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요즘 무너지고, 무너지는 중이어서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워진다.

추천의 글
_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굳이 쇼펜하우어의 ‘표상의 세계관’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이러한 상실은 그 원인들조차 너무나 복잡한 이유들로 뒤섞여 있어서 단순하게는 죽음에서부터, 발병의 시작 시점조차 명확치 않은 심한 인지능력 저하로 인한 자아의 상실 등에 이르기까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실로 인생은, 이 책의 제목인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과 같이 수많은 이별과 상실들로 가득 차 있으며, 결코 선명한 결말이나 해결책은 없다.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어 그 모호함 이외에는 달리 특정될 단어조차 없다. 어쩌면 이 책은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역시 상실을 겪으면서도 상실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 불확실성 속에서도 조금씩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관점과 접근법을 탐구하도록 유도하는 저자로부터의 초대장일지도 모른다. 마치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세계관’처럼.

의학박사·외과전문의 이국종

내 부모와 조부모는 더 나은 삶을 위해 20세기 초 대서양을 건너 비옥한 땅이 펼쳐진 위스콘신 남쪽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항상 더 나은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멀리 스위스에 남겨진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타국으로 떠나보내고 그리움의 병이 깊었다.

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종종 정신이 어디 먼 데 가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고국에 두고 온,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빈자리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깊은 상실로 남겨졌고 같이 사는 가족들은 그들이 겪는 부재와 존재의 모호함을 함께 경험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족’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언제나 몸 닿을 수 없는 곳에 떨어져 있었고, 우리는 온통 이민자들로 북적대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향수병은 일반인의 평범한 정서처럼 받아들여지곤 했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유년기 때부터 이런 모종의 상실감과 우울한 감정들이 평생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내 주변은 늘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조언을 구하고자 찾아온 젊은 이민자들에게 악센트 강한 말투로 종종 이렇게 말했다. "고국에서 3개월 이상 떨어져 지내지 말게. 그러다 자신의 고향이 어딘지 모른 채 살게 된다네." 어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늘 알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뿌리내렸던 그곳을 마침내 떠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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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인물/박정희

박정희(1917년~1979년)는 5.16 군사쿠데타의 지도자로, 대한민국 5대~9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박정희의 경력은 모순적이다.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해 교편을 잡았으나, 늦은 나이에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이 된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하여 만주와 화북 일대에서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광복군에 잠시 참여했으나 국군에 입대했고, 이 시기 비밀리에 남로당 조직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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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사건/한일 협정

1965년 한국과 일본 간에 맺어진 한일 기본 조약을 말한다.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는 강화된다.

한일 협정을 통해 양국이 기존에 맺었던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일본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를 대한민국으로 인정했다. 또 무상 3억 달러를 비롯하여 저리의 차관을 일본이 제공했으며 그 밖의 각종 조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한일 협정을 통해 양국이 기존에 맺었던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일본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를 대한민국으로 인정했다. 또 무상 3억 달러를 비롯하여 저리의 차관을 일본이 제공했으며 그 밖의 각종 조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 이를 통하여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가 갖춰지게 되면서 소련-중공-북한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진영에 대응하는 강력한 자유 진영의 동맹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 당시 들어온 자금은 포항제철 건설 및 경제 자금으로 사용됐고 일본의 기술 이전, 미국이라는 수출 시장을 활용한 산업화 전략에 중요한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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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혼란 속에서 합의하에 서로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가 즐기던 놀이는 물속에서 숨 오래 참기였는데, 정말 죽일 것처럼 고개를 사정없이 눌러 버리는 게 이 놀이의 묘미였다(그 행위의 원인 제공자는 당연히 아빠였다). 집 근처 계곡에서 그 놀이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가 와서 등짝을 치며 말렸다. 근데 한 가지 이상했던 건 호흡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도 물속에서 춤추듯이 발버둥을 칠 때면 이상한 쾌감과 희열을 느꼈다는 것이다. 내가 누르는 입장이든 당하는 입장이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때의 쾌감은 상대가 날 죽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대학3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가족은 바다와 계곡을 돌아다닐 계획으로 긴긴 여름휴가를 떠났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여행을 반기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나와 동생은 여름방학 전부를 가족 여행에 반납해야 했기 때문에 방문을 나설 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신난 건 아빠였다.

바다에서도, 계곡에서도 나는 멍하니 물속만 들여다보았다. 바다에선 피부를 벗길 듯이 무릎을 쓰다듬는 바닷물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고, 마지막 휴가지였던 계곡에서도 고르게 침식된 바위에 걸터앉아 눈앞의 계곡물이 얼마나 깊을지 상상했다.

나는 다시 계곡물을 바라보았다. 그 문제의 잠수 게임은 초등학교 때 이후로 끊었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계곡물을 보자, 잊혔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코를 막고 힘껏 점프해 물속 깊이 잠겨 들었다. 하지만 혼자 잠수를 해서인지 별다른 재미가 없었다. 그때부턴 수경을 끼고 물속을 돌아다녔다.

얼마 뒤160cm인 내가 똑바로 서면 발끝이 자갈을 겨우 스칠 정도인 꽤 수심이 깊은 곳에 도달했다. 두툼해진 물살을 가르며 점프하듯이 걷다가 좀 힘들어서 멈춰 섰을 때였다. 눈앞에 중대형의 바위가 두세 개 빙 둘려 있었는데 내 시선에서는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려면 바위를 둘러 가야 했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유속이 빠른 곳을 지나 더 깊은 곳으로 진입했다. 더 이상 발이 닿지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끄윽, 아니면 커흑.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길을 헤치며 가다 보니 네 개의 사람 다리가 보였는데 두 개의 다리는 조금 안정돼 보였고 두 개의 다리는 발버둥 치고 있었다. 언뜻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안정돼 보이는 다리는 가늘었다. 곧바로 젖은 머릿속이 뒤엉키면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엄마와 아빠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다가갈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저 그 무기력한 공간에 떠 있을 뿐이었다. 발버둥 치던 다리는 어느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엄마가 목적을 완수하고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을 때, 나는 텐트로 돌아가려고 전력을 다해 헤엄치는 중이었다.
몇 분 뒤 나타난 엄마는 그 사건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우리를 조용히 부른 다음 짐 정리는 내가 할 테니 너희는 차에 가 있으라고 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원래는 계곡에서2박3일간 있을 예정이었지만 그걸 바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아빠의 행방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걸 엄마는 아직도 모르는 듯했다. 아니 그 사건에 몰두하느라 우리를 완전히 잊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언제나 아빠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었는데 말이다.
"엄마, 아빠는 왜 없어?"
내가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걸 눈치 없는 동생이 먼저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땐 이미 집 마당으로 차가 들어서던 참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일이 생겨서 먼저 갔다고 둘러대며 마당 한쪽에다 차를 세웠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엄마가 차 트렁크를 열어 짐을 꺼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트렁크 속엔 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각자 짐을 나눠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장면을 목격한 순간부터 그래야 했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뒤늦게 시체를 어떻게 처리한 걸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엄마는 대체 어쩔 생각이지. 거기 두고 와도 되나.

나는 붉은 고깃덩어리에 관심을 보이는 동생 옆에서 엄마의 표정을 읽어 보려 했다. 그러자 네 개의 다리가 다시 수면 밑에서 출렁였다. 아빠의 뒷머리를 악착같이 누르고 있던 엄마가 지금 주방에 있는 엄마로 대치되면서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엄마의 정수리에 몇 올 삐져나온 새치를 보니 또 짠하고 고마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우리를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어떻게든 옹호해 주고 싶었다.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동생과 엄마는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종교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아빠의 강요로 저녁에는 꼭 기도 후에 밥을 먹어야 했다. 기도라기보다는 하루치 자기반성에 가까웠지만.

나는 진지하게 기도하는 엄마의 쭉 뻗은 콧대와 앙다문 입술을 쳐다보았다. 이제껏 한 번도 아빠에게 저항해 본 적 없는 엄마의 현재 기분을 상상하기란 복잡미묘했다. 열 살이라는 나이 차 때문에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아빠가 새벽에 느닷없이 일어나 심부름을 시켜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언제부터 남편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정말 오래도록 계획했다면 복종하는 이미지는 다분히 의도적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태도가 자포자기하는 마음에서 나왔거나 스톡홀름 증후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빠가 죽었는데 아직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없었던 것 같기도 해서 하루 종일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차라리 시신을 화장하고 제대로 된 장례를 치렀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웠을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새벽2시35분이었다. 언제 잠자리를 옮겼는지 침대 위였다. 숨을 들이마시니 공기가 약간 싸늘했다. 나는 한데 밀린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몸을 움츠렸다. 다시 자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시커먼 마당에 주차된 검은색 중형SUV의 윤곽이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저기에 네 명이 타고 있었는데, 돌아올 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차 안의 빈 좌석. 그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죽음의 실체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목도했는데도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그건 사전적 의미로서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체험이었다.

문득, 엄마가 새벽3시 이후로 나오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말을 어기리라는 걸 알고 일부러 말을 흘린 것이었다.

마당에는 전보다 더 강하게 빗줄기가 퍼붓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무수한 화살촉 같았다. 왠지 몸이 싸늘해진 나는 쿠션을 한껏 끌어안았다. 밤에 혼자 불을 다 끄고 공포 영화를 봐도 전혀 무서운 걸 못 느낄 정도로 담력이 좋은 편인데 오늘은 공기조차 스산하고 날카로웠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볼륨을 키웠다.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하지만 기상 캐스터가 말한 건 분명 우리 집 주소였다. 속보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미 다른 화면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나는 메밀 면을 우물거리며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를 다시금 곱씹었다.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구토가 밀려왔다. 나는 개수대에 바로 뱉어 버렸다. 며칠 전 엄마가 마트에서 사 온 거라 유통기한이 짧지도 않은데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민물고기 한 마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물맛이 역했다. 그게 아니라면 계곡 일로 잔뜩 예민해진 내 후각과 미각이 필요 이상으로 반응했을 수도.

내 시선은 자연히 오른편이 아닌 왼편으로 이동했다. 어둠이 내린 흰 벽과 안방, 그리고 다용도실. 나는 그쯤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위화감의 정체가 그곳에 있었다.
방…?
‘왜 방이 하나가 더 있지?’
어두워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방문이 몇 개 있는지는 충분히 육안으로 알 수 있었다. 안방 옆에는 원래 다용도실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똑같은 문고리의 똑같은 무늿결이 있는 낯선 방이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려던 생각을 완전히 잊고 그 방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고 그런 일을 다시 겪는다 해도 처음처럼 놀랄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잠이 들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겠지. 몇 초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저 방문을 열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저 방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닌지 손으로 만져 보고 싶다는 유혹이.

피곤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갑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아침에 깨면 모든 게 다 허상일지 모르는데 굳이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또 다른 나는 문고리를 돌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딱 한 번만 열어 볼까. 안에 뭐가 있는지. 잠겨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잖아….

의식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어느새 내 손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금속이 내 손아귀에서 돌아가는 감촉이 느껴졌고 내 팔 근육이 문을 뒤로 밀기 위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말이지만 완전한 내 의지라고는 볼 수 없었다.

방의 내부는 오싹할 만큼 어둡고 고요했다. 처음에는 물체를 인식할 수도 없었다. 그제야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심장을 내뚫고 올라왔다. 그때, 구석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뭔가가 보였다. 이런 공포감은 처음이어서 몸을 움직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방 안엔 벽에 세워진 침대가 있었고 남자로 보이는 형체는 그 옆에 서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그 형체가 갑자기 뒤를 돌아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내가 뒷걸음질 치다 넘어진 건 그때였다. 나는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사이 뭔가가 내 옆을 쓱 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단순하고도 기나긴 꿈을 꿨다. 장소는 화장실이었고 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에 내 뒷모습이 보였다. 그 뒷모습은 계속 머리를 쓸어 넘겼는데 그건 엄마가 평소에 자주 하던 습관이었다. 내 뒷모습은 엄마의 습관을 그대로 따라 했고 몸엔 여동생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흠흠, 거리며 목을 가다듬는 건 아빠의 습관이었다. 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내 몸뚱어리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네 개로 분리된 것 같은 찝찝한 공포를 느끼다 잠에서 깼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부슬비였다. 그러다 문득 새벽 일이 생각났고 침대를 기어 나와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방문을 열었다. 정면에 보인 건 주방 식탁에 앉아 있는 엄마였다. 평소대로 안경을 쓰고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엄마는 전날 지출한 항목을 다음 날 아침에 가계부에 옮겨 적는 습관이 있었다. 이젠 아빠가 없으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는 듯했다.

엄마는 이런 환각이 되풀이되는 세상에서 침묵과 고독을 떠안은 채 조용히 살아왔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딸이 두 눈으로 직접 그 방을 확인할 날을 기다리면서. 그건 자신의 가족이 죽었을 때만 처음 발현되는 능력이었으니까. 나 역시 아빠의 죽음 이후 ‘새로 생긴 방’을 목격했으니 엄마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 없었다.
세수를 어떻게 한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덜 닦았는지 식탁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치고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 앉은 엄마의 얼굴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오랜 세월 터부시해 온 비밀을 털어놓은 뒤여서인지 어딘가 허탈하고 허무해 보였다.

이곳을 당장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을 때, 맞은편 모서리 벽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에서 주방이 보이지 않게 가려 주는 벽인데 내 키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스튜디오에서 찍은 작은 가족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의자를 빼고 일어나 액자를 향해 걸어갔다. 걷는 동안 내 발소리만 들렸고 액자만이 보였다. 마침내 그걸 확인했을 때, 내 몸은 희뿌연 냉동 창고로 옮겨진 것처럼 급속히 싸늘해졌다.

그 말을 듣는데 머리가 약간 어질했다. 엄마도 저 남자처럼 그 방에서 나왔다는 얘기였으니까. 더군다나 엄마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땐 아빠랑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고, 엄마가 살았던 옛집엔 이미 다른 사람이 나타나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 세계가 무작위로 로테이션되고 있다는 걸 엄마는 그때 처음 깨달은 것이다. 더 무서운 건 그 말이,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모든 비극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졌다. 이 모든 게 전부 사흘도 안 되어 일어난 일들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빠가 죽고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관련 전화를 받은 적도 없고 그날 밤 느닷없이 방 하나가 생겼고 그 안에서 아빠 행세를 하는 남자가 나왔고 엄마는 그 방의 존재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이제 내게도 주어졌다. 이걸 나더러 어떻게 감당하라는 거지?

그러는 동안 내겐 강박이 생겼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엄마와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엄마는 조금은 안정돼 보였고 동생과 나도 전보다는 각자의 생활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이4주째로 접어들었고, 나는 방에서 멍하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날은 우중충한 태양이 공기를 짓눌러 하루 종일 숨 쉬기가 버거웠는데, 오늘은 새벽부터 무거운 빗줄기가 한쪽으로 기운 지붕 위로 내려 집 안 곳곳에 물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떤 길고 축축한 머리카락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다시 창틀에서 내려와 창문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멀리 보이는 하늘은 선명하게 맑았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창밖 세상은 어쩐지 신나 보였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머리 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얼굴에 먹물이 떨어질 것 같은 시커먼 구름 형상이 우리 집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묘한 기시감에 나는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아까부터 마당에 세워 둔 차 뒷좌석에 들어가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펼쳐진 우산 하나가 땅 위에 놓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동생이 들어왔다.
"언니, 창고에서 이상한 소리 못 들었어? 며칠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동생이 말하는 중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방문에 최대한 달라붙어 문을 슬그머니 열었는데, 지저분한 몰골의 남자가 거실에 서 있었다. 남자는 곧 주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온 거지? 열쇠 여분이 창고에 있었나. 만약 있었다 해도 그건 창고를 관리했던 아빠가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마당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야 심각한 상황인 걸 깨달았다. 당연하게도 남자의 손엔 유리 조각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엄마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넌 방에 있어."
동생에게 말한 뒤 바로 문을 열고 달려가 소리를 지르며 통창을 마구 두드렸다. 뒷좌석 시트를 물티슈로 닦고 있던 엄마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고 나는 남자가 뒤에 있다고 소리쳤다. 엄마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남자가 바로 뒤에 있었다. 남자가 다가가 유리 조각으로 엄마의 배를 찔렀다. 나는 그제야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으로 뭔가가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희고 엷은 근무복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얼굴 가까이에 와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눈 부신 불빛이 동공을 어지럽혔고 수술대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 심장이 점점 더 느리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죽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숨을 쉬고 싶어도 심장이 움직이지 않았다. 긴박감 속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고 나중엔 아예 천장에 붙어 버렸다. 세상은 완전히 뒤집혀 수술 도구들이 슬로를 건 것처럼 내 몸 위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나는 점점 더 무의식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무의식은 천국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수술대에 올라 죽음을 감지한 순간부터 내 속에선 어떤 것이 무수히 떨어져 나가고 무수한 어떤 것들이 다시 입혀졌다는 것. 그리고 그 뒤로 엄청나게 피곤하다는 것.

사람들은 언제부터 물고기의 사체를 아무렇지 않게 보게 된 걸까. 인간 세계에서는 일찌감치 살아도 죽은 것처럼 취급받아 왔다. 그렇다고 흰 천을 덮어 보호해 주지도 않는다. 죽기 직전에 괴이하게 몸을 뒤틀며 절박한 춤을 추는 생선의 모습은 인간이 물속에서 죽어 갈 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인간도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래전에 물속에서 호흡이 가능한 생물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렇게 계속 진화했다면 ‘익사’라는 용어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땅 위에서 처참히 죽어 갔겠지.

어느 순간, 마당에 수상한 게 보였다. 물고기 한 마리가 잔디 위를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바깥에서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아주 맑은 태양이 물웅덩이에 비치고 있었다. 죽기 전에 보는 환상 같았다. 물웅덩이에 갇힌 태양은 고민 많은 인간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물속에도 빛이 들어와 우리를 비추었다. 나는 살려고 발버둥 치는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와 동생의 세계는 아주 조용하고 끔찍하게 무너졌다. 어쩌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지옥은 멸망하지 않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동생이 입에서 물거품을 뿜어내며 통창을 마구 두드렸다. 나는 아득해진 시선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햇볕이 싸늘하게 내리비치는 마당에 엄마가 서 있었다. 잔디 위를 헤엄치던 물고기는 온데간데없이 엄마가 그곳에 서서 망연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의 눈동자는 수족관에 있는 신비로운 물고기들을 보듯 반짝거렸다.

그 순간, 나는 어떤 확신에 사로잡혔다. 이 벗어날 수 없는, 정체된 세계는 엄마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지옥의 형상이라는 것을. 신을 잃어버린 자는 신이 된다. 고통을 창조하는 신. 만약 인간의 인생이 신기루에서 부는 한순간의 바람이라면, 그 한순간 불어닥친 바람은 엄마의 마음을 다치게 했고 그 마음은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신기루가 나타나고 사라질 때마다 그 마음은 어김없이 작용했다. 엄마의 손끝이 물을 움직일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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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명문장/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

이번 4.19 참사는 우리 학생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이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 중대 사태다. 이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은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로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불의에는 언제나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적인 왜곡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에 대한 모독이다.
4. 누적된 부패의 부정과 횡포로써 민권을 유린하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초래케 한 현 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속히 물러가라.
5.3.15 선거는 부정 선거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을 재선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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