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형인 톰은 채 두 살이 되지 않았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형도 어린이였고, 내가 사춘기를 거칠 때는 형도 10대였다. 그리고 내가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이한 직후 형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런 건 모두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동생에게 형은 언제나 다 큰 어른인 법이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교실에 가면 선생님이 출석부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반쯤은 기쁘고 반쯤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브링리라고? 톰 브링리 동생?"이라고 물었다. 백 살까지 산다 해도 나는 어딜 가나 톰 브링리의 동생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형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뉴욕에서 함께 산 2년 8개월 동안 도시 자체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뉴욕은 레코드 가게와 싸구려 식당, 워싱턴 스퀘어의 분수대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두서 없고 오색찬란하고 낭만적인 도시,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도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업타운으로 거점을 옮긴 내게 뉴욕은 마천루, 옐로캡, 멋진 거리와 유명한 건물들이 가득한 도시이자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발 디딜 곳을 찾아야만 하는 도시였다. 그러다가 형이 병에 걸렸다. 뉴욕은 하루 아침에 암 병동의 병실과 형의 퀸스 아파트만 남은 도시가 되었다.

자가면역질환으로 위기가 극에 달하자 형은 우리를 한 사람씩 차례로 자기 방으로 불러 작별 인사를 했다. 방에서 나온 후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져 더 이상 부서질 수도 없게 된 심장을 부여잡고 나는 의료 정보가 담긴 소책자 뒤에 이렇게 갈겨썼다.

이제 곧 말을 못 하게 될 거야. 하지만 행복해.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지. 가족, 크리스타를 잘 돌봐줘. 수학을 끝내지 못한 건 후회가 돼.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넌 걱정 안 해. 훌륭한 녀석. 사랑해. 나도 괜찮은 사람으로 산 거 같아. 잠들었는데 그 사이에 누가 비디오를 대여점에 돌려줘버렸어. 누구나 고통을 겪지, 내 차례야. 누구나 죽어, 내 차례고, 고통을 피하는 약을 먹고 싶기도 하고 먹고 싶지 않기도 해. 죽는 건 상관없어. 다만 고통을 겪고 싶진 않아. 모두들 늙어가는 걸 보고 싶은데... 크리스타를 행복하게 해줘. 행복한 추억이 많아. 너랑 이야기한 것도 좋은 추억이야.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다 끝내지 않은 비디오를 누군가가 돌려줘버린 느낌이야.

다행히 우리는 그 후로 형과 1년을 더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찾은 그림음 지금으로부터 7세기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화가가 단순하고 진솔하게 그린 보석과도 같은 패널 그림이었다. 자그마한 포플러나무 패널에 달걀 노른자로 만든 물감인 템페라를 사용한 그림으로, 갓난아기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작은 동굴 입구에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기쁨의 별‘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현자들과 천사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경배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마리아는 주위의 소란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구유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조용한 아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런 테마의 장면을 ‘경배Adoration‘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 아름다운 단어를 마음에 품었다. 그런 순간에 생겨나는 애정 어린 숭배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참 유용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말문을 잃고 말랑말랑해진다. 뒤이어 강렬하고명백하지만 일상생활의 소란 속에서는 약하게밖에 느껴지지 않던 무엇인가가 우리의 안으로 침투한다. 경배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다. 맥락을 더하는 것은 이 수수께끼같지 않은 수수께끼의 명백한 의미를 흐릴 뿐이다. 누구나 자고있는 아이나 연인, 떠오르는 태양 혹은 어쩌면 성스러운 유물이나 죽은 지 오래된 이탈리아인이 곱게 그려낸 그림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형이 두 손을 꼭 쥐고 용감하게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 느낌 말고는 다른 감정이 거의 들지 않았다. 기쁨의 별에서 특별한 종류의 선명한 빛이 나오는 듯했다. 옛 거장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함과 같은 것이었다.

한두 시간쯤 흘렀을까. 튼튼한 바위 기반처럼 느껴지는 미술관을 떠나 그 너머에서 존재감을 뽐내며 펼쳐진 소위 현실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누이 미아는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돌아갔다. 나는 암트랙 기차를 타고 새로운 고향 뉴욕으로 향했다.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모든 의미에서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미드타운의 분주한 행인들 틈에 섞였다.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침묵 속에서 빙빙돌고, 서성거리고, 다시 돌아가고, 교감하고, 눈을 들어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슬픔과 달콤함만을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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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인물/이이

이이(1536년~1584년)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경세가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중 천재였다. 최종적으로 장원 급제하기까지 총 9번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단 한 번의 낙방 없이 수석으로 통과했다. 조선 왕조 500년간 이 기록은 유일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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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고요가 건네는 위로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 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다녀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 몇 주는 뇌가 반쯤 작동하지 않은 듯했다. 정말 그 정도로 몰두가 됐기 때문이다. 모든 그림이 ‘짠‘ 하고 커튼을 열어 안을 보여주는 건물 1층의 창문들처럼 보였다. 보통 한 전시실에는 네 면의 벽에 걸쳐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의 금테를 두른 ‘창문‘이 나 있다. 어느 창문은 돌벽을 단숨에 뚫고 바깥으로 이어져서 굽이치는 언덕과 요동치는 바다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창문은 창틀에 턱을 받치고 들여다보라는 듯 집 안의 광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혹은 고개를 들면 빤히 쳐다보는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 창문들도 있다.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 내 시선이 페르메이르가 즐겨 그렸던 조용한 집 안 풍경으로 가서 멈춘다. 뺨을 손으로 받치고 졸고 있는 하녀가 보이고, 그 뒤로는 잘 정돈되고 텅 빈 듯한 집 안의 모습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빛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오늘의 첫 방문객이 도착한다. 나는 경비원이 서 있기에 좋은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작품들을 지켜보는 일을 하는 나는 이 작품을 본래의 의도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14세기 화가는 언젠가 예술품 비평가라는 직업이나 미술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교과서가 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나르도 다디에게 그림은 고통스럽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각을 돕는 도구였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그림들에서 새롭거나 미묘한 뉘앙스를 찾는 데 관심이 없다. 내가 이해한 건 다디는 고통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그림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의 정수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많은 경우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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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사건/신간회운동

1927년에 결성된 좌우 합작 단체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하여 일제에 대항한 항일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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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1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

미술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건 부모님에게서 배웠다. 대학생 때 부전공으로 미술사를 공부한 어머니 모린은 자신의 아마추어적 열정을 형 톰과 누이 미아 그리고 나에게 전도했다. 우리는 적어도 1년에 몇 번씩 시카고 미술관으로 모험을 떠났다. 그곳에서 마치 도둑질을 준비하는 도굴꾼들처럼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고르며 살금살금 걸어 다니고는 했다. 어머니는 시카고 극단 소속 배우였는데, 시카고 극단에 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화려하거나 영화롭기보다 근면과 굳은믿음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미술은 달빛 가득한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고, 여기에는 어머니의 영향 컸다.
아버지는 좀 더 완고한 사람이었지만 우리에게 나름대로 여러 교훈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근본적으로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에 반응하듯 그 위대한 그림에 반응했다. 다시 말해서 그림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음에도 이미 그것을 충분히 경험한 것이다. 그때는 내가 느낀 감상을 말로는 분출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 그림의 아름다움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물감과도 같이 과묵하고 직접적이며 물체적이어서 생각으로 번역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나의 반응은 새 한 마리가 가슴속에서 퍼덕이듯 내 안에 갇혀 있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늘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경비원으로서 수많은 방문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신비로운 감정에 반응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몇 주 동안 형이 죽은 뒤 처음으로 내 삶이 방향을 잡았다고 느끼게 해준 일들을 지나오고 있었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훈련을 받고, 뉴욕 주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하고, 지문을 등록하고, 근무복 제작실에서 미술관의 재단사가 내 치수를 재고…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할 유일한 일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망을 보는 것. 두 손은 비워두고, 두 눈은 크게 뜨고,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삶의 소용돌이 속에 뒤앙켜 내면의 삶을 자라게 하는 것. 이는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기나길게 느껴진 몇 분이 더 지난 후,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의 역할이 될 수 있겠다고 믿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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