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한 해 선배였다. 우리 중학교는 명찰 색으로 학년을 구분했다. 교내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우리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너도 나도 그저 흔해 빠진 소년 소녀였다. 특출난 재능도 없었고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었다. 성적도 평범하고 성격도 모나지 않았다. 우리는 한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말을 걸어볼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세계문학 전집을 읽을 때 너의 손에는 항상 너덜너덜한 무협 소설이 들려 있었다. 나는 네가 유치한 어린애처럼 보였다.
나는 하교 후에 읍내 공립도서관에서 한두 시간 책을 읽다 집에 돌아갔는데 그곳에서도 너를 보았다. 너는 만화 잡지를 펼쳐놓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조그만 소리로 낄낄댔다. 바보처럼 풀어진 하얀 얼굴이 조금은 신경 쓰여 간혹 너를 흘끔거렸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는 도서관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함께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너는 읍내에 살았고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촌 동네에 살았다. 너는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학교와 가까운 정류장에는 알고 지내는 얼굴들이 한둘씩은 있었다. 우리는 얄궂은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한 정거장 앞을 이용했다. 그곳은 읍내의 초입이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정류장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매일매일 서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왜 그리도 많은지 저 멀리 내가 탈 버스가 오면 아쉬움에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한 시간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려다가도 너의 아쉬운 표정을 보면 다시 의자에 앉아버렸다. 그러면 너는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간간이 문자메시지로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다. 개학하고 다시 만난 너는 무언가 변해 있었다. 부쩍 자란 키 때문도,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얼굴 윤곽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너의 힘겨웠던 여름방학을 듣고서야 네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어."
위로하는 방법은 학교에서 가르쳐 준 적 없었다. 너의 고백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뻔한 위로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너의 구겨진 교복 셔츠가 안쓰러웠다. 너는 계속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단칸방에 세를 얻어 살았지만 자상한 아버지 덕분에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껴본 적 없었다고. 아버지마저 떠나버린 지금은 근처에 사는 작은아버지 가족이 종종 들여다봐 주신다고 했다.

두 달 전까지 소년이었던 너는 어른의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동자는 아직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우리는 도서관 정원의 나무 벤치에 앉아 한동안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던 가을 하늘은 깊고 새파랬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올렸다. 손가락 틈새로 하늘이 쏟아졌다. 나는 허공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었다가 눈앞에다 손바닥을 펼쳤다.

그해 여름, 나에게도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나는 어둠이 두려웠다. 야맹증이 심해져서 여름방학 때 도시에 있는 병원을 다녀왔다. 그러나 어둠이 더욱 두려워졌을 뿐이었다. 캄캄한 곳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팠던 여름을 다 털어놓은 너와 달리 나는 말하지 않았다. 너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생긴 것이다.
날이 서늘해질수록 해는 빨리 저물었다. 내가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짧아졌다.

너는 날이 갈수록 야위었고 얼굴이 상했다. 행색도 볼품없어졌다. 작은아버지께서 돌봐주신다 하지만 제대로 식사를 챙겨 먹을 리 없었다. 겨우 열여섯 소년이었다. 홀로 살아가기엔 이른 나이였다

회색 하늘에서 눈발이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나에 관한 생각은 지금 하고 싶지 않았다. 너를 떠올렸다. 차가운 단칸방에서 홀로 추위를 견디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방금 헤어졌는데 벌써 네가 보고 싶어졌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너는 읍내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도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학교가 달라지자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부쩍 짧아졌다. 하교하고 도서관에서 너를 기다렸다. 네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읍내와 떨어진 외곽에 있었고 너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내가 기다리던 도서관은 너의 학교에서 보면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주말에 너는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다. 여전히 단칸방이었고 단층에 여러 가구가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주택이었다. 마당도 거의 없고 붉게 녹슨 철 대문이 기울어진 채 힘없이 흔들거렸다. 다행히도 이번 집은 내부에 작은 욕실 겸 화장실이 있었다.
너는 나를 새로운 둥지에 초대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첫 번째 집. 불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얇은 철문이 현관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이 현관 겸 부엌이었고 왼편이 욕실이었다. 단출한 짐 때문인지 방은 좁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창문이 손바닥만 해 낮에도 전등을 켜고 생활해야 했다. 주인이 도배며 장판을 새로 해줬다는데 집에서는 오래된 다락방 냄새가 났다.

언제부턴가 너는 나를 데려다주며 너의 꿈을 이야기했다. 자동차 정비 자격증을 최대한 빨리 따겠다. 졸업하자마자 취업하고 돈을 모아 우리 집 옆에 집을 지어 살겠다. 마당에는 커다란 개를 키우고 아이는 네 명 정도 낳으면 좋겠다. 나는 가만히 너의 꿈을 들어주었다. 호응도 첨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지난여름, 나는 캄캄한 미래를 선고받았다. 야맹증이 심해져 방문한 안과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완전히 시력이 상실될 거라는 판정을 받았다. 진부한 드라마 같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 보이는데. 오진일 거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시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는 걸 느꼈다. 네가 그리는 미래를 들을 때마다 견딜 수 없게 슬퍼졌다. 그 미래에 정말로 내가 함께 있을까. 너는 완전히 시력이 소실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먼 장애인이 너를 욕심내도 되는 걸까. 그래서 나는 네가 더 망가지길 바랐다. 네가 나만큼 망가지면 당당히 네 옆에 있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 나의 미래를 상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네 얼굴을 마주하면 내일 하자, 모레엔 말하는 거야, 하고 미뤄버리기 일쑤였다. 영악한 나는 알았다. 이 관계가 내 고백으로 깨질 것이라는 것을. 내 캄캄한 미래를 너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음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눈을 떴을 때 기적처럼 시력이 회복돼 있다면. 내게 다가올 영원한 어둠이 없던 일이 돼 있다면. 잃어버릴 모든 것을 붙들 수 있다면.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쏟아지는 전등 불빛에 눈이 시렸다. 샘물이 터지듯 눈물이 흘러넘쳤다. 쌓였던 억울함이 목구멍을 뚫고 나왔다.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억눌렀던 고통이 폭풍우가 되어 나의 세상을 흔들었다. 큰 꿈을 가져본 적도 넘치는 욕심을 부려본 적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평범한 열여섯 중학생 소녀였다.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네 아내 노릇에 빠졌다. 네가 자고 일어난 이불을 마당 빨랫줄에 내다 널고 간단히 찌개를 끓여놓고 너를 기다렸다. 네가 좋아질수록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도 지루해졌다. 습관처럼 수십 번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응답 없는 너를 야속해했다.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네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토라졌다. 그러면 너는 잘못한 게 없으면서도 내게 빌고 매달렸다.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기뻤다. 유치한 내 마음이 짜증 났다. 변덕스러운 마음을 나조차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곪아 터지기 직전의 고름 덩이였다. 그리고 그 고름 덩이는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네가 잡아주길 바랐다. 영영 볼 수 없다고 해도 네가 내 옆을 지키며 내 눈을 대신하겠다는 맹세를 기다렸다. 그러나 너는 어둠처럼 침묵했다.
너를 남겨두고 왔던 길을 천천히 되짚어 걸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너를 의식해서였는지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몸이 풀숲으로 쓰러지려 했다. 그때 네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너를 힘껏 뿌리쳤다. 이 상황에서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내 처지에 화가 났다. 치욕스러웠다.

가로등 아래만 골라 동네를 빙빙 돌았다. 수도 없이 너를 저주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발을 옮겼다. 움직이지 않으면 온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열병에 걸린 듯 피부가 화끈거렸다. 턱 끝에 차가운 땀이 고였다가 땅에 떨어졌다. 무릎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몸의 고통으로 마음의 고통을 잊고 싶었다. 심장이 터지게 달리고 싶은데, 눈앞의 어둠은 두려웠다. 미움과 원망의 대상은 어느새 나로 바뀌었다.
"왜 나만 이 꼴로 살아야 해. 왜 나만."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억울해. 다 죽어버려."
내 안의 새카만 어둠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 모두가 지옥에 빠지길 바랐다. 세상을 향한 저주의 언어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발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몸은 더 이상 내 의지에 따라주지 않았다. 더 걷고 싶은데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하늘을 바라봤다. 까만 하늘에 아스라이 반쪽 달이 떠 있었다.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말해놓고 마음이 서늘했다. 스스로가 형편없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땀으로 진득했던 목덜미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와 닿았다. 들끓던 분노가 점차 가라앉았다. 폐허가 된 마음속에 허무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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