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 살고 싶은 열망은 언제나 가득했다.

새로운 세계를 또다시 열어보라는 기회를 맞닥뜨린 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믿었다. 난생처음 가본 스위스 제네바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게 된 서른하나의 삶을. 한국에서 14시간을 날아 도착한 낯선 곳, 이전의 별거 없던 삶이 그리워 쉽사리 돌아갈 수는 없는 거리였다. 어쩔 수 없이 친 배수진은 운명론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불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그들의 대화를 오직 눈빛과 손짓으로만 짐작해야 했다. 말이 지워진 자리에서 관찰은 깊어졌고 감각은 더욱 섬세해졌다. 그 누구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그렇기에 온전히 통제 가능한 변수들의 조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실험해보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낯선 곳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곳에 머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험에서 예상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무수한 시행착오가 존재했다. 언제까지나 관찰자의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태평하게 관조할 수만은 없었다. 이미 형성된 그들만의 견고한 울타리를 넘어가 자연스레 어울리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것들을 바꾸고 이해해야만 했다.

어쩌면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건, 세상과 조금의 거리를 두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릴 때 잠시 멈춰 서서, 정말 그 길이 나의 길인가 되묻는 태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오래도록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일. 제네바는 그 연습을 하기에 적절한 도시였다.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 나만의 호흡으로 살아보는 것, 그 느린 걸음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 나만의 유행을 타지 않는 삶은 그렇게, 외면이 아니라 내면의 조용한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다시 나답게 살아가는 감각이었다.

제네바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어느덧 한 달이 조금 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여행자의 기분이 아닌 이곳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한 주민으로서 느끼게 된 것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나는 아무런 ‘라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 어느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어느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했고 또 어떤 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모아둔 돈은 얼마인지, 아니, 가장 간단한 숫자 비교인 몇 살인지조차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굳이 먼저 드러낼 필요도 없다. 드러내서 얻을 것도 없다.(심지어 드러낼 때와 장소도 없다.) 그렇게 살아가도 큰 문제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편하고 내게 이런 상황이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했다. 의식주만 해결되면 살아갈 수 있는, 그저 본능에만 충실하면 되는 자연인의 삶이었으니까. 내 일상의 패턴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의외의 장면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나 역시 답답했다. 그들이 프랑스어의 질문에서 재빠르게 영어로 바꿔 나를 배려해주었을 때는 "저는 아직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해요. 그러나 조금씩 배우고 있으니까 조만간 당신이랑 프랑스어로 대화를 할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줘요"라며 너스레를 떠는 농담도 건네고 싶었다.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물었을 때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당신은 어디에서 왔나요? 제네바시에는 40퍼센트가 넘는 인구가 외국인이라는데 정말 놀랍더라고요"라고 내가 아는 상식을 곁들이며 긴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괜찮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들은 라벨 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곳에서 조금은 행복을 누리며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다 또 불현듯 불안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된다. 당분간은 이 홀가분함을 즐기기로.

그렇게 다름은 틀림이 되고, 모난 것은 정 맞는 것이 된다. 우리가 자주 말하듯 "튀면 피곤하다"는 분위기. 그 속에서 나 역시도 혹시 모를 시선을 의식하며, 언제나 방어기제 속에서 구구절절 설명부터 늘어놓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글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충분히 변명했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자유롭게 풀어보고 싶다.

단순히 ‘국적은 어디야?’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냈다.

어떤 이들은 세 개의 국적을 가졌다고도 했다. 부모의 국적이 다르고, 자신이 자란 곳과 현재 머무는 곳이 또 다르다며 길고도 유려하게 자기의 삶을 펼쳐 보였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고, 곧이어 느낀 건 조용한 울림이었다. 그 긴 소개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국적과 정체성은 더 이상 단일한 질문이나 답변으로 정리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을, "너는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에는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과 ‘사연’이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말이 많으면 피곤하다는 인식이 있다. 짧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미덕이 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길게 하면 괜히 복잡한 사람처럼 보일까 염려하게 된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에서 하나의 언어를 쓰고,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고, 서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나라에서 자랐다. 단일 민족, 단일 언어, 그리고 반도라는 지리적 특수성 속에서 다름보다는 같음이 강조되어왔기에 어릴 때부터 다른 세계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부딪혀볼 기회가 적었고, 낯선 것에 대한 적응력도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면 우리는 먼저 이해하려 하기보다, 은근히 틀을 들이민다.

하지만 제네바나 파리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왔다. 그들은 질문을 하나 받아도 그 안에 자신의 사연을 담아 풀어낸다. 길어질 수도 있다는 여유, 다양한 길이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서 말하고 듣는다. 그 태도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조금 더 다정하게 이해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조금 어렵다는 걸 느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남을 따라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조금만 방향이 달라도 불안해지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을 요구받는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비정상. 말이 길어지면 또 유난스럽다는 평가. 어떻게 입을 뗄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반면, 내가 경험한 유럽, 특히 스위스와 프랑스 문화는 다르다. 일단 시작부터가 다르다.

유럽이 완전히 이상적인 사회라는 건 아니다. 그곳에도 여전히 계급과 인종 문제,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다양할 수 있다’는 감각이 사회 전반에 훨씬 더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다름을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문화. 그리고 말이 길어질 수 있다는 여유. 그리고 나는 이제야 조금씩 나를 다시 쓰는 중이다. 여전히 서울에서 자랐고, 여전히 한국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낯선 나라에서 스스로를 다시 소개하게 된 누군가이기도 하다. 이방인의 언어로 천천히 내 이름을 말하고, 내 배경을 조금씩 펼쳐내는 사람. 그러니, 나를 설명하는 데 한 문장은 이제 조금 부족하다. 그 부족함은 어쩌면 나의 여백이고, 내가 앞으로 살아갈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증명과 설득에는 과거와 미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애쓰려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두 달 차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나만의 실험 방식을 결정했다. 귀납적 방법. 순간순간을 먼저 다 살아보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난제가 찾아왔다.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상의 만족이, 어쩌면 나의 존재 자체를 누구도 확인해주지 않는 날들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예전처럼 나의 쓸모를 과하게 드러내며 나를 소진하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나라는 사람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마저 지워둘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칫하면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삶에 익숙해진다면 말이다.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는 달콤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이곳에 단단히 붙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불안도 함께 찾아왔다.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 대신,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싶었다. 그 첫 단계는 거창한 성취나 외부의 인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는 목소리, 내가 움직인 만큼 조금은 달라지는 집안의 풍경, 하루하루의 식탁 위에 놓이는 작은 성취들. 그곳에서 나는 다시 나를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내가 서 있는 자리, 즉 나의 존재가 머무는 공간이자 증명이 되어야 하는 자리는 집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결국 중요한 건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 그리고 가정 안에서 내가 어떤 역할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둘 것인지 정립해나가는 일이었다.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이라면, 그 선택이 닿아 있는 일상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마주한 과제는, 집안일이라는 구체적인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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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동안 이 책을 함께 만든 피해자들에게.
당신들의 경험이, 당신들의 용기가, 당신들의 삶이 다른 피해자들에게 어떤 힘이 되는지 지켜봐주십시오. 그 힘이 어떻게 시스템과 사회를 바꾸는지 확인해주십시오. 당신들의 시간이 ‘공백’이 아니었음을, 당신들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당신들의 연대자가, 그림자가 될 수 있도록 곁과 뒤를 내주어 감사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만나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일단 살아만 있어요. 제가 당신의 그림자가 될 수 있게, 당신을 위해 길을 찾고 다듬어 당신의 손을 잡아 함께 걸을 수 있게, 당신의 말·시간·자리를 지킬 수 있게, 그 기회를 주십시오.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일단 살아남는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넓고 안전한 길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발 살아요. 우리 길에서, 광장에서 만납시다. 언제나 당신의 곁과 뒤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과 나는,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하면 피해를 인정받고 내 삶을 찾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싸워야 했다.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끝은 있는 걸까. 싸움에서 이겼는데 왜 난 여전히 말과 시간, 그리고 자리를 찾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아득바득 ‘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이 되어 이 싸움을 하는 걸까. 이 싸움이 가치가 있나.
차라리 죽여버릴 걸.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국가기관은, 시스템은 피해자 보호에 관심이 없다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가해자에게 보복 살인을 당한다면 이 경찰은 뭐라고 할까. 아마 원칙대로 처리했으며, 실질적인 위협이 없을 경우 본인들은 개입할 수 없다고 하겠지. 그리고 내 사건은 가해자에 의해 각색되어 세상에 알려질 거다. 죽은 피해자는 말할 수 없으니까.

사건을 겪고 해결하는 동안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가족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아니라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었다. 일을 그만두고도 한동안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가 퇴근 시간에 돌아왔다.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소송 서류를 작성하다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기를 반복했다. 세상은 온통 버석거리는 모래로 만든 성 같았다. 색도, 향도, 맛도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감정은 말라갔고, 머리도 굳어졌다.

귀가 후 인사를 한다. 나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가족들이 알면 안 된다. 밥은 먹고 다니냐며 잔소리하는 가족의 말을 뒤로 하고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내 방문을 열면 거기에는 안온하면서도 끔찍한 늪이 기다리고 있다. 그 늪에 나를 가둔다. 울지도 않는다. 어느새 우는 방법도 잊은 것이다. 이렇게 늘어져 있다가 사라지고 싶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려다보며 문득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내가 왜 이래야 하나. 내가 많이 무너져 있구나. 치료가 필요하다. 이러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몰리겠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폭력 피해 이후 말과 글이 무너졌다. 완성된 문장으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단어 위주로 내뱉거나, 핵심을 말하지 못하고 장황하게 늘어놓기 일쑤였다. 감정은 메말라 내가 어떤 기분인지 전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 생각과 감정을 드러낼 곳이 필요했다.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안전한 익명의 공간. 짧은 글을 연습할 수 있는 곳. 그렇게 찾아다니는 내게 누군가가 ‘트위터’를 소개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조차 해보지 않은 내게 SNS는 낯설고 버거웠다. 닉네임을 정하는 것도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결정한 게 바로 ‘마녀’였다. 가해자가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나를 조롱하며 붙였던 이름. 그래, 그렇다면 진짜 ‘마녀’가 되자. 피해자가 아니라 심판자로서, 사냥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사냥을 시작하자.

다이어리를 꼼꼼하게 작성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수기로 작성하는 것이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신체의 말단 부위를 자극하고 움직이는 것은 늘어져 있던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 사건 이후 지능이 떨어져 예전엔 듣고 바로 기억하던 것들도 메모를 해야 겨우 알아보는 수준이 되었던 터라, 직접 써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난 과거의 나와 매우 달라져 있었다. 사건이 있기 전에 하던 일을 이어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일을 할 역량도 되지 않았다. 일정 부분에서 사건 이전으로 회복되지 않는 손상이 발생했고, 문제를 해결하며 입은 상처 중에는 영구히 그 흔적이 남는 것도 있었다. 과거의 나는 과거에 두고 와야 했다. 그걸 인정해야 했는데, 내 시선은 자꾸 과거를 향하려 했다.

난 가해자를 용서할 생각이 없다. 사법 시스템을 선택한 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관용의 최대치다. 나는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며 시스템을 바꾸는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마녀’로서 내가 가해자를 사냥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냥을 멈출 생각이 없다. 사람들과 건배사로 하는 말이 있다. "돌아온 마녀가 세상을 태운다!" 그렇게 정화된 땅에서 피해자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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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꼭 상대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하는 질문은 목표를 분명하게 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새로운 시각을 열어줍니다.
평소 무심코 하는 행동이라도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는 순간, 생각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 질문 하나가 새로운 행동과 목적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잘 듣는 사람’의 핵심은,‘대화의 주인공은 상대’라는 인식입니다. 이를 위해서상대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에 맞는 공간과 분위기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면 마음이 열리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 반응과 질문도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위기에서는, 편안하고 진솔한 대화가 오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든, 늘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원래 다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기억하세요.
대화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상대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제대로 듣는 태도, 그 자체가 존중의 표현입니다.

대화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대화에 익숙하지 않다면, 어색한 침묵이 생기기 쉽습니다. 특히 과묵한 사람 중에는 말하는 것은 서툴지만,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과 SNS가 중심이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편리해질수록, 일상에서 나누는 따뜻하고 소박한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정말 마지막이 될 가능성도, 결코 0%는 아닙니다.
그 소중한 순간에 여러분이 온전히‘잘 듣는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큰 위로와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여러분의 삶에도 크고 따뜻한 변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잘 듣는 사람’은 누구나 바라는 존재이지만,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된다면,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행복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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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에코 프렌들리 수어사이드 - 김미도 시집
김미도 지음 / 빛그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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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 그 자체…
감히 무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내겐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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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나를 바라보고,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말할 때 우리의 뇌에서는 행복감을 주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분비됩니다.누군가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때, 뇌는 그것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처럼 긍정적인 자극으로 받아들여 도파민을 분비해서 기분을 좋게 합니다.
상대에게 호감을 얻고 싶다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줘 기분 좋게 해주면 됩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매끄러운 의사소통에 꼭 유창한 말솜씨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듣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쉽고 단순하게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담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복잡한 기술을 배우고 활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통해 상대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새로운 시각이나 깨달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상대가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즉 ‘틈’이 꼭 필요합니다.

‘잘 듣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오랫동안 가졌던 고민이 조금씩 해소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호감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느낀 만족감의 핵심은‘상대가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다.’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말하고 싶어 하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잘 들어주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바꿔 말하면, ‘잘 듣는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서 큰 신뢰와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내가 듣고 싶은 것’보다 ‘상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듣는 태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급해하지 말고, 자연스럽고 편안한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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