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비루한 사람들은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무적의 방패 삼아 자신의 분노나 혐오, 질투 같은 감정들을 마구잡이로 배설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솔직하다고 소개하는 사람치고 진짜로 솔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었다.

지저분한 마음에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덧댄다고 냄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례함과 솔직함의 차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무례함은 타인을 상처 내는 데 쓰이지만 솔직함은 오히려 상처를 고백할 때 쓰였다.

솔직함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다. 모두가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방패 삼아 타인을 상처 내고 자신의 상처는 치사하게 숨긴다. 또한 친절한 사람들을 보며 위선자, 겁쟁이, 진짜 속마음마저 숨기는 겁보라고 격하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타인을 상처 냄으로써 내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 상처 따위는 오롯이 책임지며 웃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부러운 건 부럽고, 아픈 건 아프다고 세련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해서 청년들이 얻어야 했던 건 무엇일까. 행복일까. 단언컨대 아니었다. 이들은 단순히 행복한 삶이 아니라 ‘너보다’ ‘걔보다’, 혹은 ‘그보다’ 행복한 삶을 원했다. 우위가 없는 행복은 이들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그건 증명할 수가 없으니까.

분명 승리가 행복이라고 배워왔는데. 세상은 점점 더 승리를 불가능하게 바꿨다. 미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2-04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 남깁니다. 솔직함을 가장해서 상처주는 사람들이 실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굉장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어쩌면 비관적인 사람이다.

하루의 마지막은 그날의 실수를 떠올리는 것으로 마감을 찍는다. 그게 아니라면 어제. 또 그게 아니면 일주일 전에. 그것조차 아니라면… 하고 10년 전의 내 못난 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종류의 인간이다. 이런 내 성격이 좋은 것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이러고 살지 않는 방법을 모를 뿐.

솔직히 말하면 가급적 빠르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삶이 아름답다는 것에는 여전히 동의하지만, 거기서조차 티끌을 찾고 있는 나를 보면 정말이지 골이 터질 것 같다.

세상에는 오답을 너무 잘 알기에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매일같이 불행하고 실패하고 슬프고 우울하기에 반대로 어떻게 살아야 그러지 않을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그게 부정이 가진 힘이라고 믿는다. 부정으로도 긍정을 쌓을 수 있다. 오답을 너무 잘 알면 오히려 정답을 잘 찾아낼 수 있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죽고 싶다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을 뿐. 부정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을 부술 긍정을 찾아내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을 뿐이다. 이른바 합리적 긍정을 말이다.
부정으로도 긍정을 만들 수 있다. 불행하기에 행복이 무엇인지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나는 부정적인 게 아니야.
합리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지."

그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 술 취한 김에 모처럼 나에게도 답을 요구해봤다. "넌 잘하는 게 뭐야?" 회사라는 간판을 떼고 네가 보여줄 실력이 있어? 경력을 제외하고 네게 남은 실력이 뭐야. 진득이 고민해봤지만, "아뇨." 없는 것 같았다. 없는 답도 만들어서 대답해야 할 판에 속도 좋은 놈이었다. 젊음을 제외하고 내게 남은 무기가 무엇인지, 그날의 나는 정의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경력이 아닌 실력으로 말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어떤 사람은 30대에 찾아올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80대에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 시기는 누구에게나 누락 없이 찾아온다. 젊음이라는 말로 애써 덮어왔던 폭력적인 질문과 맞이해야 하는 시기가. 그렇기에 나이가 차오를수록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나 어디 나온 사람이야."라는 텅 빈 허세가 아닌, "나 이거 할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알찬 증명이다.

매번 어물쩍 지나쳐버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린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 갖고 있어야 한다.

멈춤은 정지가 아닌 충전이라는 당연한 논리를 우린 자주 까먹는다. ‘쉬는 건 나중에 하면 돼. 다 끝내고 그때 가서 편히 쉬면 돼’라고 말하지만 알다시피 인생이란 도통 끝이 나질 않는다.
학교가 끝나면 직장이, 직장이 끝나면 가정이, 가정이 끝나면 육아가, 육아가 끝나면 노후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이란 뺑뺑이는 놀이터에 있던 것과는 많이 달라 아무리 기다려도 알아서 멈춰주질 않는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조금 더 억척스러운 삶을 요구한다.

그러나 삶이란 고작 5시간 안에 끝나는 42.195킬로미터짜리 마라톤이 아닌 90년짜리 승부기에, 우린 역설적으로 90%로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적당한 열의로 꾸준히 살아내야 한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으면 정작 뛰어야 할 때 쉬게 된다. 그러니 다 쓰러져가는 나를 위해, 매일같이 지쳐 사는 나를 위해 부디 한 시간에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종을 울려주자. 어린 날의 학교처럼.

지금은 쉬라고.
지금 쉬지 않으면 분명 수업 시간에 졸 거라고.

침대에만 누우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잊고 살던 후회는 눈을 세게 감을수록 더 선명해지고 30분은 자책을 해야 마침표가 찍힌다.

이젠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일까. 오랜 시간 고민해봤지만 생각나는 답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서울에 자가를 보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래보다 능력 있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고 천재는 아니어도 교양만은 넉넉한 30대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오늘은 언제나 부족한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에 차마 내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부족해진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오늘을 살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하는 생각이란 대부분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기에 생각이 많을수록 오늘을 떠나보내기가 힘들어진다고. 그런 이유로 많은 전문의들은 숙면을 위해 생각 좀 그만하라고 처방 노래를 부르지만 도통 그 방법만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간 완벽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 불면을 한순간에 날려줄 위대한 생각만 떠올리면 지금의 문제도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생각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건 ‘더 완벽한 생각’이 아닌 ‘감각’이었다. 생각이 과거와 미래에 머무르는 시간이라면 감각은 온전히 현재를 느끼는 시간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이 우울할 때 타이레놀을 먹으면 효과가 있을까?

놀랍게도 의외로 효과가 있다. 마음의 통증은 신체의 통증과 가늘지만 단단히 연결되어 있기에 진통제로도 소기의 효과는 볼 수 있다고. 물론 임시방편에 불과하겠지만 이 신기한 현상은 한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마음의 무너짐은 신체의 무너짐으로도 연결된다. 물론 반대로도.

충분히 잤는데도 피곤하다면 마음이 지쳐 있다는 증거다. 먹어도 먹어도 텅 빈 허기가 찾아온다면 마음 한구석에 거대한 구멍이 나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 볼 수는 없어도 알 수는 있다.

그간 우린 자신에 대해 너무 과신해왔다. 신체의 나이와 정신의 나이가 동일하게 먹을 거라 착각해왔지만 마음은 죽을 때까지 늙지 않았다. 여든 먹은 노인의 마음조차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린 좀 더 자신의 마음에 따뜻해져야 한다.

충분히 어르고 달래며 먹이고 재워야 한다.
그게 비록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일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는 것은 하나 없는데 뭐든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해내야 한다. 기댈 곳은 없지만 실패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 신입이라니. 사기꾼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 사기 범죄 1위 국가다. 작년 전세 사기 피해자만 10만 5,000명에 달했고 피해자들의 70%는 안타깝게도 사회 초년생들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초년생들의 뇌는 유독 사기꾼들의 기술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은 딱 두 가지 기술로 초년생들의 뇌를 요리했다. 강압적으로 압박하거나, 따뜻하게 위로하거나.

정부는 부랴부랴 전세 사기 특별 수사팀을 구성했고 사기 범죄 형량 강화에 대한 논의도 곳곳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진짜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근본적으로 사기의 난도를 올리는 것. 다시 말해, ‘똑똑한 뉴비를 만드는 것’이다.

‘다 큰 애들한테 그렇게까지 해줘야 돼?’ ‘우리 땐 다 발로 뛰었는데 말이야’ ‘하나하나 알려주면 버릇 나빠져’라고 말하고 싶은 어른들이 수두룩 빽빽일 테지만, 모르는 소리. 요즘 애들이 더 멍청해서 혹은 덜 노력해서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땐 그냥 사기꾼들도 멍청했을 뿐이다.

나 살겠다고 뉴비 등쳐 먹는 짓은 엄중히 단죄하고 어렵사리 물어보면 기분 좋게 알려주고. 쓸 만한 아이템이 있으면 맘씨 좋게 나눠줘야 한다. 당연히 비난의 화살은 뉴비가 아닌 몹쓸 사기꾼과 불법 핵 유저들을 향해야 한다. 그게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우리 고인 물들이 해줘야 하는 일이다.

누구를 위해? 나를 위해.
우리라는 게임의 건강을 위해.

습관적으로 타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작은 실수를 과하게 꼬집고 최대한 망신을 줘 주변의 편견을 조장하는. 그래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우리를 조종하려 드는 사람들이. 이들은 자신의 말에 무너지는 타인의 모습을 보며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데, 가히 일상적 사이코패스라 표현할 만하다.

모든 사이코패스가 살인자가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법에 걸리지 않는 살인을 한다. 몸이 아닌 정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들은 절대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다. 단지 죽고 싶게 만든다. 별 이유는 없다.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전자보다 훨씬 더 섬뜩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토록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나 역시

진짜 사이코패스는 감옥에 있지 않다. 그들은 학교와 회사와 가정과 동호회 안에 있다. 더 섬찟하고 더 똑똑한 모습으로. 그런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도망치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나약해서, 부족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할 때도 있으니까.

물론 누군가는 이런 것도 못 견디는 놈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또 훈계를 놓겠지만, 유명 격투기 선수조차 말하지 않았나.

"칼 든 사람을 어떻게 이겨요. 도망쳐야지."

프로 격투기 선수조차 칼 든 상대에게는 답이 없다.
그리고 세상에는 손보다 입으로 칼을 들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사는 나라다.

한 해 평균 1,900시간을 일하는데도 업무 시간을 더 늘리려는 나라며, 평균 공부 시간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거기다 과로사로만 한 해 500명이 넘게 죽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재수생과 취준생 수는 매년 정점을 찍고, 청년 자살률 또한 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살지만 가장 많은 실패를 하는 나라.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많이 건네는 말은 이렇다.

"누칼협?"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살라고 칼 들고 협박함?

절망이 넘치는 시대, 우린 좀 더 운의 힘을 믿어야 한다. 최선의 선택을 하고 최선의 노력을 해도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당연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한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네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좀 더 넉넉하게 건넬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핑곗거리가 아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기 위해.

사람은 나이를 하나 먹을 때마다 타고난 표정 하나씩을 잃는다고 한다. 웃음, 행복, 만족, 기쁨. 신기하게도 맑은 표정부터 잃게 되는 우리는 짜증으로 일관되다 결국 무표정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고.

그래서 웃음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웃음이 행복이, 모래 위 글씨처럼 인생이란 파도에 쓸려가기 전에 습관을 만들고 몸에 배게 해야 한다. 화밖에 남지 않은 얼굴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지는 않다. 끝까지 삶에 웃어 보이고 싶다.

‘인생은 원래 차가운 거야’라는 멍청한 생각 때문에 다 잊어버린 즐거움이었다. 언제부터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렸던 걸까.

문득 냉소했던 어느 코미디언의 말이 떠올라 피식한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겁니다."
나도 조금은 밝아질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은 단연 ‘관심’일 것이다.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등. SNS에서는 매초 단위로 타인의 소식이 올라오고 그 속에서 관심을 얻기 위해 우린 더더욱 희소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명품은 그를 위한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명품에는 설득이 필요 없다. 사진이면 한 컷이면 간단하게 세상에 선포된다. "지금 이 순간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모든 인생이 그렇듯 극강의 편리는 항상 극강의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내 얼굴은 어딘가 찌그러졌지만 나름 귀엽고, 돈까스는 오마카세보다 열 배는 저렴하지만 질리지 않아요.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우연히 빈자리도 발견했어요. 그게 내 인생이더라고요. 생각보다 괜찮은 내 인생.
물론 요즘도 주로 불행해요. 친구들의 SNS를 보며 왜 내 인생만 이런가 뱃속이 자주 뒤집히기도 하죠. 그래도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다짐해요.

오늘도 내 인생에는 비가 많이 내릴 거야.
하지만 말야,
나는 그 속에서도 춤출 줄 아는 사람이지."

말투에는 그 사람이 가진 온도가 드러난다.

자신과 맞지 않는 취향에 ‘이상하다’라는 말로 거리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특하다’라는 말로 포용하는 사람이 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우린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체온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를 떠나 무엇이 더 따뜻한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번 해볼까?’ 해보지 않은 것에 섣부른 마침표를 찍지 않고 꾸준히 물음표를 던지는 그들을 보며 나는 내 인생에서도 아직 할 것이 남아 있다는 기대감을 느낀다. 삶에 쉽게 담쌓지 않겠다는 의지를 또 한 번 불태우게 된다.

사람의 말에는 그가 가진 참 많은 것들이 드러난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고 해석하고 결론짓는지는 의외로 내가 평소 쓰는 말투에 담겨 있다. 마치 어릴 적 방학 숙제로 해간 양파 실험처럼 좋은 말, 예쁜 말을 더 많이 듣고 뱉은 나일수록 마음의 크기 역시 잘 자라게 됐다. 예쁘게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예쁜 말을 써야 했다.

삶을 예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사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25년 전 초등학생 때의 내가 양파에게 해준 것처럼 나를 속이고 또 달랠 것이다.

"걱정 마, 오늘도 멋진 일이 일어날 거야."
그렇게 내 세상은 조금 더 예뻐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야흐로 대 혐오 시대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내려 치는 게 당연해진 사회.

분명 혐오는 돈도 되고 어그로도 잘 끌린다. 그런데 본원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자존감. 그렇다. 지겹지만 또 자존감 얘기다. 다만 조금은 다른.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 자존감을 검색하면 이런 뜻이 나온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믿음.’ 풀이에서 알 수 있듯 자존감에서 의외로 중요한 건 남이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냐 없냐는 안타깝게도 타인의 평가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 사회는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한 난도가 S랭크인 곳이다.
다시 말해 누구든 나를 우쭈쭈 하며 올려줘야 차오르는 것이 자존감의 실제 모습인데, 아무도 그래주지 않으니 답은 한 가지인 것이다. 남을 내려 치는 것.

‘우리 서로를 그냥 좀 내버려두자.’

사람을 미워하는 데도 체력이 든다. 시간도 들고 감정도 들며 때때로 큰돈도 든다. 모두 이득 없이 낭비하기엔 너무도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린 서로를 좀 더 내버려둬야 한다. 사랑은 아니어도 "넌 그렇구나" 정도의 건조한 존중은 보내줘야 한다. 또 모른다. 혐오가 혐오를 부르듯 존중이 존중을 불러올지도.

해소되지 않은 기분은 성격이 된다. 작은 짜증으로 시작된 기분은 일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속속들이 헤쳐 모여 결국 더러운 성격으로 완성된다. 어떤 성격으로 살고 싶은지는 빼곡히 적은 새해 다짐이 아니라 일상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달려 있었다.

내일도 내 세상에는 수많은 짜증이 튀어나올 것이다. 날 선 댓글과 혐오 섞인 기사, 그리고 어깨를 툭 치며 새치기를 하는 성격 급한 할머니까지. 내 하루를 망칠 분노는 꼭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 튀어나와 나를 시험할 것이다. 이래도 화를 안 낼 거냐고. 하지만 그건 내 성격이 아니다. 잠깐의 기분이다.

언제든 화가 날 순 있지만, 언제나 화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 있다’라는 방패 같은 말로 남이 아닌 나의 기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될 것이다. 기분이 성격이 되지 않게.

자기 충족적 예언의 사전적 정의란 이렇다. 특정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버리면 그에 맞게 내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다시 말해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겸손은 미덕이다. 지나친 자신감은 재수 없음과 동의어고 실패했을 때 실망할 것을 대비해 스스로에게 부단히도 이 말을 세뇌시킨다. "어차피 안 될 거야." 물론 그 말들은 실제로 추락했을 때의 아픔을 덜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날개마저 빼앗아갔다.

말에는 분명 힘이 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은 머리 위의 천장이 되어 우리의 한계를 정의 내리는 굳건한 벽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한다. 남에게 잘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나에게도 꼼꼼히, 계산적으로 잘해야 한다.
말 한마디로 모든 게 변하진 않겠지만 말 한마디로 내 마음만은 바꿀 수 있으니까. 포기가 도전이 되고 한계가 가능성이 되고 겸손이 자신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줘야 하는 말 역시 그런 것 아닐까. 지독히도 열심히 달려온 스스로의 허파에 바람 좀 팽팽하게 넣어줘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노력을 좀 더 믿어보자.
열심히 해온 스스로에게 조금 더 큰 가능성을 쥐여주자.

우린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다.

창피해서. 무서워서. 인정하기 싫어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우린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프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언제나 가장 먼저 아프지 않은 척을 한다. 고통의 크기보다 인증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우릴 더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진짜 건강한 사람이란, 튼튼한 인간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올 때 가장 먼저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더 아프기 전에 얼른 병원부터 가자."

우리 좀 더 자주 아프자. 그리고 빠르게 낫자.

아프지 않기보다는
빠르게 나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 할머니는 매번 이 말만 거듭하다 결국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든 아흔일곱 살이 되어버렸다. 짜증이 났다. 너무 늦어버린 내 효도와 그것조차 기다려주지 않은 할머니의 야속한 세월에 화가 나 입을 콱 닫아버렸다. 그 표정이 눈에 밟혀서인지 할머니는 평소답지 않게 긴 말을 이었다.

"얘, 너 늙으면 젤루 억울한 게 뭔지 아냐?" 나는 할머니를 동그랗게 쳐다봤다.

"주름? 아냐. 돈? 그거 좋지. 근데 그것도 아냐. 할미가 젤루 억울한 건 나는 언제 한번 놀아보나 그것만 보고 살았는데, 지랄. 이제 좀 놀아볼라치니 다 늙어버렸다. 야야, 나는 마지막에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인 줄 알았다.

근데 자주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이었어.

그러니까 인생 너무 아끼고 살진 말어. 꽃놀이도 꼬박꼬박 댕기고. 이제 보니 웃음이란 것은 미루면 돈처럼 쌓이는 게 아니라 더 사라지더라."

희생은 아름답지만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우린 참고 억누르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라 배워왔지만, 사실 아무도 자신의 자식마저 그런 인생을 살길 바라지는 않는다. 어른이란 자신을 가장 먼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까지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올해는 나를 위해 지갑을 열 것이다. 장바구니 맨 아래로 밀린 소설책 한 권을 살 것이다. 그리고 맨 앞 장에 적을 것이다.

"미루다 보면 잊는 법이야."
나도 조금은 멋들어진 어른이 되고 싶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해본 것이 언제일까. 어릴 때는 했었나. 안 했던 것 같은데. 행복이란 말은 어딘가 쉬워지면 안 될 것 같아 아끼고 또 아꼈다. 즐거움만으로는 부족했다. 짜릿함도 아쉽고 뿌듯함 역시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머리에 폭죽이 터지는 순간이 아닌 이상 행복이라는 단어는 감히 쓸 수 없었다. 참아온 세월이 얼만데. 겨우 이 정도가 행복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무미건조했다. 솔직히 꽤 인상적인 순간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명명되지 않는 순간들은 조금씩 퇴색되어 그저 그런 기억들로 퉁쳐졌다. 부끄러워하다 보니 무뚝뚝해진 그 옛날의 아버지들처럼 나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메말라가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핑크빛이고, 나는 이제 안다.
행복은 선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