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1소리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뚜다려 보오.그래 봐도후~~~기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가슴2불 꺼진 화독을안고 도는 겨울범은 깊었다.재만 남은 가슴이문풍지 소리에 떤다.
눈지난밤에눈이 소오복이 왔네지붕이랑길이랑 밭이랑추워한다고덮어주는 이불인가봐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계선편제1장착한 일늘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이에 보답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이에 보답한다.
068. 문화/소작제
동아시아는 토지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동아시아 전체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는 곧 부의 근원이었다. 따라서 귀족이나 세도가가 갖은 기회를 이용해 토질를 넓혔다. 획득한 토지는 농민들을 고용해 경영을 맡겼는데, 이를 소작제도라고 불렀다.자신의 농토를 경작한 농민은 국가에 내는 세금의 세율이 10%를 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남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면 생산량의 50% 이상을 바쳐야 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귀족이나 세도가는 더 풍요로워지고 소작농은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족이나 세도가는 더욱 토지를 늘려갈 것이고 극단적인 경우에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노비가 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사상가 맹자는 ‘정전제’를 주장했다.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토지를 공정하게 나눠 여덟 가구에게 나눠주고 한 구역은 공동으로 경작해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지는 생각이다. 이렇게 운영하면 합리적인 조세 수취와 농민들의 안정적인 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고 봤다. 정전제는 맹자 개인의 주장이 아닌 중국 고대 국가의 이상적인 경제 개혁안이기도 했다.고려, 조선 시대 때도 소작제가 문제가 심각했다. 특히 고려 농민들은 ‘송곳 꽃을 땅도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파는 과전법을 단행해 소작 제도를 일정 정도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조선 중기 소작제 문제는 다시 대두된다. 양반 지배 체제가 확립되면서 지배층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광범위해지고 국가가 이 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생산량의 50%를 떼어가는 것을 넘어 보릿고개 때 쌀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취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추수 때 지주가 70~80%를 수취하는 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일제 강점기 때 더욱 심각해진다.
59p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행운, 유산, 학력이 부자가 되게 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란 근면, 인내, 계획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라이프스타일의 결과물이다.˝물통나르기는 결국 마르기 때문에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 말은 일을 하지 못하면 수입이 끊어지므로 물통이 작을수록 파이프라인은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지속적으로 수익이 발생하는 이 파이프라인을 잘 구축하면 누구나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데 숙제로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행운, 유산, 학력이 부자가 되게 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란 근면, 인내, 계획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라이프스타일의 결과물이다."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내 선택이다."
"현재를 살되 미래를 계획하라!"
"세상에 그 무엇도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