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결혼이 하고 싶던 날도 있었다. 그때는 결혼보단 타인의 삶에 무임승차를 하고 싶었다. 나보다 조금 더 책임감 있고, 경제관념을 갖춘 사람이라면 혼자보다 둘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아내보단 나 자신이고 싶다. 아직 그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는 나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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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스물한 살에, 엄마 나이 마흔다섯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지주막 아래에 있는 뇌 대동맥이 파열되는 심각한 뇌출혈이었고, 보통은, 그러니까 병의 통상적인 결과가 대부분 사망이라는 그 병에서 엄마는 죽지 않고 살았다. 뇌 일부분이 죽어 감정 조절, 기억, 인지능력 등이 갓난아이와 다름없었지만. 사람들은 엄마가 젊어서 버틴 거라고 했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뇌 질환 병동에 똘망똘망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엄마를 보면 사람들은 젊어 아파서 어쩌냐며 입을 모았다. 맞아, 엄마는 젊지. 젊을 때 아파서 산 거지. 그런데 이제 조금씩 엄마가 아픈 나이가 되어가 보니 알겠다. 엄마는 이번에도 젊은 게 아니라 어렸다.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보는 엄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면 중 단 몇 개에 불과할 테니까. 내게 그 많은 면을 설명해줄 엄마가 이제 없다는, 그 인지능력을 가진 엄마가 없다는 걸 느낄 때 서럽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가끔 지금의 엄마를 붙잡고 묻는다. 지금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금의 엄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중이니까. 느리게, 아주 느리게.

우울해서 살기 싫다는 나에게, 남몰래 죽음을 결심하던 나에게 엄마는 소주를 건넸다. 돌이켜 보건대 아마 물이었을 것이다. 하나도 쓰지 않고 밍밍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때 나는 그게 정말 소주인 줄 알아서, 하나도 쓰지 않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만큼 지금 네 삶이 쓰다는 거야. 너 정말 힘들구나" 했다. 그 뒤로는 그 힘으로 성인까지 버텼다. 나는 소주가 달게 느껴질 만큼 힘든 미성년자다, 하고.

감정 조절이 어려운 엄마는 쉽게 짜증을 내고, 사람을 꼬집고, 식기를 던지거나 우리를 때린다. 간병4년 차까지는 엄마랑 싸우기도 하고, 앞에서 서럽게도 울어보고, 다 놓고 집에 가버리기도 했는데 이제 언니랑 나는9년 차 간병인이라 엄마가 때려도 깔깔 웃고, 엄마가 늘어나도록 잡아도 되는 옷들을 입으며 엄마가 식사를 거부하면 우리 먼저 밥을 빠르게 먹는다. 내가 화를 낼 때, 같이 화를 내는 엄마였다면 마음이 좀 편했으려나. 그런데 엄마는 도통 그런 엄마가 아니어서, 우리 자매도 결국 엄마 같은 어른이 되어간다. 엄마가 화를 내면 휠체어를 끌고 세 시간씩 공원을 돌고, 어느 곳이든 휠체어를 민다. 끈질기게 엄마의 지구를 넓히기 위해.

할머니는 엄마가 쓰러진 이후로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더니3년 뒤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은, 어려진 엄마에게 하지 않았다. 지금도. 엄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를 보면 울고, 삼촌들을 보면 울고, 우리를 보면 웃는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사랑해"라는 말은 잘 한다. 엄마의 뇌는 잊었을지언정 엄마의 몸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자주 엄마의 이마에, 뺨에, 손등에 입을 맞춘다. 버텨줘서 고마워, 기억해줘서 고마워, 엄마 몸아, 그런 의미로.

누구한테 털어놓지 못해서 혼자 삭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요. 집안일을 한다든가, 음악을 듣는다거나. 일단 힘들다고 타인을 먼저 찾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바꾸고 싶은 부분 중 하나예요. 누군가한테 기대는 것도 방법으로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약간의 강박증이 있어서 청소를 거의 매일 해요. 근데3일에 한 번 한다? 안 되는 거예요. 최소 이틀에 한 번은 밀대로 바닥을 밀어야 되니까요. 그럼 나는 지금 너무 힘든 상황이거나 일이 과중돼 있는 거죠.

선란 그리고 일기에 관련된 건데 저는 가끔 제가 일기에 써놨던 어떤 사건들을 모른 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번에도 엄마가 너무 짜증을 내거나 힘들게 하면 저는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엄마의 체구가 언니랑 저보다도 훨씬 크세요. 키도 크시고 체격도 있으셔서 언니는 예전에 엄마를 잘못 들어서 허리가 나갔고 힘쓰는 건 웬만큼 제가 다 해야 되거든요. 너무 부칠 때마다 가끔은 진짜 모른 척하고 싶어요. 내 가족을. 혼자 나가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이것도 내 삶이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다고 꾸역꾸역 인정하고 사는데, 혹시 여러분한테도 부정하고 싶지만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삶의 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해요.

나는 아무리 아름답게 이야기를 꾸며도 단 한 사람 인생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고 믿는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심지어 읽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인생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운 게 있을까. 엄마의 뇌는 잊었지만 엄마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삶을, 나는 자주 들여다본다. 엄마의 손가락, 팔꿈치, 목, 다리, 무릎……. 모든 곳에 틈 없이 새겨진 삶의 흔적을. 나는 나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내가 가진 엄마의 단면 몇 개를 자주 이어붙이며 엄마의 삶을 쓴다. 언젠가 또 내 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의 삶을 그렇게 쓰겠지. 그렇게 차곡차곡 내 안이 타인의 삶으로 가득 채워졌을 때, 그때 나도 내 삶을 잘 마무리 지어야지.

중증장애인인 엄마는 휠체어 없이 이동할 수 없다. 이 말은 엄마의 지구는 우리가 사는 지구보다 훨씬 작다는 것.

인문계 고등학교를 죽어도 가기 싫다는 나를 데리고 엄마가 간 곳은 놀이동산이었다. 엄마는 롤러코스터를 못 타는데 그날 나를 설득하겠다고 롤러코스터를 탔다.
"엄마도 싫고 무서운데 탔잖아. 그러니까 너도 싫고 무섭지만 한 번 해봐. 아직 안 해봤잖아. 해보고 아니면 말면 되지."
그렇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해보니…… 정말 더 싫고 영 아닌 것 같아서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예술고등학교로 편입했지만.

케이팝을 들어도 신이 나지 않을 때, 나는 인생이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미래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안에 빠지기 쉽다는데 내가 꼭 그렇다.

‘나 돌보기’에 소홀하면서 일상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보통 잘해내고 싶은 게 많을 때 이런 욕심과 오기가 발동하는데, 도대체 나는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싶은 걸까?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마음과 별개로, 나는 나의 어떤 실패는 반드시 지지하는 편이다. 나의 굳셈을 과신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여기기 때문에 나약함을 들키려거든 부디 안전한 곳에서 무너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여전히 밀어붙이기를 멈추지는 않은 채로 살게 되는 시기가 있다.

생각이 멈추고, 마음도 멈추고. 오직 음악만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공간에 갇힌 것 같은 외딴 기분. 의도적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는 자의적 멍 때리기가 아닌, 갑자기 퓨즈가 나간 느낌이랄까.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지금 힘들구나, 깨닫는다.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듦을 대체로 부정하고 축소시키는 편이지만 이때만큼은 백기를 든다. 인정. 그래, 나 너무 힘들어. 이리저리 플레이리스트를 바꿔가며 기분을 띄울 기력도 없이 버스나 지하철 좌석에 몸을 맡긴다. 눈을 감으면 언덕에서 빠르게 굴러가는 빈 깡통이 그려진다.

요즘 나는 엉망으로 열심히(‘엉망’과 ‘열심’의 위치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 살고 있다.

다들 그렇지는 않다는 건 일찍이 알았으므로, 이런 나와 지독히도 불화했던 시절은 어찌어찌 지난 일이 되었다. 다만 내가 충분한 학습과 시간을 들인 끝에 기꺼이 마주 볼 수 있게 된 나의 다른 못난 구석들과 달리, 나를 좀먹는 이 기이한 성실함 앞에서는 가끔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놓을 뿐이다. 지금처럼.

엄마는 스물한 살에 언니를 낳고 스물세 살에 나를 낳았다. 엄마는 내 또래 중에서 젊은 엄마였다. 엄마는 참 젊을 때 나를 낳았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를 훌쩍 넘어 돌아보니, 엄마는 젊은 게 아니라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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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인 나는 좀 어리숙했고 지금처럼 성격이 불같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만 속이 풀리는 나는, 그런 면에서 단체 생활에 최악이었다. 조금 더 솔직했다면,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다면, 속상하고 질투 나고 친해지고 싶고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걸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걸 못한다. 아니, 그때는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못하는 거였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 감정적인 면으로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풍성한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게 많은 것과 표현하는 건 좀 다른가? 그래, 다를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게 많은 건 그저 내 안에 담아두고 쌓아두고 간직하면 되지만 표현하는 건 꺼내야 하니까. 꺼내어 주는 걸, 어릴 때부터 못했던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지만 이십 대의 나는 만남보다 많은 이별을 했고, 누구의 잘못도 없는 다툼을 했으며 그렇게 원망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들었다.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할걸. 이 생각을 대학교 졸업할 즈음에 했다. 괜찮냐는 말들에 그냥 괜찮다 하고 다녔는데, 내가 힘들다고 말해봤자 저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마음의 짐만 얹는 꼴이니 그냥 괜찮다고 하고 다녔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힘든 걸 나눌 순 없지만 나의 힘듦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힘들지 않도록 바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이제 와 다시 말하자면,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이건 후회다. 안다. 돌아가도 나는 못할 거다. 지금도 잘 못하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은 너무 깊게 후회 말자.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는 걸, 뭐.

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운 이름을 마음껏 소리 내어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전 애인, 그, 내가 만났던 사람처럼3인칭으로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을 꾹꾹 눌러 부르는 것.5년 전, 스물셋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섬으로 도망쳤던 걸까. 그때는 막연히 나를 아는 이도, 그를 아는 이도 없는 곳에 가서 그 이름을 실컷 부르고 오려고 했다. 날이 좋으면 바다 건너 제주가 보이는 범바위 위에서,200년 된 소나무가 있는 지리해수욕장에서,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 이렇게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던 돌담길에서도 나는 지독하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이후, 누군가 그리운 날이면 섬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고, 더는 내 마음을 아무렇게나 팽개치지 않았다.

그저 섬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알맞은 곳이구나. 그렇게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살아가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은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까지도.
가을과 겨울 그리고 다시 가을. 청산도에는 총 세 번을 입도했고 그때마다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섬이 꼭 내 것처럼 느껴졌다.

섬에서 섬을 바라보는 풍경은 더는 다다를 데가 없다는 점에서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청산도에 들어왔을 때부터 섬의 끝자락에 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걷기 시작하자 새로운 끝이 있었다. 자주 오가던 골목에 건물이 들어서고, 나중에 다시 찾으려고 했던 카페가 사라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제도 분명 있었을 길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자 나는 섬에 그리워하러 온 게 아니라 누군가를 더 깊이 좋아하기 위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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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바이올린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한국의 현악기 사대주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세계에선 다 아는 일. 한국인이 만든 악기는 아무리 뛰어나도 거래가 뜸하다. 그처럼 손으로만 깎고, 최상품 재료로 만든 고급일수록 국산은 더 외면받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러하다. 엉터리 외국 악기도 거간이 붙어서 아주 비싼 값에 매매된다.

그는 악기마다 꿋꿋하게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다. 배운 학교가 있는 도시 이름 ‘구비오’에 덧붙여서. 최상의 소리를 내는, 과르니에리와 스트라디바리우스식 악기가 그의 제작소에서 세월을 얻어간다. 그는 잘 팔리지 않는 악기를 끊임없이 만든다.

63세 시인 성백술. 앞에서 내가 ‘만술이형’이라고 한 그의 본명이다. 그는 시집을 두 권 냈다. 산막리는 영동 산골짜기 그의 고향이다. 서울에서 그는 끝내 배척되거나 스스로 배척했고, 고향에 갔다. 거기서 그의 이름은 산불감시원 무전 호출부호인 ‘봉선화 58호’이기도 하다. 공공근로 산불감시원을 하며 농사도 조금 짓고 복숭아나무도 심고 공장에 가서 시간제 일도 하고 마을 구판장도 운영하고 그렇게 산다. 억울하게도 세상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너무도 좋아한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하면 술백성. 입에 올려서 발음하면 술 생각도 나고, 무지 보고 싶어서 울컥하기도 하는 이름.

친구는 냉장차를 두 대나 사서 전국으로 배달을 다녔다. 그때가 아마도 인구의 정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잘 사는 줄 알았던 친구에게서 돈 꿔달라는 전화가 왔다.

나는 종종 그를 만나러 그 집에 갔다. 화분 밑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수업을 마친 그가 왔다. 전화도 없던 때니까 밤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밤에 귀가한 그가 깜짝 놀라면서 엄청 반가워했다. 늘 그랬듯이.
"찬일아! 미안하다, 야."
하긴 그 형은 누구에게나 잘했다. 미움이라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세상은 그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소주잔을 놓고 친구는 한숨을 쉬었다.
"요샌 배달차 몰고 배달 대신 돈 받으러 다닌다. 물건 받아간 뷔페 사장들이 다 잠수를 탔어. 곧 나아질 테니 좀 빌려줘."
몇 억씩 여러 건을 물렸다고 했다. 뷔페는 싼 재료를 대량으로 사서 쓴다. 이윤은 박한데 금액은 크다. 한두 곳의 거래처만 망해도 충격이 크다. 음식 시장은 서로 물리고 물려 있다. 작은 전문 재료상-유통 재료상-식당의 구조인데 한 군데가 망하면 연쇄적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다. 뷔페 전문인 친구는 시대의 끝물을 탔다. 더 이상 사람들이 뷔페를 가지 않는다.

미수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바닥에서도 사람 좋으면 꼴찌가 되는 법이다. 집도 차압당했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우리들, 그러니까 오랜 친구들에게 돈 빌려달라고 전화한 것은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였다. 회사가 망하는 판에 그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거래처 빚을 갚았다. 그러고는 주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마지막으로 직원 월급을 주려고 했다. 상가에서 만난 동창은 혀를 찼다.
"자기 사업 망하는데 직원 월급 걱정하는 인간은 처음 봤다."

상가는 북적였다. 마치 호상 같았다. 바보 같은 친구가 뿌린 씨앗이었다. 오죽하면 절하며 통곡하는 사람이 전직 직원들이었다. 사람 좋으면 꼴찌가 아니라 첫째다. 저승에 제일 먼저 간다고 누가 혀를 찼다.
돌아서는데 부인이 울면서 우리에게 한 장씩 봉투를 주었다. 지방에서 종종 보듯, 답례 교통비 봉투인가 했다. 삼우제에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큰돈을 친구에게 빌려준 녀석들이었다. 답례 교통비 봉투에는 친구의 사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여덟 장의 편지를 모아 삼우제를 한 사찰 마당에서 태웠다. 친구의 마지막 밤은 그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광풍 같았던 뷔페의 시대는 흘러갔고 친구도 갔다.

기레빠시 파스타는 위트 있지만 요리사의 근무 상황을 풍자한다. Spaghetti Alla Kirepassi. 써놓고 보니, 아주 근사한 아랍풍 건물에 들어 있는 시칠리아 식당의 메뉴 같다. 하기야, 그런 식당에서도 요리사들은 ‘빠시’로 만든 스파게티를 먹는다. 이건 틀림없다. 미슐랭 3스타짜리 식당도 거기서 거기다. 절대로 거위 간 소스의 스테이크를 먹을 수는 없다.

친구의 전화가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웠다. 예감이란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의 상을 치렀다. 상가에 문상객이 많았다. 육개장과 편육에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좋은 사람은 먼저 데려가는 거여."

친구는 꿈이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작은 판매회사에서 대기업을 흉내 내어 직원들에게 ‘체력단련비’를 지급한 게 녀석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오래 버텨주지 않았다. 친구는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발흥과 몰락을 다 지켜보았다. 바꾼 업종은 식재료 도매업이었다. 발 빠르게 좋은 시장으로 갈아탄 것이었다.

요리사 모임은 야밤에 시작한다. 손님 다 가고, 결산까지 마쳐야 슬슬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코로나 시절에는 모이지도 못했다. 일 끝나면 전국의 술집도 ‘셧다운’이었다. 불 꺼진 식당 탁자에 각자 앉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깡술’ 한잔씩 놓고 마셨다. 음울할 때였다.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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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힘든 게 음식이었다. 매일 오일에 버무린 스파게티와 송아지고기를 먹었는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송아지고기는 싸고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어서 주인이 매일 주다시피 했다. 동네에 한식당은커녕 중국식품점도 없었다. 음식이 안 맞으니, 안 그래도 마르던 몸이 피골상접 상태로 가고 있었다. 매일 열 몇 시간씩 일하지, 제대로 못 먹지(송아지고기밖에 먹을 게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에는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삐걱거리는 싸구려 침대 밑에 전갈과 도마뱀이 돌아다니는 방에서.

그렇게 지쳐가고 있을 때였는데, 가게에 웬 소포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고추장 1킬로그램과 마른 멸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그 녀석이 보내준 것이었다. 운송료가 고추장과 멸치 값의 열 배는 들었을, 지구를 반 바퀴 돌다시피 해서 녀석의 마음이 왔다. 밥을 지어서 고추장 두 숟갈쯤에 멸치 몇 개를 부수어 넣고 엑스트라버진 최상급 올리브유로 비볐다. 먹는데 눈물이 났다.

정작 한국에 와서 진짜로 크게 울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녀석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영정 안에서 웃고 있는 후배를 보니 심장이 턱 막혔다. 요즘도 마트에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내게 보내준 것과 똑같은 빨간 상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나는 발바닥이 쑤욱 꺼지는 것 같다. 사람은 기왕이면 오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기억도 막 쌓아서 나중에 죽어도 아무런 미련을 갖지 않게 하는 게 좋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며칠 전에 이 글을 쓰려고 녀석과 추억이 있는 장소를 휘 돌아보았다. 청파동의 포대포라는 돼지껍데기 집이다. 좁은 자리에 다닥다닥 앉아서 피어나는 연기에 눈물을 질금거리며 껍데기를 구웠었다. 돼지껍데기처럼 질기게 좀 오래 살지, 뭐가 급해 그리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녀석과 내가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새 학기가 되어 교실에 들어갔더니 맨 뒷자리가 하나 남아 있어서 앉았다. 머리를 박박 깎고, 눈빛이 번쩍번쩍하는 녀석이 짝이 되었다.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당대의 천재 선수였던 허재랑 동급생이었다. 물론 허재는 다른 학교 소속 선수였다. 경기를 많이 치렀다고 했다.

그때 우리 학급은 ‘돌반’이었다. 공부 안 하거나 못하는 애들이 모였다. 담임은 첫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랑 붙고 싶은 놈은 계급장 떼고 해보자. 1년 조용하게 살고 싶다. 도와주라. 나, 이 학교 나온 너희들 선배잖니."
별명이 ‘카리스마’였다. 당시엔 카리스마라는 말이 흔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우리 학급은 문제 반이었다. 처음엔 한 반에 60명이던 숫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한두 명씩 사라졌다. 2학년을 마칠 무렵엔 대여섯 명 가까이 없어졌다

그런 학교에서 학생들 간수하고 분위기 잡기에는 카리스마 선생이 최고였다. 그는 매질을 별로 안 하고도 조용히 학급을 잘 이끌었다.
물론 선생님이 없을 때 툭하면 교실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얻어터진 놈은 화장실에 가서 코피를 쓱 닦고 와서 수업을 받곤 했다. 녀석은 한 번도 싸움을 안 했는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은 내게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하느라 기초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골치 아픈 수학 시간에 졸지 않는 건 반장이랑 녀석밖에 없었다. 반장은 알아들었고, 녀석은 그냥 참았다. 선생님 덜 무안하라고.
"달랑 한 명만 듣고 있으면 선생 체면이 좀 그렇지 않냐."
나는 공부하기 싫어했고, 학교에 갔다가도 대충 도망쳤다. 가끔 녀석과 교복 입은 채로 학교 뒷산의 절 밑, 사하촌에 가서 밀주를 마셨다. 어른 흉내였지만 우리는 심각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난에 대한 서투른 절망 같은 것이었다. 녀석의 집에 처음 가서 놀란 건 키 큰 우리 둘이 그 집에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붕이 낮았다. 라면을 끓여 양은 밥상에 놓고 먹는데, 대낮에도 천장에서 쥐가 뛰어다녔다. 나랑 비슷한 녀석이 있구나.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어찌어찌 우리는 살아냈다. 군대 갔다 오고, 대충 밥벌이를 찾았다. 녀석은 보일러 고치고 설치하는 일을 했다. 장가가고 싶어 했는데 연애를 못 하는 눈치였다. 어느 처녀가 저 가난뱅이에게 쉬이 시집오겠는가.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녀석이 장가간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사회를 봤던가. 조선족 처녀였다.
신혼집에 한 번 갔었다. 녀석이 애를 많이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둘이 잘 맞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중국 남자는 술 안 마신다고 했다. 술 좋아하는 그는 낙제였던 것 같다. 중국 남자는 술을 안 마셔요……. 그건 예감을 주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아내가 우울해한다고 녀석은 걱정했다. 안주로 오이를 내왔는데, 아내는 ‘황과’라고 했고 녀석은 ‘오이’라고 수정해주었다. 황과와 오이.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했다.

그러고는 이혼 아닌 이혼 소식을 들었다. 이혼 도장도 못 찍었다. 당사자가 없어졌으니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실종 신고를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당시 바빴다. 가끔 녀석에게 회사로 전화가 왔다. 바쁘다, 야. 그래, 곧 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못 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들어간 게 모래내의 어느 중국집이었다.
어중간한 오후, 그 시절엔 중국집 2층에서 짬뽕 국물과 군만두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폼은 사라지지 않아서 녀석은 중국집 팔각 물 잔에 소주를 마셨다. 짜장면엔 으레 그렇듯이 얌전하게 채 썬 오이가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라진 아내에 대해, 황과와 오이에 대해 말했다. 같지만 다른 것이었다.

그날은 우울했지만 녀석과 그렇게 짜장면 안주로 재미나게 술을 마셨다. 우리는 금세 취했고, 녀석은 큰 키를 꼿꼿하게 세우고 밤길을 걸어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만난 건 적십자병원 빈소였다. 그는 끝내 아내를 찾지 못했다. 나는 그저 생존하느라 바빴다. 사고였다. 술에 취해서였는지 어쨌는지 그는 한 길가에서 트럭에 치였다고 했다. 아무런 유언도, 아내의 소식도 없이 그는 쓸쓸하게 갔다. 그의 여동생이 오랫동안 슬프게 영정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나도 한참 울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짜장면을 안주로 술을 마시면 녀석이 생각난다.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잊을 수가 없다. 이 글 초고를 써놓고 방산시장 중국집 방산분식에서 3000원짜리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잔도 없이 물컵을 주는 집. 반병씩 따라서 쭉 들이켜면 두 번에 끝난다. 잘 살고 있냐. 거긴 소주 있냐.

학창 시절에 잘 다니던 술집이 있었다. 등록된 상호는 뭔지도 모르겠고 선배들마다 개미집이라고도, 왕개미집이라고도 부르는 대학가에 흔하게 있던 아줌마 술집. 방학 때에도 돈 한 푼 없이 그 집에 가서 막걸리 한 병을 시켜놓고 공짜 깍두기에 마셨다. 막걸리 몇 병 값이 없었다. 계산을 못 하니 나가지도 못하고 저녁이 될 때까지 내처 마셨다. 기다리다 보면 졸업해서 취직한 선배가 누구라도 마치 학생처럼 왔다. 우리들 술값도 내주었다. 개미집은 그저 그런 술집이 아니었다. 우리 선배들이 공부하는 곳이었고, 사랑하고 싸우고 더러는 잠도 자는 곳이었다. 술에 취한 데다 차비도 없어서 가게 구석에서 말이다. 그런 집의 주인 내외가 병들어 가게를 그만하게 되었다.

몇 년 후, 학과 창립기념식에 그 아주머니를 불렀다. 명예 79학번인가 학사증을 준비하고 외상값을 대신한다는 취지로 금반지도 드렸다. 그 아줌마, 그러니까 실명으로 김진자 씨는 마이크를 잡고 소감을 말했다.
"79학번 ○○아, 너 뒷주머니에 돈 숨기고 술값 안 낸 거 내가 다 안다. 80학번 ○○아, 너 그때 여자 바꿔가며 데려와도 아무 말도 안 했지. 81학번 ○○아, 너는 등록금 갖고 술 마시다가 그때 휴학했지?"
비상한 기억력으로 유명한 김진자 씨는 완벽하게 왕년의 비밀을 다 떠벌릴 기세였다. 행사장이 난리가 났다. 더 심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마이크를 뺏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뒤풀이에서 다들 많이 취했다. 술집 주인에게 명예 학번을 헌정할 수 있는 학과를 다닌 게 우리들의 자부심이었다. 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더라도 말이지.

내가 사회에 나와서 밥이라도 벌어먹고, 남에게 큰 폐 안 끼치고 사는 건 거개 학창 시절 선생님들 덕이다. 어쩌면 한 인간의 미래를 만드는 건 선생님들이다.
"찬일이가 글을 따박따박 잘 써" 하셨던 초등 3학년 담임선생님, 교과서에 나온 ‘라사(羅紗)’가 양복점을 의미한다는 걸 맞혔다고 칭찬하셨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임완기 선생님) 덕에 나는 글줄이라도 챙겨서 평생 벌어먹는 재주를 얻었던 것 같다.

칭찬은 사람의 미래를 만드는 마법 같은 주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이유 없이 학생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어머니들 불러서 서랍 열어놓는 양반들이 적지 않았지만 스승이라 부를 선생님도 많았다. 우리는 부모님이 낳으시고 선생님이 짓는 인생이 아니었나 감히 생각한다.

선생님은 나날이 표정이 어두워지고 건강이 나빠지셨다. 왜 아니겠는가. 반 아이 쉰 명 중에 이른바 교내외 폭력서클 멤버가 열 명이 넘는, 아니면 나처럼 무단결석을 밥 먹듯 하던 아이들이 태반이던 학급이었다. 고등학생 주제에 거의 다 담배를 피워서,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폭연을 해댄 통에 동네 주민이 창문 밖으로 뿜어져 나온 연기를 보고 화재 신고를 한 일도 있었다.

선생님은 머리숱이 많아 백발이 더 희게 보였다. 조례가 끝나고 나랑 몇몇 아이들이 화장실에 모여서 반성과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앞으로 웬만하면 학교에 나오자고. 나오면 대학 가겠다고 공부하는 애들 괴롭히지 말고 뒷자리에서 조용히 엎드려 자자고. 담배 한 대를 돌려 피우면서 우리는 각오를 다졌다.
"야, 생불(生佛) 선생님 진짜 화나신 거 같다. 우리가 도와드리자."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오죽하면 우리가 몰래 지은 별명이 생불이었을까. 선생님이 나쁜 말을 입 밖에 내는 걸 들은 적이 없다.

옛 기억이 난다. 한번은 교무실로 날 부르셨다. 그래갖고 대학 가겠느냐, 등록금이 밀렸는데 낼 형편이 안 되느냐, 그리 물으셨다. 세상에 나는 그런 근심 어린 표정을 인생에서 다시 본 적이 없다. 상담인지 뭔지 모를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던 내게 선생님이 뭘 쑥 내밀었다. 하얀 기름종이에 싸인 햄버거였다.

교무실에서 교실까지 걸으며 햄버거를 씹었다. 입가에 갈색 소스를 묻히며 먹었다. 치아에 무언가 씹혔다. 목에도 무언가 걸리는 것 같았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이 심각한 표정의 내게 말도 걸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안경을 벗은 것처럼, 앞이 뿌옇게 보였다. 그때는 아주 진지하게 선생님 속을 그만 썩이자고 다짐했던 것 같다.

선생님의 긴 인생의 시간에 한 점도 안 될 내가 기억되고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한 번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없었는데. 선생님을 따라 시를 썼더라면 좋아하셨을까 여쭤봐야겠다.

최근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다른 친구에게도 ‘찾아가 뵙겠다고 해라’라고 독촉도 했다. 선생님은 사양하셨다. ‘내가 너희들 보고 싶은데, 지금 몸이 아파 어렵다’는 전갈이었다. 연세가 많다. 이제 다시 못 뵙는 것일까. 마음이 저만치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래전 일이다.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중세풍 도시인 구비오(Gubbio)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제작학교를 다닌다던 ‘늙은’ 학생이었다.
"부안서 왔슈. 나이가 저보다 성님이네유."
아내가 있다고 했다. 서울서 아내가 벌어 생활비를 송금해준다고 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태권도 선수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패션 디자인을 했단다. 어쩌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인심 별로인 중세풍 도시에까지 흘러들었을까. 하기야 그나 나나 피차일반이었다. 아내 뜯어서, 공부랍시고 어쨌든 이탈리아에 와 있었다. 그는 책임감이 강했다. 빨리 배워서 아내 고생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면접 보는 교장선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굳은 의지. 그런 거 보여주는 수밖에 더 있었겠슈? 안 되면 막고 품는 거쥬."
막고 품다. 도랑 양쪽을 흙으로 막고 물을 뺀 후 고기를 잡는 최후의 어로법을 이른다. 어떻게든 하자고 드는 절박감이기도 하다. 현악기 제작학교는 보통 북부의 원조 도시인 크레모나(Cremona)에 많이 간다. 한국인도 꽤 있다. 구비오는 산골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그곳에 웬 한국인이 입학하겠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붙여는 드릴게’ 이런 마음이었을 것 같다. 과연 제대로 다닐까 의심하면서 말이다.
그는 정말 절박하게 학교를 다녔다. 이탈리아 학생들보다 더 악기를 잘 만들었다. 그게 그의 승부수였다. 그를 보러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여전히 그는 막고 품었다.
"말은 못 해두 돼유. 악기만 잘 만들믄 돼유. 그거 말구 뭐가 있간디."
2년제 학교였다. 그는 꼴찌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교장은 이탈리아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었다. 교장이 그의 졸업 작품 바이올린을 학교 전시실에 공식 헌정했다. 솜씨를 인정한 것이었다.

샌드위치 한 쪽으로 점심을 때우고 그는 실습실에서 나무와 다투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옛 장인과 같은 방식으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깎았다. 도료도 접착제도 다 자연에서 얻은, 효율은 없지만 그런 미련한 재료와 제작 방식이 명품에 근접시킨다는 걸 그는 학교에서 배웠다. 과르니에리,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악기다.

이십 몇 년 전이다. 한번은 내가 많이 아팠다. 그를 찾아 구비오에 갔다. 공황장애로 혼자서 잘 수 없었다. 봄이었는데도 중부의 산악 도시 구비오는 추웠다. 가스비가 아까워 불도 때지 못하는 추운 자취방에서 그가 저녁밥을 차렸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김치 한 종지와 달걀프라이가 놓인. 그날 밤 그는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나를 제 침대에 눕혔다. 물을 끓여서 생수병에 담아 건네주었다.

그는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는 쉼 없이 깎고 조이고 붙였다. 그가 학생 시절 만든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뜨거운 물병을 내게 안겨주고 재워준 값으로, 그 막막하던 날을 견디게 해준 그에게 보탠 악기 나무 값이었다. 그런 호의를 기억하는 그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의 바이올린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한국의 현악기 사대주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세계에선 다 아는 일. 한국인이 만든 악기는 아무리 뛰어나도 거래가 뜸하다. 그처럼 손으로만 깎고, 최상품 재료로 만든 고급일수록 국산은 더 외면받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러하다. 엉터리 외국 악기도 거간이 붙어서 아주 비싼 값에 매매된다.
그는 악기마다 꿋꿋하게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다. 배운 학교가 있는 도시 이름 ‘구비오’에 덧붙여서. 최상의 소리를 내는, 과르니에리와 스트라디바리우스식 악기가 그의 제작소에서 세월을 얻어간다. 그는 잘 팔리지 않는 악기를 끊임없이 만든다.

그는 여전히 잘 산다. 공공근로 나가서 몇 푼 얻고, 시간 내어 농사도 짓는다. 한번은 그가 직접 농사지은 단호박이 집에 왔다. 식구들은 달고 맛있다는데 나는 손이 가지 않았다. 내가 그를 생각할 때마다 기억나는 건 모르타델라 샌드위치다. 그저 제일 싸기 때문에 지겹도록 먹었다는.
2023년 가을. 나는 10년 동안 운영하던 식당을 닫았다. 짐을 정리하는데, 그가 보내준 커다란 원목 도마가 눈에 들었다. 나를 위해 제일 좋은 나무를 다듬어 깎은 커다란 도마.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마. 나는 가만히 그 도마를 껴안았다. 마에스트로가 된 그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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