥 그대로 기차를 타고 가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인데도, 소방대도 가지 않고 기다렸다.

 

몇 시간이 흐른 뒤, 고모가 다시 나왔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여기, 잠도 자고, 머물면서 밥도 좀 먹을 데 없어요?" 한다.

 

나는 명성관으로 갔다.

지금으로 따지면 여관이기도 한데, 돈을 주면 주인집에서 밥도 해 준다.

명성관으로 가는 길에, 니 고모가 얘기를 한다.

 

"왜 기다렸소? 역에서도 날 기다렸소? 왜 그러셨소? 나는 오늘 신의주로 떠날 사람이었소." 

 

오히려 내가 말이 없어졌다. 니 고모가 말을 하니, 내가 말이 없어졌다.

 

"내가 며칠만 여기 머물다 가도 되겠소?"

 

나는 바로 "그러시오"했다.

 

그렇게 나는 니 고모랑 얘기를 섞게 되었다.

 

(5회차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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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재 고개를 넘었다.

그 길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던 그 길은, 사력을 다해야만 넘을 수 있는 길이었다.


 고숙은 사활을 걸고 차를 몰았다. 그런데 그런 고숙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모는 연신 담배를 태우며 한쪽 창문 밖만 응시했다.


 달빛이 없어도 별빛이 없어도. 어둠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눈빛을 따라 여원재 고개 굽이굽이 유려한 능선을 바라보는 고모는 하염없이 담배연기만을
뿜어냈다.
담배를 피운 적이 없던 고숙은 그날 담배를 태워보고 싶다고 여겼다.
그래야 저 여인과 얘기를 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
고모는 지금도 말이 없는데 그때는 더 말이 없었나 보다.


 굽이굽이 도는 고개마다 창문 옆으로 보이는 나무 가지가지 눈을 한보따리씩 이고 있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와르르 쏟아질것같은 눈사태를 일으킬 것 같은 나무들이 눈을 이고 있었다.
바퀴는 윙윙 크르륵 소리를 지르며 힘겨워 했는데 고숙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젊은 여자가 전혀 겁을 내지 않고 한마디 말없이 담배만 태우는 모습에 고숙도  겁을 상실했다 한다 저 여인은 과연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런 생각만 들고. 겁없이 차를 몰았다 한다.

남원역에서부터 두시간 가까이 지나고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여원재 고개를 넘고 두 사람은 운봉 입구에 도착했다.

고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원역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 기사 양반, 갈 수 있지요?


 하고는 차안에서 한마디도 없던 고모가  운봉 입구에 들어서자


 - 기사 양반,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했다 고숙은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고, 애써서 왔는데 고생했다는 한마디도 못들었는데도, 그 이유를 따지기는 커녕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는, 오히려 엉뚱하게도.


 - 인월 가셔야죠? 그냥 가십시다.


  했단다.


- 아니, 그냥 남원으로 돌아갑시다.


- 아니, 이 아가씨가 여기까지 죽을 둥 살 둥 왔으면 목적지까지 가야지. 이런 법은 아니죠. 인월 갑시다. 죽을 고비 다 넘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자니 말이 됩니까?


 고숙 무슨 용기가 났는지.
 오히려 손님보다 기사가 더 적극적으로 손님이 가야할 곳을 앞장서서 가고자 한 셈이다.
 고모 가만히 고숙 하는 양을 보더니,


 - 왜 가야 하죠? 이 밤길에 눈길에, 고갯길을 넘나들며 왜 가야합니까? 내가 미친년이죠.


 -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거 같은데 가십시다. 그리고 미치시지 않으신거 같습니다.


 - 꼭 하고 싶은 일요...


 - ,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은게 여기 오셨죠.


 - 그래요... 


  고모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거 같네요. 그래요. 그럽시다. 가십시다...

그렇게 자동차는 또 눈빛을 가로등 삼아 밤길을 달려 인월에 도착했다.

그렇게 고숙은 고모 인생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끼어들었고 고모는 불쑥 나타나서 고숙 인생을 뒤바꿔 놓아버렸다.

그날 한밤중에 인월에 도착한 고모는  또 한마디 말이 없었다.
매고 왔던 가방에서 큰 지갑을 꺼냈고. 돈을 주고 받던 두사람은  그곳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서로 갈길로 돌아섰다.

그런데...
고숙은 그곳에서 차를 돌리지 않았다.
밤새워 차안에서 고모를 기다렸다.

고모가 고모의 엄마와 그 엄마가 낳은 열두살 어린 동생, 나의 아버지를 만나서, 서럽도록 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그 원망의 시간 내내, 고숙은 차안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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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고모와 고숙의 만남, 사랑, 생애

 

2. 여원재 고개를 넘다

 

 

 

- 눈이 펑펑 쏟아졌다.


저 위에서 줄 것이라곤 이 눈밖에 없다 하는 모냥. 하늘에서 진종일 눈이 쏟아졌다.
불려놓은 쌀 알갱이가 기계에 들어가 처음에 빻아져서 나오는 모냥처럼.
눈가루가 넙적 넙적하게 착 퍼져 떨어지는 게. 그걸 맞고 있으면 꼭 밀가루 한 포대 뒤집어 쓴 모냥. 잘 떨어지지도 않는 눈이었다.

내가 고숙을 만난 지 5년째다. 1972년 남원 고모네 집에 여덜 살에 와서는, 5년 동안 고숙을 보았다. 그렇게 5년을 보는 동안, 여기까지만 해도, 그 동안 들었던 말보다 지금 이 때가 더 많은 말을 들은 것 같다


 펌프물이 한번 콸콸 쏟아지면 시원하게 솩솩 물이 올라 온다.

고숙의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되려나 보다. 나는 이렇게 얘기를 잘 하시는 고숙을 보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고모를 만나기 전에는 유교 관련 책만 읽고 공부만 하셨다는데. 고모 말이 맞나 - 살짝 의심을 하면서도. 5년 동안 허튼 말 한마디 하신 적 없었으니 믿어야겠지!
아무튼 고숙은 고모를 엄청 좋아하시는 게 분명하다. 40년도 넘은 것 같은 얘기를 지난해 겨울인 것처럼 저렇게 생생하게 말씀하시니 말이다.

- 그 눈 오는 밤에 남원역 대합실에서 나오는 고모를 보았다. 나는 그때 자가용이 있었다. 낮에는 소방대 일을 잠깐씩 도와주고 밤에는 급하게 연락 오는 사람들을 태워다 줬다. 그날은 역무원이 전화를 해서 와달라고 했다. 인월을 갈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밤에, 눈길에, 여원재 고개를 넘어 인월을 간다는 것이다. 그 밤에 그 눈길에 여원재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간다는 말이나 같다.
나는 못 간다, 미친 짓이다했다.

그런데 역무원 말이. 아주 젊은 여자가 양장을 입고 와서 꼭 가야한다고(그 당시 양장을 입은 젊은 여자는 아주 눈에 띄기 마련이니). 자기는 거길 다녀와야 안 죽는다고. 그래야 여한이 없다고. 꼭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다녀와야 한다고 했단다.
여자 하나 목숨 살려 준다 셈 치고. 데려다 주라고 했단다. 데려다 주는 사람 목숨 값도 쳐준다고 했단다.

고숙. 듣기에 사연이 하도 희한하여. 그래 가서 한번 보기나 하자. 하고 나오셨단다.
그래서 그렇게 고모와 고숙이 만나게 되었단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 밤에, 남원역 앞에서 자가용을 가지고 나온, 아주 깡마르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이 남자를 고모는 만난 것이다.
운명의 지침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줄 한 남자를 만났다, 우리 고모는.

- 참 위험한 짓이었다. 내가 그곳에 왜 갔을까...


- 젊은 여자가 궁금하셨죠?


- 나는 그 답을 아직도 모르겠다...


- 운명 같은 건거죠?


- 이 남원 바닥에 양장 입은 여자가 흔치 않았다. 아주 젊은 여자라고 해서 일본 여자인갑다 생각도 했다. 일본여자가 여원재를 밤에 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만나봐야겠다- 한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이고.


- 여원재는 저도 너무 힘들어요. 작년 겨울방학 때도 아버지랑 타고 가면서 죽을 뻔 했어요. 특히 남원에서 올라갈 때가 더 힘들어요.


고개 하나씩 돌때마다, 아 옆으로 쏠릴 것 같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것 같고. 귀도 아프고. 아 고개만 넘고 나면 토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고개 아흔아홉 고개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침 꿀꺽 꿀꺽 삼켜가며 세 보았는데,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맨날 아흔 아홉 고개 그러던데.


- 지금은 도로를 넓히면서 많이 줄었지만. 고모랑 올라갈 당시만 해도... 저승길이 이 길인가 싶었다. 끔찍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날... 그때에 니 고모가 제일 예뻤다..

, 우리 고숙 최고,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
줄리엣을 사랑했던 로미오가 이보다 더 용감했을까.
우리 고숙의 저 대책 없는 용기가 없었다면 무모한 사랑의 시작도 없었겠지.

 

 (3회차에 이어집니다)

 

*지명 사전 찾기*

 

여원재

백두대간 구계에 있는 이곳 전북 남원시 이백면 여원재(477m)는 연재 또는 연치라 하고 고개 북쪽에는 그 이름을 딴 마을도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역원에는 고개 아래에 여원(女院)이 있다 했으니 연재 마을 즈음이 아닐까 여겨집니다만, 5000분의1 지형도에는 연재 마을 북쪽의 장교리에 '원터골'이라 적어 두었습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곧장 우리나라 대표 고원(高原)인 운봉읍입니다. 운봉은 고개인 여원재와 바닥을 이루는 들판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서림 북쪽의 선두들이 고도가 460m 안팎이고, 운봉 남쪽의 동천리 신덕들은 고개보다 더 높은 480m 안팎일 정돕니다. 이래서 운봉은 모를 일찍 내어 인접한 남원이나 함양보다 20일이나 빨리 7월 중순이면 벼이삭이 팬다고 합니다.

운봉읍

운봉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이라고도 함)으로 아영성(阿英城) 또는 아막성(阿莫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운봉현(雲峰縣)으로 고쳐 경상도 천령군(지금 함양)에 속하게 했다가 고려 때 남원부에 편입됐습니다. 운봉으로 드는 길가에 많은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데, 장교리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고, 들머리인 서천(西川)에는 독을 굽던 가마터도 있습니다.

지금 운봉읍 소재지인 서천리가 옛 운봉현의 치소인데,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지에 있기에 따로 읍성은 쌓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왜구에게 시달림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서 살피겠습니다. 관아와 객사 및 그 앞에 둔 협선루(挾仙樓)는 지금의 운봉초등학교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서쪽으로 당산거리라고 냇가에 잘 조성된 숲이 눈에 듭니다. 당산(堂山)과 돌장승 2기를 비롯하여 여러 빗돌이 있습니다. 이 마을숲은 운봉을 비보하기 위해 동림(東林)과 함께 조성한 서림(西林)입니다. 현두(懸頭)숲 또는 선두숲이라고도 하는데 운봉 사람들이 이곳을 고을의 머리로 인식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북쪽 서천 다리의 이름도 현두교입니다. 당산거리 입구 두 장승(중요민속자료 제20)은 방어(防禦진서(鎭西)대장군인데, 목이 부러진 장승이 남자라고 합니다. 선정비 2기와 불망비 2기 등 갖가지 기념비도 있어 운봉 사람들이 이 숲을 대하는 마음을 잘 드러납니다.

 

(출처 :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황산대첩비.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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