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에서 살펴봤듯 교제폭력과 교제살인은 한국만의 이례적인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은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통제, 스토킹, 목조름 행위가 피해자 사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이러한 범죄 유형을 신속히 별도의 범죄로 규정하고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
우리나라처럼 교제폭력이 가정폭력과 분리되어 별도로 다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가정폭력의 적용 대상에 현재 또는 과거의 연인 관계도 포함한다. 따라서 가정폭력법에 따라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질 수 있으며, 가해자는 엄격히 처벌된다. 만일 우리나라도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처벌 대상에 교제 관계인 사람들이 포함되었다면, 경찰 신고 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받지 못하고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는 여러 사례를 예방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외국에서처럼 교제 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압적 통제를 폭력 행위로 간주해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하려면 법률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연인, 배우자, 파트너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적조항을 마련해야 한다.
만일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률이 마련된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강압적 통제를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 있고, 공권력으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법적 보호는 피해자 사망과 같은 참극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둘째,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법적 정의가 필요하다.
셋째, ‘친밀성’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을 반영해 가해자 처벌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반의사불벌죄’ 배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교제 관계가 법률의 적용 대상으로 포괄될지라도 범죄 신고 시 피해자에게 가해자 처벌을 결정하게 하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피해자가 처벌불원을 할 우려가 높다.
스마트워치 지급은 경찰의 범죄피해자 안전 조치 유형 중 하나다.피해자가 위급한 상황에서 스마트워치 버튼을 눌러 경찰에 보호를 요청하면, 경찰은 실시간 위치추적을 통해 피해자가 있는 곳으로 출동한다는 것이 스마트워치의 핵심 기능이다. 하지만 스마트워치가 과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현재까지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상황에서 스마트워치라도 지급받기를 원한다. 다른 안전장치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경찰과 즉시 연락할 수 있는 기기를 착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홈페이지에는 스마트워치를 피해자가 6개월간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은 후 한 달 동안 가해자로부터 별다른 위협이 없으면 연장이 허용되지 않아 반납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비공식으로 면담한 경찰관 역시 ‘스마트워치 개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한 달 이후 평가를 거쳐 가해자의 별다른 위험 동향이 관찰되지 않으면 반납받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스마트워치의 어떤 기능도 접근금지명령을 받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가해자에게 위치추적장치를 부착하지 않는 이상, 가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다. 결국,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해자가 스토킹 행위를 멈추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는 2022년도에 접근금지명령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해 가해자 GPS 추적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는데,18 스토킹 처벌법에 반영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교제폭력 및 가정폭력은 여전히 그 적용 대상이 아니다.
GPS 위치추적장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정 거리 이내로 가까워지면 경보가 울리는 시스템을 말한다. 피해자는 경보를 통해 가해자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즉시 안전한 장소로 도피해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스마트워치처럼 가해자가 이미 눈앞에 나타난 후 버튼을 눌러 구조를 요청하는 사후적 조치와는 차별화된다. GPS 설치 및 운영 비용은 대부분 가해자가 부담하며, 피해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94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최초로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GPS 감시 관련 조항이 마련되었다. 이는 현재 기준으로도 우리나라보다 30년 이상 앞선 조치다.
특히 빈곤과 폭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은 가해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폭력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폭력으로 인해 입원이 필요하거나, 얼굴이 붓고 멍이 들어 출근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결국 직장을 잃게 되기도 한다. 직장을 잃으면 경제적 자립 기반이 무너져 자신을 지킬 힘을 잃고, 그만큼 폭력에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 근로자가 직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러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 외국에서는 우리에게 생소한 가정폭력 사망검토domestic violence death review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가정폭력 관련 사망사건에서 피해자가 결국 사망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단순히 사건의 결과를 통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피해자를 애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분석해 일정한 패턴과 원인을 파악하고, 피해자의 도움 요청 과정, 개입이 실패한 이유,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시달렸던 학대 유형 등을 조사한다.
또한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해야 하는 직군에 대한 훈련과 교육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피해자를 직접 응대한 경찰에 대한 조사에서는 경찰들이 신고된 사건에 대해 주로 신체적 피해 사실에 집중해 피해자가 겪고 있는 가정폭력의 심각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도 밝혀졌다.28 가정폭력에 개입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사회적 자원들이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다는 점 역시 지적되었다. 가정폭력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부족,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안이한 태도 등이 제도, 양식과 규칙, 절차 등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피해자 지원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관련 제도들이 시행되었다 해도 그에 대한 관리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제22대 국회에서는 교제폭력을 가정폭력 처벌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하고, 강압적 통제를 가정폭력 행위로 처벌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심사 중에 있다.
또한 가정폭력 사망검토제 도입의 내용을 담은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안도 발의되었다.
무엇보다 법률을 개정하는 데 있어서 유의할 점은 ‘어떤 특정 행위’ ‘어떤 관계’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교제폭력 및 가정폭력과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기저에는 친밀한 관계의 여성을 통제·지배·착취하려는 여성에 대한 차별, 무시, 폄하가 놓여 있다. 이것을 간과한 채, 지금 목격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데만 급급하여 법률을 제정·개정한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근본적인 속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특정 행위의 금지나 일회적인 처벌만을 강화하는 데 그칠 수 있다. 따라서 ‘교제폭력’만을 별도로 규율하는 개별 법의 입법은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분절적 접근은 폭력의 구조적 특성을 식별하지 못하고, 피해자에 대한 통합적 지원을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이 범죄를 바라보는 모든 사회 구성원은 이것들이 각기 다른 일탈 행위가 아니라, 여성을 목표물로 하는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차별범죄이자 혐오범죄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범죄의 근절을 위한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책을 쓰면서 그녀들에게 부당하게 씌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싶었다. 그녀들은 여느 누구와 같이 평범한 삶을 살다, 가면을 쓴 채 다가온 살인자들을 우연찮게 곁에 두게 된,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공포와 두려움을 헤치며 용기 내 관계를 빠져나오고자 했던 강한 삶의 의지를 가졌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일 뿐이다.
국가가 완벽히 실패했다.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현장에서 가장 민첩해야 할 경찰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책임을 미루고 있고, 법원은 가해자 우호적인 결정에 특화되어 있고, 국회는 실상을 잘 파악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어떠한 글과 말, 그리고 어떠한 입법이나 판결을 통해서도 피해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 간절한 소망과 깊은 애통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과거를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려 하지 않고, 수많은 상처의 흔적을 세밀히 복기하려는 이유는, 유사한 죽음을 막아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와 주변 사람의 위험 신호를 더 민감하게 감지하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비난받아야 할 행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며,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는 힘의 원천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