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에서 잠이 부족한 상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본격적인 ‘만성 수면 부족의 시대’가 열린 것은 불과 100여 년 전,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부터다. 그 이전까지 인간의 생활은 비교적 단순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잠에서 깨고,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질서였다. 그러나 전구가 발명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적인 일주기日週期(약 24시간 주기로 생체 시계가 수면·각성, 체온, 호르몬 등을 조절하는 현상) 리듬에서 벗어나 인공적인 빛 아래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하며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잠들지 않는 세상이 완성되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자극을 소비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 뇌는 밤이 되어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환경에 놓이고 말았다. 그 결과 인류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수십만 년 동안 유지해온 수면 패턴이 완전히 뒤흔들리는 상황에 처했다.

수면이 부족한 상황에서 혈중 코르티솔 수치가 높아지면, 열량이 높은 단맛과 기름진 맛에 대한 선호가 뚜렷해진다. 여기서 단맛은 주로 탄수화물을, 기름진 맛은 지방을 의미한다. 탄수화물은 식량이 부족할 때 근육과 뇌가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빠른 에너지원이며, 지방은 적은 양으로도 많은 열량을 제공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연료다. 과거에는 이러한 선택이 매우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그러나 음식이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는 이 본능이 달고 기름진 초가공식품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지며, 체중 증가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수면 부족은 단지 ‘조금 더 피곤한 상태’가 아니다. 뇌의 판단 저울을 고장 내고, 식욕을 바꾸며, 나아가 지방이 쌓이는 위치와 방식까지 바꾸어버리는 강력한 대사 교란 상태다.

왜 수면이 부족할 때 내장지방이 늘어나는 걸까? 그것은 내장에 위치한 지방세포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잠이 부족해 몸이 피로한 상태에서는 코르티솔 분비가 증가하는데, 코르티솔이 만성적으로 높게 유지될 경우, 면역 체계를 교란해 염증 조절 능력을 떨어뜨리고 내장지방을 늘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간헐적 단식을 활용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수면과 생체 리듬, 근육량과 식단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단식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 사이에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까지 포함해 전체적인 대사 설계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설계의 바탕에는 수면이 있다. 잘 자지 못하는 몸은 아무리 좋은 식단 전략을 시도해도 성공시키기 어렵다.

초가공식품이 넘쳐나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스트레스 자극이 끊이지 않는 지금 같은 환경에서는 이 생체 시계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몸이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동안에는 그 문제를 잘 느끼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수면과 리듬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다이어트와 대사 관리에 분명한 한계가 생긴다. 같은 식단과 운동을 해도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가공식품에 의존하는 악순환은 개인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스트레스는 지속되고, 자극적인 음식은 지나치게 쉽게 접근 가능하며, 그 보상은 매우 강하게 설계된, 현대사회의 구조적 결과에 가깝다. 이런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의지로 참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혼자 뛰라는 말과 같다.
이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왜 나는 먹는 것을 참지 못할까?"가 아니라 "감정을 음식에 기대게 만드는 이 구조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라고 물어야 한다. 핵심은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 아닌 다른 것으로 나를 진정시킬 방법을 뇌가 다시 배우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참아라"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리듬과 방식을 찾는 것. 그것이 결국 살찌지 않는 몸으로 가는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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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은 단순히 ‘많이 먹어서 살이 찐 상태’가 아니다. 오늘날 비만의 상당 부분은 사회·환경적 요인과 구조화된 생활 패턴이 몸의 대사와 뇌의 보상 체계를 왜곡한 결과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만을 개인의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으로 치부하며, 비만인을 향한 낙인과 편견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비만은 타고난 체질도,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비만 환경 속에서 살더라도, 사람에 따라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은 조금씩 다르다.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살이 찌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신체 활동이 줄어들며 문제가 생기는 사람도 있다. 또 수면과 스트레스 관리가 잘못되어 비만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한 채 하나의 정답을 강요한다면, 변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한 다이어트는 결핍을 견뎌내는 일이 아니라, 웰니스wellness 상태로 이동해 가는 과정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웰니스가 있으며, 그것은 극단적인 금욕과 통제되지 않는 탐닉 사이, 이른바 ‘건강한 변동성’ 안에 존재한다. 이 변동성이 회복되면 몸에는 대사적 유연성이 생긴다. 가끔 자극적인 음식을 먹거나 폭식하는 날이 있더라도, 다시 자연스럽게 일상의 리듬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체중의 설정값이 정상화되면 살은 의지로 붙잡지 않아도 빠지고, 그 상태가 무리 없이 유지된다. 일상은 한결 가벼워지고, 삶의 즐거움은 오히려 더 커진다.

직장에서도 비만인은 보이지 않는 차별에 자주 직면한다. 연구에 따르면, 같은 조건을 갖춘 지원자라 하더라도 비만 여성은 동일한 면접 기회를 얻기 위해 37퍼센트 더 많은 이력서를 보내야 한다.10 승진이나 연봉 협상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경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낙인과 차별이 반복될수록 자존감은 점점 떨어지고, 이는 다시 비만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만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덜 먹고 많이 움직여라"라는 조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사실상 이런 말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 식생활·수면·스트레스·활동량 등 여러 생활 영역을 함께 조정하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이 다이어트를 의지의 문제로 생각한다.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 끝까지 버틸 수 있느냐의 싸움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수년간 비만과 대사 질환 환자들을 상담하고 진료하며 내가 반복해서 확인한 사실이 있다. 체중 감량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얼마나 의지가 있느냐’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상태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느냐’이다. 성공적인 다이어트란 의지를 가지고 버티는 과정이 아니라, 의지로 버티지 않아도 되도록 생활 구조를 바꾸는 과정에 가깝다.

비만은 더 이상 개인이 혼자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과다한 초가공식품, 신체 활동의 감소,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같은 환경적 요인들이 비만의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비만이 환경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희망이 되기도 한다. 환경과 생활 습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전략으로 접근한다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 건강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현재 자신의 상태와 맞지 않는 순서로 적용하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음식에 대한 욕구가 이미 왜곡된 사람에게 식사량부터 줄이는 방식은 실패로 돌아가기 쉽고, 수면과 스트레스 관리가 무너진 상태에서 절식을 먼저 시작하면 오히려 폭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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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명상, 마음 챙김을 통한 내면 정화가 일어나야 우리 마음이 변하게 된다. 우리 마음에는 내면의 숲, 이너포레스트가 존재한다. 그 숲이 긍정으로 채색되어야 한다. 풍요로 채워지고, 감사로 물들어야 한다. 그때 이 마음이 또 다른 세상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변화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무의식의 밭에 뿌려진 생각의 씨앗이 싹이 트고, 가지를 뻗어, 열매 맺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보통 7~8년 이상이다.

깨달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경험을 통한 지식의 체득 과정에서 몸으로 느끼고 마음에 각인될 때 나타난다. 마음의 자각은 ‘아, 그렇구나’의 순간이다. 그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頓悟)’다. 문득 알게 된 깨달음에 마음이 설렌다. 지혜의 지식이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기억하며 이제는 그 자각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체득된 지혜를 쌓아가는 과정, 그 증득의 과정이 바로 마음 공부다. ‘점수(漸修)’의 시간은 이 기간을 통해 쌓이게 된다. 머리로 취득한 지식을, 몸으로 체득하며, 마음에 증득하는 시간이 수행이다. 그렇게 마음에 쌓은 무의식의 씨앗이 시간을 지나 내면의 숲을 이루고, 그 숲에 부는 바람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의 생각, 감정, 느낌은 이 바람에서 시작한다. 마음의 숲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풍요로 채워지고, 감사로 물들 때, 우리에게 긍정의 생각, 풍요의 감정, 감사의 느낌이 나타나게 된다.

마음의 풍요가 현실의 풍족을 떠오르게 한다. ‘떠오르는 것’, 그걸 우리는 부유라고 한다.

철 속의 공기가 배를 부유(浮遊)하듯 마음의 무의식이 나를 부유(富裕)하게 한다.

부유한 삶은 마음의 풍요가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내면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이너포레스트를 풍요로 채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지구별 여행의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마음의 풍요, 그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에너지가 우리를 최고의 부자로 떠오르게 한다. 그것이 바로 부력(富力)이다.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이거다. 사는 이유는 없다. 그냥 살고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났으니 그냥 살고 있다. 그러다 죽음이 찾아오면 별 이유 없이 죽는 것이다. 죽는 이유가 없듯이 사는 이유도 없다.
지금 자신의 손을 보라. 손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악수하기 위해서? 밥 먹기 위해서? 글쓰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 손은 그냥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악수하려고 손이 있는 게 아니다. 숟가락 때문도 아니고, 펜 때문도 아니다. 그냥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사는 것도 똑같다. 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내가 부여할 수 있다. 나는 그 삶을 행복으로 채우려 한다. 행복하게 사는 게 내 삶의 의미와 가치다. 그리고 그 행복한 삶을 위해 나는 풍요를 추구하고, 감사와 함께한다. 풍요를 통해 세상에 나눔을 실천하고, 감사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why’ 없는 삶에 ‘how’의 가치를 담고 있다.

존재가 이유를 선행한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기에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손은 있으니까 있는 것처럼, 삶은 생존하기에 있는 것이다. 죽음의 인연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다하게 된다. 그러니 사는 이유를 찾을 시간에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고민해보라.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경험이고, 경험은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 그 경험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에 감사하고, 즐겁게 말하고, 행복하게 지내보자. 그러면 알게 된다.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있다는 단순한 기적과 볼 수 있다는 황홀한 축복,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움에 감사하며 세상을 바라보자. 행복으로 물든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구는 46억 년째 돌고 있다. 고작 100년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자.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산다. 그 여생의 기간이 다르고, 선고를 받지 않은 것의 차이일 뿐이다.

누구나 죽음은 무섭고, 허망하다. 그래서 죽음은 떠올리기 싫고, 입에 담기도 무서운 단어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엄마의 죽음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죽음은 단어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있었다. 두려움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삶에 가장 두려운 존재가 죽음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생이 짧다는 것은 이야기가 짧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우는 것, 나의 언어로, 나의 문장으로 나의 스토리로 채우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건 시간의 길이와 무관하다. 하루를 살면서 100개의 스토리를 채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일을 살면서 하나의 이야기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삶의 차이고, 더 정확히는 삶의 속도 차이다.

가난한 삶은 없다. 삶에 대한 해석이 가난할 뿐이다. 괴로운 삶은 없다. 삶을 괴롭게 분별하기에 그런 시간을 보낼 뿐이다.

삶이 한 편의 영화임을 알 때, 우리는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우리가 그 영화의 감독이고, 그 영화의 비평가며, 그 영화의 관객이다. 세상은 사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텅 빈 스크린은 영화에 물들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만든 영화가 그 위에 방영되고,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그러니 너무 무겁게 살지 말자. 가볍고 즐겁게 살자. 우리 영화 보러 갈 때 즐거운 마음으로 간다. 우리 꿈꿀 때 진지하게 꿈꾸지 않는다. 즐겁게 영화를 보고 가볍게 꿈을 꾼다. 그렇게 살자. 그것이 우리 삶이고, 우리 인생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여기에서 온다.

우리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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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픈 지금은 현실이 만드는 게 아니다. 내가 괴로운 오늘도 세상이 만드는 게 아니다. 상황은 통증만 만들 뿐이다. 괴로움은 내가 만들고 있다. 통증을 괴로움으로 확대하지 마라.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줄어든다. 그 흘러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만이다. 그러니 스스로 괴롭히는 이 무지에서 벗어나자.

그러니 꼭 ‘3그’의 진통제를 들고 다니자. ‘응, 아프구나.’ ‘그럴 수 있다.’ ‘뭐 그래라 그래.’ 통증은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통증을 괴로움으로 확대하지 말자.

나는 인생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선택할 것이다. 그때의 가난이 미래의 부를 예언하고 있었다. 가난한 현실은 풍족한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가난 속에서 풍요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을 인식하며 살 때, 그 마음의 인식이 미래의 부를 부른다. 늘 이야기하듯, 인식이 존재를 부르고, 일체유심조는 세상이 굴러가는 가장 본질적 진리다.
가난이 부의 예언자인 이유다. 예언을 하는 것은 쉽다. 로또 예언도 어렵지 않다. 일주일 먼저 존재하면 된다. 간단하다. 그래서 예언은 선행을 의미한다. 내 삶의 가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가난은 내게 먼저 와주었다. 그 가난이 미래의 부를 인식하고 그 인식을 통해 풍족한 지금을 만들고 있다. 내 마음이 풍요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씨앗이 열매가 되기 위해 우리는 씨앗을 뿌려야 하고, 물을 뿌리고, 기다리면 된다. 씨앗이 발아하는지에 집착해서 매일 흙을 파게 될 때,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열매에 대한 집착, 당첨에 대한 집착은 흙을 파게 되지만, 어차피 잘될 거라는 앎은 감사의 말과 풍요의 행위라는 물을 붓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당첨의 열매는 내 삶에 깃들어 있다.

대출은 레버리지가 아니다. 대출은 레버(lever)다. 레버는 막대기에 해당하고, 레버리지는 그 막대기를 이용한 힘, 지렛대의 원리에 해당한다. 지렛대를 이용해 지렛대보다 훨씬 큰 바위를 움직이듯, 대출을 이용해 자신의 자산보다 더 큰 부동산을 소유하는 게 레버리지다. 그것이 지렛대 효과다.

우리는 ‘늘’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항상’ 소유할 수는 있다. 그건 소유에 대한 앎이 생겼을 가능하다. 바로 ‘지금 여기’에 대한 소유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머무를 수 있다. 항상 ‘여기’에 머무를 때, 늘 ‘지금’을 소유하게 된다. 나머지는 가짜고, 렌털이고, 기억일 뿐이다.
과거 ‘100미터 14초’를 아쉬워하고, 미래에 ‘달리기를 못 할 자신’을 불안해하지 마라. 그건 시간 여행일 뿐이다. 시간 여행은 불평, 불만, 불안만 야기한다. 과거를 불평하고, 현재에 불만족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하는 시간 낭비다. 시간을 여행 말고 지금에 머물러라. 여기에 현존해라. 그러면 알게 된다. 여기는 진짜고, 지금은 소유고, 현존은 알아차림이다. 그것이 우리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현실의 화살을 맞고 아픔이 발생했다. 그 아픔을 스스로 확장해서, ‘나는 아프다’로 규정하지 마라. 자신을 해치는 길이다.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할 때, 그는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나를 아프게 할 때, 그건 어리석은 사람이다. 스스로 화살을 만들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무지가 습관이 되고, 그 습관 속에서 나는 화살 제조 전문가가 되고 있다.

삶은 우연이고 인생은 운이다. 삶은 내가 만든 운이 우연을 가장한 인연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인연 속에 살아간다.

가난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가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가난을 품고 있는 풍요’를 알아차릴 때, 가난은 초라한 것이 아니다. 가난은 결핍이고, 결핍은 뭔가를 채우는 행위로 표현된다. 돈을 버는 것은 돈을 채우는 행위고, 그것의 바탕에는 내면의 결핍이 있다. 돈을 쫓는 시간 속에 마음의 결핍은 더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기부와 헌금을 실천할 때, 마음의 방향은 전혀 달라진다. 기부는 돈을 나누는 것이고, 나누는 것은 뭔가로 채워져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 나눔이 내면을 풍요로 물들인다. 가난 속에서 봉사를 하고, 궁핍 속에서 베풂을 실천할 때, 가난은 인색이 아닌 풍요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당당한 가난은 나의 스토리가 되고, 풍족한 미래의 전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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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에 집착이 더해지면 욕망이 된다. 식욕은 일종의 욕구다. 그 식욕에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비싼 것의 집착이 붙으면 식욕은 욕망이 된다. 욕망의 전제는 비교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자주 먹고픈 욕망이 우리의 식욕이 된다. 그 식욕은 식탐이 되어 나의 만족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먹는 과정을 밟는다. 그 시간 속에서 다이어트는 희망 고문이 된다. 식탐을 충족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먹은 것을 토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은 허기진 배를 또다시 욕망과 탐욕으로 채우게 된다.

인생은 과정을 시간으로 적분하는 삶이다. 한 방의 성공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과정을 쌓아가는, 오늘을 조정하는 즐거움이 우리 추억으로 남는다. 그것이 삶인 거다. 우리 삶은 과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즐거운 조정으로 채워 나갈 때, 어느 순간 여러분의 손에 빛나는 공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공을 보며 웃고 있을 여러분을 발견할 것이다. 씨익 웃고 있을 당신의 미소를 기대한다.

우리 삶에서도 안개를 만날 때가 있다. 부정적 감정을 만날 때다. 분노, 화, 시기, 질투, 무시, 열등감, 고통, 괴로움 등이다. 이런 감정이 나타날 때,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다. 허용하거나, 억누르거나. 부정적 감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기꺼이 안개 구간을 지나겠다는 얘기다. 비상등을 켜고 두려움 속에 그 곳을 지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안개는 사라진다. 허용하면 흘러간다. 안개가 사라지듯, 부정적 감정도 어느새 가라앉는다.

기도는 나와 내 무의식과의 연결이다. 그 연결 속에서 마음이 주는 현실을 허용하는 시간이다. 그 감사한 허용 속에서 오늘을 개즐소충하려는 나의 다짐이 기도다. 감사의 허용을 통해 내 마음이 감사로 물들고 있다. 그러면 나는 안다. ‘아 곧 감사와 함께 할 삶을 선물로 받겠구나.’
감사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그 시간 속에서 세상이 원하는 결과와 이어지게 된다. 그 세상이 나의 마음이며, 내 마음을 감사로 물들임이 바로 Pray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라며 혼자 떠들며 노는 것은 Play다. 그러니 기복하며 혼자 놀지(play) 말고, 내 마음과 교감(pray)하며 감사하자. 그 감사의 시간이 기도의 축복이다.

명상하면 달라진다. 그 달라짐이 일상이 될 때, 삶은 이미 변해 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두 사람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인간이 된다. 사람에서 인간으로의 전환은 이 명상을 통해서다. 인간은 사람 인(人), 사이 간(間) 이다. 사람의 사이가 인간이라는 말은 두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한 명의 나와 또 다른 나를 의미한다. 두 명으로 사는 삶, 명상의 삶이다. 더 건강하게, 더 행복하게, 더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나의 방식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듯이, 혼자 살 때보다 둘이 살 때가 외롭지도 않고 더 즐겁다. 세상을 보는 나와, 그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사람과 사띠(알아차림)의 동행이 명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이어트의 성공을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시작,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을 통한 알아차림, 그 시간 속에서 우리의 매일은 생일이 된다. 우리는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
Happy Birthday to me.

우리는 생각을 쓰면서 살아야 한다. 생각은 도구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도구가 생각이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것이지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에 세뇌되어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사유한다, 고로 행복하다’가 맞는 말이다. 부정 중독에서 벗어난 삶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생각은 쓰는 것이다. 그때 우린 행복해진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생각이 있다. 첫 번째 생각은 잡생각(Thought)이다. 그냥 마음이 떠올린 생각이다.

두 번째 생각은 내 생각(Being a thought)이다. 떠오른 생각과 하나가 된 상태다.

세 번째 생각이 알아차림(Think a thought)이다. 떠오른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사유하는 거다. 부정적 생각을 바라보고, 그 부정성을 허용할 수 있는 긍정적 사유는 이때 생긴다. 삶의 긍정성, 긍정적 사고는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현실이 힘들고 괴로워도, 우리는 그렇게 살 이유가 없다. 세상은 나의 해석일 뿐이다. 부정적인 현실이 떠올라도, 그 생각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때 우리의 사유는 곧 나만의 관점이 된다. 그 관점은 세상을 긍정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이 전혀 다른 인생 영화를 만든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며 살아야 한다. 멍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며 지내야 한다. 명상이 일상인 이유는 이 알아차림 속에서 매일을 살기 때문이다.

세상은 소모품이고 삶은 렌털이다.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부모와 가족은 늘 나의 가족이었다. ‘나의’라는 소유격이 그들을 나의 소유로 만들었다. 언어가 가진 마법이다. 우린 언어를 통해 세상에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인식이 그런 세상을 펼쳐낸다.

모든 과정 속에는 ‘나’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사실 ‘나의 사랑’이다.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남편이든 부인이든 똑같다. 그러니 꼭 기억하자. 헤어짐은 고마움 속에서 하는 거다. 그것은 만남의 시간 속에서 이기적 사랑을 한 내가 상대에게 전하는 마지막 고마움이다. 사실 이 고마움도 그 기저에는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고, 모든 인류는 마음의 밑바탕에 이기심을 깔고 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늘 이기적 사랑과 나를 위한 이별을 한다. 그러니 마지막은 꼭 상대에 대한 감사로 끝맺자. 그것이 예의다.

G는 Gratitude, 감사함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세상의 선물을 받고 자란다. 부모와 세상의 보호 속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성장한다. 그 모든 것들은 나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되고, 경험이 되고, 선물이 된다. 그 선물의 감사함 속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일정 나이가 되면, 이제 그 선물을 다시 세상에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늘 받기만 하던 미성년에서, 이제는 세상에게 선물을 되돌려주는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는 거다. 그 기부와 봉사 속에서 더 큰 선물을 받게 된다. 그것이 감사와 함께 하는 삶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kidult)’는 그 ‘대상’의 삶을 스무 살이 넘어서도 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SNS를 통해 나를 봐 달라고, 자신을 인정해 달라고, 나에게 관심을 달라고 하는 거다. 신체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스스로의 존재로 살아가는 어른은 아니다. 어른이 아닌 어른이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성인이다. 어른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살아간다. 칭찬받지 않고, 칭찬을 주고 있으며, 관심의 대상이 아닌 관심의 주체다. 사랑받기 위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랑을 주는 사람이 어른이다. 그래서 어른은 기브(give)하고 있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가 따라온다. 후회 없는 선택은 없다. 하지만 그 후회를 긍정할 수 있는 알아차림이 있으면 후회는 또 다른 경험이 된다. 혼자 살 때는 그 삶의 긍정과 부정이 있고, 결혼을 하면 결혼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과 불행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부정 없는 싱글을 원하고, 불행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원한다. 혼자 살 때는 외로움이 없어야 하고, 같이 살 때는 괴로움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싱글 생활은 힘들고, 결혼 생활도 두렵다. 삶의 부정성을 껴안으려는 책임감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나이보다 에이지가 중요하다. 그 에이지를,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성인이 되고, 가장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은 괴롭지만, 어른은 행복하다. 알아차림이 있어서다. 성인은 이기적이지만, 어른은 이타적이다. 이타를 통해 이타와 이기를 동시에 누리는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 속에서 살아간다. 감사를 주고받으며,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채색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웃고 있다. 알아차림과 감사, 그리고 또 다른 감사의 경험이 그들에게 미소를 선물한다. 세상의 선물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다. 그것이 여러분이었으면 좋겠다. 성인이 아닌, 중년도, 장년도, 노인도 아닌 어른의 삶, 그것이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진다. 탄생했기에 소멸한다. 그래서 소멸은 탄생을 전제로 한다. 나타난 것은 무조건 사라진다. 그래서 만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나타나고,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하고, 사라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세상 만물이다. 세상이 생주이멸할 때,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한다. 인간도 ‘사’를 통해 소멸한다. 그 소멸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는 누구나 슬픔을 느낀다. 그 속에는 두려움도 함께한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예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슬픔이지만 나에게 괴로움은 아니다. 그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GE의 A는 Awareness, 알아차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관찰하면서, 내가 어른의 자존감이 있는지, 내 마음이 상처받은 사춘기 아이로만 채워져 있지 않은지, 내가 어떤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는지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알 때, 우리는 스스로 변할 수 있다. 성인과 어른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어른은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지만, 성인은 그 앎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남을 통해서 확인하려 한다. 스스로의 앎이 없기에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세우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자신의 생각이 아닌 세상의 상식 속에 스스로를 가두려 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감각,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앎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어른의 기본이다.

마지막 E는 Experience, 경험이다. 우리의 삶은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기억에 감정이 담길 때, 기억은 추억이 된다. 이 추억은 하나의 경험으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다. 그 각인된 씨앗이 내면의 숲이 되어 늘 나와 함께하고 있다. 인생의 좋은 경험, 나쁜 경험은 없다. 이런 경험, 저런 경험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경험을 긍정하고, 그 기억에 긍정의 감정을 담아 우리의 마음에 심을 때, 나의 내면의 이너 포레스트엔 풍요와 감사의 바람이 불게 된다. 그 바람이 나의 생각이 되고, 나의 감정과 느낌이 되어, 내일의 삶도 따뜻해진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적응, 허용, 기브다. 먼저 적응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존중의 본질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너와 다르기에 나와 너의 생각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이 다르면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그 관점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역시 달라진다. 이러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게 적응할 수 있다. 적응은 ‘아 그렇구나,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 알아차림이 있을 때, 시작된다.

40대까지는 나이가 정말 중요했다. 한두 살 차이에 형, 동생이 나뉘고, 술을 사고 밥을 사야 했다. 그 나이 차이 하나로 선배가 되고, 어쩔 수 없이 조언자가 되어야 하며, 때때로 인생 멘토 역할도 해야 했다. 존칭과 예의, 리액션의 정도까지도 나이에 따라 달라졌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질서를 결정짓는 기준이다.

결혼은 적응하는 것이다. 그 적응 속에서 더 성장하고, 한층 성숙할 인생을 꿈꾸기도 한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선택을 긍정하고 책임질 것이다. 다만 지금은 지금의 삶이 좋다. 싱글의 삶을 긍정하면, 이 속에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행복도 많다. 그러니 선택하고 긍정하자. 그리고 그 긍정 속에서 다른 선택을 부러워하지 말자. 다른 선택도 후회를 포함한다. 그리고 알고 있는가?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의 득과 실이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득이 실보다 크면 이미 했을 것이고, 실이 크다면 고민도 안 할 것이다. 그러니 선택에 고민 말고, 선택을 긍정하자. 결혼도, 싱글도 둘 다 당신의 선택이다. 싱글도 즐거운 것이고, 결혼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니 정답은 하나다. 선택하고, 긍정하고, 고민 말고, 행복하자.

나이를 먹다 보니,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성인이 된 이후로 더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에이지(A.G.E)’다. A.G.E는 Awareness(알아차림), Gratitude(감사), Experience(경험)을 의미한다. 이 에이지가 있는 성인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내 마음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있음을 아는 앎(A)이 있고, 그 마음에 부는 감사의 바람이 나의 말과 행동(G)이 되어, 인생의 또 다른 감사의 경험(E)을 내 마음에 각인시킨다. 그것이 어른의 삶이다. 깨닫고, 감사하고, 세상과 나누는 것, 그것이 어른이다. 성인은 어른이 아니다. 어른은 대중 속에서 빛나고 있는 자존감의 빛이다.

두 번째가 허용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 이제 우리는 그를,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상대의 말을, 그의 행동을, 그녀의 생각을 허용한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온전히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 허용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정의가 ‘완전한 허용’임을 안다면, 우리는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온전한 그 모습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게 된다. 커피는 늘 아이스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커피도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커피를 사랑하면 커피의 숨겨진 맛과 향도 경험하고픈 거다. 이상형에 집착하지 않고, 내 곁의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 허용 속에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려고 할 때, 우리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연인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부부 관계, 친구 관계 등 다양한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적응, 허용, 기브의 자세를 지닌 채 상대를 바라보자. 윤활유 같은 접착제의 관계가 어느새 만들어진다. 그 속에서 우정도, 사랑도, 신뢰도 쌓여감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행복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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