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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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Blacktop Wasteland'이고 Wasteland야 당연히 황무지, 불모지라는 뜻인데, Blacktop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서 찾아보니까 '아스팔트'를 뜻하는 말이었다. 도로 포장할 때 쓰는 아스팔트가 검정색이라서 현지에서 관용적으로 쓰는 것 같다. 좀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배합된 재료들의 비율과 가열 온도의 차이에 따라 블랙탑과 아스팔트를 엄밀하게 구분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어쨌든 황무지의 비포장도로와 아스팔트를 넘나드는 자동차 액션과 미국의 낙후된 지역에서 여전히 차별받는 흑인들의 삶이 주요 소재로 활용되고 있어서 아마도 작가가 중의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로 선택한 제목이 아닐까싶다.



작가 S.A.코스비는 미국 버지니아주 출신이고 영미권에서 좀처럼 보기힘든 흑인 작가다. 그런데 구글 검색을 아무리 해봐도 작가의 나이는 나오지 않는다. 트위터에서 쓰는 아이디를 겨우 힌트삼아서 아마 73년생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현재 50대로 접어드는 나이다. 



이 작품은 그의 두번째 장편소설이고 재작년인 2020년에 발표되었다. 범죄 스릴러와 관련한 수많은 수상 이력이 눈길을 끄는데 처음 책을 펼치면 무려 8페이지에 걸쳐서 각종 언론들과 다른 유명 작가들의 찬사와 추천사가 도배되어 있다.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있나 싶을 정도여서 살짝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아뭏든 이 작품과 또 작년 21년에 연이어 발표한 최신작 'Razorblade Tears'가 모두 영화 판권이 팔렸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도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본작 '검은 황무지'는 흑인 작가의 작품답게 주인공 및 주요인물들이 모두 흑인이다. 그리고 작품배경이 되는 지역이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버지니아주인데, 이 부분을 좀 주목할 필요는 있다. 버지니아는 미국에서 남부로 분류되는 지역이며 전통적으로 극우성향이 강하다. 책에서도 남부연합을 상징하는 '딕시 플래그'가 수차례 등장할 정도로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다. 주인공과 갈등을 빚는 빌런들 거의 대부분이 백인으로 설정된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려 2010년대초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임에도 등장인물들의 대사 곳곳에서 미국에는 여전히 인종차별 문화가 뿌리깊게 배어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이 작품은 전형적인 하이스트 케이퍼 장르에 미국의 올드카 매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자동차 액션도 끼워넣고 그것을 하드보일드 느와르 스타일로 풀어가는 그야말로 극한의 재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에 훨씬 더 치중하고 있기때문에 사실 흑백갈등과 같은 요소는 스토리를 좀더 풍성하게 만드는 디테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이러한 지역정서를 미리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훨씬 재미있게 다가오는 요소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작가의 필력은 예상외로 좋은 편이다. 스토리 자체가 이미 각종 영화들에서 수없이 다루어온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너무나 익숙한 플롯으로 손쉽게 예측가능한 방향으로 진행이 되기때문에 신선함이나 독창성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지만 그 익숙한 스토리를 재미있고 흥미롭게 풀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작가는 기발한 반전이나 충격적인 시퀀스 같은 잔재주를 쓰지않고 우직하게 정공법으로 흔한 이야기를 흡인력있게 끌고가는 능력을 보여준다.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주는 자잘한 에피소드의 흐름도 좋고 지역정서가 녹아있는 대사들도 적당한 유머와 함께 잘 짜여져 있다.


다만 마지막 클라이막스 액션시퀀스는 너무 헐리우드 스타일의 식상한 클리셰로 좀 안일하게 처리한 듯해서 살짝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중간중간 절묘한 타이밍에 마치 갱스터랩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올 것만 같은 전형적인 웰메이드 액션영화 한편을 기분좋게 감상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안들었던 점이라면 역시나 '번역'이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기본적으로 어릴때부터 인종차별이 심한 우범지역에서 자라면서 각종 폭력과 마약, 살인 등에 끊임없이 물들어온 밑바닥 인생들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도입부 드레그 레이싱 장면부터 이미 번역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초반부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라 대사를 그 성격에 걸맞는 톤으로 번역해야하는데 전혀 고려하지를 않았다.



이 부분은 낯선 남자가 자신의 차를 보고 칭찬 한마디 툭 던지는 장면인데 주인공이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건장한 피지컬의 캐릭터와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톤이라 좀 황당하다. 그냥 '고맙소'라고 하는게 맞을거다.



그리고 연이어 가짜 경찰들과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친구 아닙니다', '돈은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번역하면서 주인공의 성격을 정말 나약하고 고분고분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도 그냥 '친구 아니오', '돈은 못 주지' 정도로 하는게 훨씬 어울린다.



'당신이 레이지입니까?' 이것도 '당신이 레이지요?' 해야 캐릭터가 살아난다.


다른 인물들의 대사톤도 역시 황당한 번역들이 많다.



이런 것도 그냥 '내가 왜 그런 걸 갖고있다고 생각해? 왜? 흑인이라서?'라고 당연히 거친 반말로 툭툭 내뱉는 톤으로 처리해야하는 장면이다. 그래야 그 다음에 나오는 약간 미안하게 생각하는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흑인 갱스터 무비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거친 캐릭터들이 즐비한데,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려하지않은 대사톤들은 정말 읽다가 확 깨게 만든다.


대사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서술 문장들도 조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여기 '에어컨이 공기를 컨디셔닝하지 못했다'라고 순진하게 직역해버렸는데, 에어컨은 영어로 '에어 컨디셔너'다. 그래서 원문은 아마도 '컨디셔너가 컨디셔닝을 하지 못했다'라는 식의 결국 그 이름값을 하지못했다는 의미로 작가가 말장난 조크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차피 디테일한 조크까지 살리지 못할거면 그냥 '공기를 차갑게하는 기능은 하지못했다'라고 하면 된다. 컨디셔닝하지 못했다는 말은 도대체 뭔가?



또 여기 '앞범퍼가 원래 범퍼가 있던 자리를 키스하듯 스쳤다'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몇번을 다시 읽어도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가 않는다.


액션씬들은 글을 통해 상황이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져야 현장감이 살아나는 것이고, 이 작가는 그런 점을 상당히 디테일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도 번역이 제대로 살리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세 명의 남자가 밴이 아니라 SUV에서 나왔다고 해야한다. 후반부 중요한 액션씬인데 밴과 SUV 두대 중에 SUV에서 나와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명백한 번역오류에 해당한다. 이거 읽다가 인물들의 행동에 앞뒤가 안맞아서 몇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전에도 몇번 언급했지만 실력없는 번역가들이 쓸데없는 주석을 많이 단다.



여기 '존 휴스', '몰리 링월드'는 앞뒤 문맥 흐름상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도 각각 영화감독과 배우일 것이라는 점을 쉽게 유추할 수가 있다. 굳이 주석이 필요없고 '하이스트 무비'같은 대중적인 단어도 당연히 필요없다.



이렇게 '토크컨버터'처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유추되는 단어는 주석이 필요없는 것이다.



정작 주석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런 부분들이다. '산모기 득실대는 촌구석엔 안간다. 리치몬드로 와라. 거기는 모기가 트럭을 몬다며?' 이런 말에 '걱정마. 딕시플래그만 달고오면 별일 없을거다'라고 대꾸하고 있다. 느낌상 인종차별이 가미된 지역정서를 풍자한 조크가 들어있는 장면이다. 미국 현지인이라면 분명히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듣고 재미있어할 대사들인 것이다. 바로 이런 부분에 주석을 달아서 유머코드를 이해하도록 해줘야 한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단어들에 쓸데없이 주석달아서 생색내는 번역가치고 실력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못 봤다. 이 네버모어라는 출판사는 전에 리뷰했던 '고리키 파크'와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이라는 책을 펴낸 곳이기도 한데, 공교롭게도 그 두 작품도 번역이 좋지 않았다고 얘기한 바 있다.


요즘 사람들이 워낙 책을 안 사 읽으니 출판사들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또 그러다보니 비용절감을 위해 어쩔수없이 실력 좋은 번역가를 못쓰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게 결국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피해로 돌아온다. 좋은 작품을 좋은 번역으로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책은 번역이 작품의 완성도를 적어도 20% 이상 깎아먹고 있다. 다행히 스토리가 워낙 단순하고 직선적인데다가 작가가 문장에 그다지 고급 스킬을 구사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나마 작품의 재미가 크게 반감되는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할 수는 있겠다. 


참고로 작품에서 주인공이 애지중지하는 애마로 등장하는 차량인 '더스터'는 크라이슬러 산하의 브랜드였던 플리머스가 70년대초에 내놓았던 모델이다. 물론 책에서는 이에 대한 주석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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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man 2022-01-31 0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가 문제 정말 공감합니다.
번역가 때문에 읽기를 미리 포기한 시리즈도 있는 지라...

실버북 2022-01-31 12:1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아무리 읽고싶은 작품이라도 이제는 특정 번역가의 이름이 보이면 미련없이 패스해버립니다. ㅎㅎ

blackrain 2023-10-01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괄호 안에 굳이 마침표를 다 찍는 편집도 많이 거슬리더군요. 괄호가 문장에서 하는 역할이 있는데 그걸 전혀 인식을 못 하는 건지...
말씀하신 부분도 공감하는 게, 약간 오역이라도 드라마 속 인물의 대사처럼 자연스럽게 다듬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군데군데 참 어색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는 재밌어서, 아쉬움이 더 큰 듯.

실버북 2023-10-01 18:08   좋아요 0 | URL
네버모어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대부분 번역이 좋지 않았습니다. 좋은 번역가를 쓸 만한 여건이 안되는 것 같아요. 얼마전에 이 작가의 후속작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도 정말 고민 많이 하다가 구매했습니다. 엉터리 번역가거든요. 그래도 작가가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쓰는 것 같아서 번역 무시하고 그냥 제가 알아서 적당히 감 잡아서 읽으려고요. 어떤 스토리인지 궁금해서...^^;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