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폭력만을 학대로 인식한다면, 이는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걱정이나 염려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심각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신호인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일상을 통제하고, 명령하거나 지시하며,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게 만드는 이러한 비신체적 학대 역시 신체적 학대만큼이나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만약 상대가 "제발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우리 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어"라는 말을 한다면, 그때가 바로 관계에서 벗어나야 할 신호다.

‘폭력적인 사람을 대체 왜 만나?’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해자도 나쁘지만 피해자 역시 현명하지 못했다’는 식의 비난도 있다. 또 근육질에 우락부락하고 사나운 인상을 지닌 사람이 폭력적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는 편견이자 무지일 수 있다. 실제 사례를 보면 자신이 폭력적인 사람을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며 알아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자만일 수 있다.

‘강압적 통제’란 연인, 배우자처럼 가까운 관계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조종하려는 행동을 말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의 개인적인 활동을 대신 결정하거나, 명령하고 지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본성’을 가시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신체적 폭력’으로만 이해한다면 폭력 피해자 중 소수만을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현행법하에서 교제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가 결국 구호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고 있는 것은 폭력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가 그 배경에 있다.

그러나 통제 행위가 미래의 신체적 학대를 예견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전조이자 피해자 살해의 위험 요인이라는 것은 관련 학계의 정설이다. 특히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 살해가 통제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결별의 맥락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피해자가 처한 위험을 감지하는 기준이 달라져야 함을 의미한다.1

‘강압적 통제’가 시도되는 관계의 초기에는 ‘강압’이나 ‘강제’의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상대방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보살피는 척하는 경우가 많다.

강압적 통제는 일련의 행동 패턴으로, 상대를 장악하고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통제를 시도한다.

때로 피해자가 이러한 통제 행위가 싫고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고 항의하면, 가해자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피해자를 가스라이팅한다.

누구도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책임감을 느끼거나, 상대방의 치유와 회복을 자신의 의무로 여길 필요는 없다. 과거에 상처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다른 누군가를 학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강압적 통제를 하는 과정에는 상대방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난’이 있다.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술수이며, 가스라이팅의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 여기게 되고, 남들에게 민폐나 끼치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욕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고, 이유 없이 구타당하더라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거라 받아들인다.
이렇듯 강압적 통제를 행하는 가해자는 상대의 자존감을 짓밟고 의도를 왜곡하고, 상대를 세상 가장 나쁜 짓을 한 사람인 양 취급한다. 이와 같은 비난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면 그 사람은 빠른 속도로 무너진다.

이제 혼자 결정할 수 없고, 무언가를 결정할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가스라이팅은 대략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근거 없고 악의에 찬 비난을 ‘내가 잘되라는 진심 어린 격려’로 생각하게 된다. 나를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모욕하는 사람에게 점점 더 의존하고 그의 말을 믿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못된 말과 행동은 상대를 굴종시키기 위해서다. 스스로를 혐오하도록 만드는 것, 점점 위축시키고 자신감을 잃게 해 가해자의 말을 다 믿도록 하는 것, 더 통제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가해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를 비난하고 원망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자신의 비난과 원망을 정당화하는 데 몰두한다. 이런 가해자의 특징은 주로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불쾌하게 했다는 데 집중하고 이에 과하게 몰입한다는 것이다. 마치 상대가 자신의 좋은 기분을 유지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니 상대의 감정과 기분마저 통제하려 들고, 그래도 된다고 여긴다.

만약 눈치 보게 만들고, 언제 무엇을 가지고 화를 낼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면, 그 관계에는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친밀한 관계는 그 누구보다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사이다. ‘다 그런 거 아닌가?’ ‘내가 연애에 유독 서툴러서 상대의 기분을 맞추지 못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미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중이라 생각하는 게 맞다.

통제 행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러한 행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각한 학대와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미 폭력과 통제가 시작된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 앞에서 연인의 체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인을 망신 주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많다.

연인이 친구, 이웃, 지인 등 다른 사람 앞에서 얼마나 무안하고 망신스러울지, 창피할지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그 상황을 이용해 상대가 굽히고 들어가는 것을 유도한다면 그 사람은 통제 가해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