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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이 번지는 파리 지성여행 ㅣ In the Blue 8
김현정 지음 / 쉼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프랑스를 여행하기 전 <개선문>을 읽는 게 잘 읽힐까? <개선문>을 읽고 프랑스를 여행하는 게 더 많이 느끼고 올 수 있을까? 프랑스를 다녀온 뒤 <개선문>을 읽으면 더욱 잘 읽히리라 추정할 수 있고, <개선문>을 읽은 뒤 프랑스를 여행하는 게 더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력히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투입대비 효과, 가격대 성능비라는 일명 가성비를 고려해 생각해본다.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가 프랑스까지 10시간을 넘는 비행시간에 100만 원이 넘는 비행기 값을 그리 쉽게 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에 비해 책값은 출판연감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평균 12,000원 꼴이다. 개선문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읽다가 조는 시간 포함해도 10시간이면 된다.
10대에는 서울대에 가기 위한 “교과서” 위주의 공부로 독서할 틈이 없다. 대학에 간 뒤에는 뒤처진 학벌을 메꾸기 위해 영어 공부와 각종 자격증을 공부해야 하며, 틈이 나는 순간순간 가난한 부모와 4대강을 파헤쳐 놓는 정치인들 때문에 학비를 벌어야 한다. 졸업을 하면 백수라서 틈이 생기지 않고, 직장에 다닌다 해도 비정규직인지라, 야근을 하느라, 연애를 하느라, 대출금을 갚느라, 무한도전을 보느라 이래저래 또 틈은 생기지 않는다. 여유를 가지고 독서할 틈도 없는데 여행은 언제 갈까?
여행도 독서도 결국은 삶의 틈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책은 매체의 한 종류니까 여행이란 틈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독서라는 틈을 읽었다. <설렘이 번지는 파리지성여행>은 손발이 오글거리는 제목이지만, 지인의 소개로 읽게 되었다.
목차와는 별개로 내 머릿속에는 3파트로 나뉘어서 읽혔다.
1. 파리 감상 2. 파리 역사 3. 파리 미술관
첫 번째 파리 감상은 이병률의 <끌림>보다는 훨씬 읽을 만했다. 잠깐씩 훑어봤던 여행책들에서 사진 하나에 별로 공감 안 되는 알쏭달쏭한 말만 있는 여행책들보다 김현정의 감상은 훨씬 설득력 있게 읽힌다.
두 번째 파리 역사 부분은 무척 좋았다. 이 책을 읽고 파리를 갔으면 더 재밌었겠네 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었다. 파리 방문 당시에도 지금처럼 바보였던지라, 파리는 내 기억에 거의 남아있는 게 없었기에, 이 책을 읽을수록 더더욱 안타까움만 남는다. 특히 드레퓌스 사건은 우리 시대의 논술 필독서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비교되면서 읽혔는데, 유시민의 전달력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글이다.
세 번째 파리 미술관은 탁월했다. 이해도 못하며 겨우겨우 읽었던 <진중권의 미학오딧세이>와 시간 남아서 읽고는 시간 아까워 죽을 뻔했던 <다 빈치 코드> 정도의 독서 내공을 가지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한 초식만 건져온 나와 작가 김현정의 내공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일합이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이런 뜻이 있었구나라는 지적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가 작가에 대한 질투심을 넘어선다. 또한 작품 하나하나의 해설에만 그치지 않고 작가와 그 작가가 살던 시대에 대한 설명은 나 같은 예술 분야 찌질이에게도 큰 깨우침을 주었다.
작품 해설 부분에서 도판이 너무 작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미술책이 아니고, 도판 값도 비쌀 테고, 파리 여행자를 위한 책이기에 이해하고 넘어간다.
유시민과 진중권으로 논술 준비하던 시대는 이제 김현정의 출현으로 새롭게 재편되리라 강력히 추정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