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현실적, 물질적 제약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는 부자유가 주어졌다. 지옥이 있으므로 천국이란 단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슬픔이 있으므로 기쁨이란 단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삶이 짧으므로 오래오래 기억될 아름다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자유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이 부자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 안에 파괴될 수 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것. 그러나 사적으로는 자아에 엄청나게 집중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위축되고 소심해져,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초긴장 신경증적 지옥을 사는 우리가 내적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버리기는 얼마나 쉽던가. 이 와중에도 자신의 무언가를 꿋꿋하게 지키고 사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품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매료된 것은 할머니의 ‘말’에 대한 믿음이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속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인간들끼리 나누는 ‘말’이라는 신비 속으로 뛰어들었고, 앞날에 죽음 말고는 기다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롭게 배우고 알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말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사라져가는 중이다. 다른 모든 좋은 것들처럼. 한 방에 날려버리고 말겠어, 라는 의도를 가진 말들이 넘쳐난다. 나는 말 뒤에서 독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귀가 배지근해지다’라는 말 자체에도 매료되었다. ‘귀가 배지근해지다’는 다른 말로 하면 ‘눈뜨고 살다’이다. 의미 있는 말은 눈을 뜨게 만들어줄 수 있다. 좋은 목소리는 늘 내게 말한다. 눈 좀 떠봐! 그러나 아쉽게도 의미 있는 대화는 많이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말조차 나는 잘 듣는 데에 실패한다. 늘 잘못 알아듣거나 대충 흘려듣는다. 할머니의 말 중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 천국의 모습이 바뀔지도 궁금해." 내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천국을 상상하는 일은 한 인간이 영원한 잠을 향한 여행을 떠나기 전 꿀 수 있는 가장 좋은 꿈이다. ‘내가 이것을 듣게 되면 천국의 모습이 바뀔까?’라는 말은 ‘남은 생을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라는 질문을 그 안에 품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집필하면서 황제가 죽기 전에 남긴 시편의 마지막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지금 그 글이 생각난다.

늘 하던 농담, 장난은 이제 못하리니. 한순간 더 우리 함께 낯익은 강변들과 아마도 우리가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사물들을 둘러보자… 두 눈을 뜬 채 죽음 속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자.

한 인간이 생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작별인사다.
장난치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새 여러 가지 이유로 할머니 생각을 자주 한다. 천국이란 단어를 확장 중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신이 딱 한 가지 질문만 한다고 들었다. "그래, 너는 너의 한 번뿐인 인생으로 무엇을 한 거지?" 그에 해당하는 좋은 대답들은 다 천국의 맛을 풍길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당신은 타인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이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누리는지를 주로 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린다는 생각에 고통을 받는다. 반면 타인을 볼 때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지고 있는 무게를 가늠해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하지만 아주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은 다르다. 그는 영혼에 바다를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이 너무나 드물기 때문에 그는 전설이다. 우리는 이 전설적인 인물과의 만남을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 행복이 행복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남에게 무게를 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무게를 실으려는 사람은 많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타인의 무게를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슬픔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슬픔은 사라지는 단어가 아니다. 슬픔은 오겠다는 기별도 없이 제멋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수시로 온다. 눈을 감아도 온다. 슬픔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눈꺼풀은 없다. 슬픔은 거친 밤을 기진맥진 통과하게 만든다. 슬픔은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라 요구하는 손님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슬픔이야말로 딸에게서 엄마가 받은 유산인걸.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슬픔도 눈물처럼 어디론가는 흘러가야 한다.

하쿠나마타타. 이 말을 한 사람이 딸의 뼈를 만진 손으로 찬란한 해바라기를 수놓았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을 줄 알았다. 나는 그토록 깊게 슬퍼한 사람이 타인의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놀란다. 슬픔과 아픔이 경이롭게 변한 말, 하쿠나마타타. 생의 경이가 아니라 생의 경시가 가득한 이 사회에서 조건이 하나 붙으면 이 말은 백 퍼센트 진실에 가까워진다. ‘당신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울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백 퍼센트 우울만도 슬픔만도 아닌 순간을 살 수 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예 하나도 없다는 것은 과장이다. 우리가 느낄 수만 있다면.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들 속에서 따스해진다는 일 아닌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 가슴에 살아남아 있는 따스한 무언가는 각자의 가슴속 빛의 영역에 속한다. 삶이란 힘든 것이고 우리를 둘러싼 조건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둠은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고 매번 다시 찾아오고 우리는 자주 지치고 힘을 잃고 우울하다.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가끔은 기쁘고 질서가 잡혀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야채장수 언니는 이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자기만의 시간과 방법을 만들고 살아냈다. 누군가 자신의 문제를 풀려고 이토록 노력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적인 일이다. 야채장수 언니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삶을 소중히 했다. 삶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지켰다. 우리도 그녀처럼 가볼 수밖에 없다. 우울과 혼돈 속에서 질서를 잡아가면서, 먼 빛이든 가까운 빛이든 희미한 빛이든 내면의 빛이든 한 발 한 발 따라가면서.

인간이 가진 힘 중 수치로 가장 측정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회복력이라고 들었다. 측정하기는 힘들지만 상처받았던 사람들의 회복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대체 그때가 언제일까? 갑자기 다른 사람 혹은 다음 세대, 혹은 다른 생명을 생각할 때, 그때 인간은 놀랍게 회복된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회복력은 다른 생명도 구하고 자기도 구하는 엄청나게 귀한 힘이다. 엄마에게 잘 맞아떨어지는 설명인 것 같다.

나는 우리 인류가 곁에 있던 것이 사라져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을 슬퍼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기를 바란다. 우리 인류가 아무런 감동이 없는 세계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인류가 어떤 일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그만둘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상상력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우리 인류가 새들의 비행을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인간의 심장은 3백 그램이다. 새의 무게는 113그램이다. 우리는 그 작은 새의 용기에서 배울 것이 많다. 난기류와 폭풍우와 번개 속을 나는 새의 용기를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의 용기도 달라질 것이다.

세월호라는 단어는 아직도 내 가슴에 너무나 생생하다. 나에게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호라고 말하는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의 시간이 잠시 멈춘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이미 우리 가슴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어딘가로 떠난다. 거의 모든 사람의 눈에 작은 눈물이 맺힌다. 그냥 그 단어만 말해도 그렇다.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은 잊히는데 왜 이 이야기는 우리를 멈춰 세우는가? 이 이야기에는 뭐가 있는가?
세월호 1주기가 지나고 유족들과 함께 광주 5·18 유족들을 만나러 간 일이 있다. 그때 세월호 부모님들은 우선 5·18유족들에게 사과를 하고?"저희가 너무 오랫동안 5·18에 무관심하게 살았습니다. 겪어보니 알겠습니다. 비통하게 가족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저희의 무관심을 사과드립니다. 저희가 너무 오래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코로나와 기후위기 시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제 우리는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점점 더 폐쇄적이 되어서 타인의 슬픔과 불행과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잃어가는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우리 머리 위에는 무한한 하늘이 아니라 CCTV가 있고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주고 우리의 하루를 대신 말해준다고? 점점 더 외로워진 우리는 죽음이 아니라 얼음 같은 차가움 속을 살아가는 것을 꽤나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사방에 냉담한 말이 넘쳐나서 살아 있다는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실감하지도 못한다고? 실은 우리도 두터운 유리창 안에 갇혀 있다고? 우리를 가두는 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어디서 끝날지도 알지 못하는 채,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하는 채. 그리고 가장 하기 민망한 말. 아직도 아무것도 구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우리는 죽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그렇게 살고 있어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우리 마음은 죽은 사람에게 더 이상 슬픔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이것은 나의 소망에 불과한가?). 어쨌든 우리는 죽은 사람들에게 여기는 이제 그만 잊으라고, 우리에게 맡겨놓으라고 말한다. 세월호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의 현실을 바꿔줄 수 있는 힘을 가진 단어다. 이 단어 앞에서 슬퍼하고 고통받는 능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삶에는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에는 귀하게 여겨야 할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슬픈 마음과 현실을 연결시킬 때 변화는 가능하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능력을 거의 바닥까지 상실한 듯이 살고 있지만, 과거에서 배우는 능력 또한 잃은 듯이 살고 있지만, 시간 속의 존재임을 잊고 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스스로를 시간의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우리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하면서만 질서를 잡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가 동시에 뒤돌아보던 모습은 내 마음 속에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다. 이 슬픈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단어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가 여치를 집어들던 작은 몸짓 하나만 말하려고 해도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랑 이야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 몸짓을 보면서 나는 한때 지상에 태어나 살았으나 이제는 없는 한 아이의 존재를 느꼈다. 이제는 곁에 없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 몸을 통해 무수히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 한다.

총기 사건이 터지고 몇 달 후 콜럼바인에 신입생이 들어오자 교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신입생들은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을 도와주세요."
이미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던 학생들에게 교장선생님의 말은 어처구니없었을지 모른다. 이미 자기 문제로도 충분히 힘든데 무슨 힘이 남아돌아 누구를 돕는단 말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교장의 말을 따랐다. 교장의 생각은 옳았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살 수 있다. 잭의 말대로 힘을 주면서 힘을 얻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다시 수업이 시작되던 날, 모두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티셔츠는 앞에는 ‘우리는’, 뒤에는 ‘콜럼바인’이라고 써 있었다. 에릭의 일지에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단어가 있었다. 바로, 흰 티셔츠의 앞에 써 있던 ‘우리’였다. 에릭이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삶, 딜런이 되고자 했으나 결코 돼보지 못한 것. 하지만 잭과 헤더가 창조한 것, ‘우리’였다.
세상은 서로의 차이를 서럽도록 강조하고 우리는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시간은 오싹할 만큼 창백하고 차갑게 흘러가지만,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타인은 힘겨운 지옥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고독을 뚫고 나오게 하는 것 또한 타인의 존재다. 사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것도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해서 아닌가? ‘우리’가 되면 내게 일어난 많은 일은 내게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다. 한때 혼자서만 슬퍼했던 경험이 공통의 경험이 된다. 거기서 나는 내가 아닌 척할 필요가 없다. 훨씬 더 이상적인 나인 척할 필요도 없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필요도 없다. 거기서 내가 누군가를 환영한다면 나 자신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혼자일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저마다의 숨겨진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단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누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타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나누는 것이 치유인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내가 왜 이 일을 겪었을까 잠시나마 이해 비슷한 것에 이르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 안에서 혼자일 때조차 혼자가 아닐 수 있다. 혼자일 때조차 함께 있게 된다. 만나서 말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 앎이 아쉽고 소중하다. 너무 늦게 알게 되기 때문에 아쉽다. 그래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어렴풋하게라도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다음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슨 말을 나누면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 있다. 이 앎이 꼭 필요한 일을 찾아내서 하게 한다. 그래서 먼저 겪고 알게 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중하다. 반복을 두려워하고 반복을 피하려 하고 미래의 관점으로 상황을 보면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중하다.

그 뒤로 한국에서도 ‘인생의 전문가’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대체로 아주 슬픈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들었다.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입을 여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의 슬프고 불행했던 사랑으로 알게 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들을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 그들은 삶이 파괴되어봤기 때문에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리자면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다. 미래가 변하길 원할 때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가장 잘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모습 중 가장 좋은 모습이 미래가 변하길 원한다. 우리는 가장 좋은 모습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세상은 변해야 하고 우리는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 말할 것이다. 위험에 처한 생명에 대해서.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각자가 숨기고 싶었던 어둠을 뚫고. 그리고 우리가 서로 더 잘 듣고 더 잘 말하고 더 잘 알게 되면 확실히 이 세상에 위안과 아름다움은 존재할 것이다.
이제 우리 이야기의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다. 당신 삶의 이야기는 누가 말하고 있는가? 혹시 역사가? 혹시 시스템이? 혹시 상황이? 혹시 부동산 시장이? 내가 가진 것이? 나 아닌 누가 나 대신 나를 말하고 있는가? 혹시 당신 목소리를 잃었다면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잘못 살았구나!’
그 느낌이 얼마나 쓰라리고 가슴 철렁한 것인지 안다. 그리고 내가 잘못 산 여파로 남에게 준 상처가 얼마나 후회되는 일인지도 안다. 그런 일들을 몇 번 겪었다. 지금도 나의 일부는 분명히 잘못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중에야 또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 하며 말도 못하게 괴로울 것이다. 다만, 그 괴롭고 후회스러운 일들에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가 나에게 없지는 않다.
어느 해, ‘정말 잘못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또 왔다. 내가 잘해나가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추락은 깊었다. 그냥 아무 데로나 며칠간 떠나 있고 싶었다.

최근 수년간은 이 생각에 의지해서만 초라한 자아를 극복하고 꺾인 무릎을 펴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검은 물살 위에서 이리저리 외롭게 흔들린다. 그래서 ‘아더 사이드’는 우리 모두의 단어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실의 다른 측면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 들어봐야 비로소 지금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 ‘아, 난 이것을 원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강렬한 해방적 순간이다.

‘스틸 뷰티풀’은 변주가 가능하다.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났어도 아름다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덧없지만 영원한, 슬프지만 기쁜. 내 마음의 고독이 찾던 이야기들은 모두 이 말과 관련이 있다. 몇 번이고 곱씹어볼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던 날들은 사랑스러운 일몰에 대한 기억처럼, 어느 아름다웠던 별이 가득한 밤의 기억처럼 끝없이 떠오르는 마음속 풍경이다. 우리의 어둠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아름답고 빛나는 이야기뿐이다.

나는 시 속에서, 그리고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면서 달라지고 싶다. 현실을 변신의 장소인 것처럼 살고 싶다. 특별한 이야기의 힘을 믿고 우리에게 마법 같은 힘이 있음을 믿고 세상에 기적이 존재함을 믿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감히 믿으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야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 싶다. "누가 그래? 내가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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