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관 룸메이트들과 살면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잘자’였다. 학교로 출근했으나 아르바이트 직장을 거쳐 퇴근해 돌아오면 언제나 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충 씻고 늦게까지 과제를 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을지 계산하는 날들을 반복하며 노동시간만큼만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면이 극도로 부족했다.

사실 진짜 부족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원이었다. 다음 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질 좋은 식사를 할 시간, 질 좋은 수면을 할 시간, 질 좋은 대인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되찾을 시간이 없었고, 미래를 계획할 시간도 없었다.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도 돈과 시간은 필수다. 내가 각종 행사를 거절하는 상용구는 하나였다. 시간이 없어서요. 이 말은 곧 돈이 없어서요, 와 동의어였다.

청년의 빈곤에 대해 질적 방법론을 시도한 연구는 매우 적은데, 연구 대상자들은 하나같이 시간 자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현실에 묶여 있다. 살기 위해 했던 학원 일로 이력을 채워온 나는 언젠가 학원을 창업하겠다고 생각한다. 이 계획이 의외로 자연스러워서 깜짝깜짝 놀란다. 학원 일이 언제부터 나의 장래 희망이 되었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사람으로 살지 고민을 이어갈 시간이 없다. 내가 미래를 고민하다가 써버린 시간에 돈을 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13시간씩 일했던 주말엔 버거도 씹지 않고 삼켜야 했다. 나가기조차 귀찮으면 학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학원강사의 주식은 사실 컵라면이다. 스물부터 스물한 살까지 1년을 이렇게 지냈더니 「생로병사의 비밀」에 섭외될 몸뚱이가 됐다. "빈곤한 식사는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질병이라는 청구서로 날아"왔다. "배만 채우는 식사는 건강을 담보로 잡힌 후불 결제"35였던 것이다.

10킬로그램이 쪘고 생리가 끊겼다. 다낭성난소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젊음은 수면 부족, 불규칙적이고 질 낮은 식사, 과로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 성대결절까지 왔다. 그런데 성대결절인 줄도 몰랐다. 매일 6~7시간 연강을 해서 그냥 목이 쉰 줄로만 알았다. 어릴 때부터 달고 살던 편도염이 재발할 우려가 있어 편도 수술을 했는데, 대신 강의를 해줄 강사가 없어서 수술 후 2일차에 9시간 연강을 한 것이 목에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살과 병을 얻고도 나는 가난했으므로 쉬지 않았다. 학업을 그만두지 않았고 학원도 그만두지 않았다. 생리불순이 심각해서 어쩌다 한 번 하는 생리는 거의 하혈 수준이다. 10대 때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생리통도 극심해져 응급실에 가 링거를 맞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체력과 정신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지금은 믿을 만한 자원이 아니게 됐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싶어 과외를 하나둘 정리했다. 마지막 과외를 갔는데 학생이 자기가 다니는 영어학원의 원장님이 심정지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 주 일요일, 학원 수업과 수업 사이에 잠깐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토악질을 하다가 13시까지만 진료한다는 병원에 사정해 링거를 맞았다. 13시 반에는 수업을 다시 시작해야 해서 13시 20분까지, 3분의 2만 맞고 나왔다. 링거를 끝까지 맞는 것이 사는 쪽인지, 학원에서 잘리지 않는 것이 사는 쪽인지 저울질해볼 틈도 없었다.

대학(원)생과 학원강사, 과외 선생을 병행하던 6년의 최근 2년에는 이 책을 쓰는 일이 추가되었다.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 메모장에라도 몇 줄씩 썼다. 생명수가 될 줄 알았는데, 글쓰기까지 겸하면서 시름시름 앓는 일이 늘었다.

무기력했다. 나는 새는 중이었다.36 돈을 벌어도 벌어도 불안해서 나를 몰아붙이며 일했던 날을 버티게 한 것이 정신력이라고 믿었기에 이 무기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글을 쓰려고 퇴사한 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무기력, 퇴사, 하기 싫어 등을 검색하니 번아웃이 나왔다.

뇌파 검사상 나는 번아웃이 맞았다. 우울증도 있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했다.

나의 뇌가 감정적 회로보다 이성적 회로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사가 상담의 피치를 올렸다.환자분은 비범한 사람이에요. 괴로움을 처리하는 방식이 남들과는 달라요. 덜 슬픈 거죠. 적당히 기쁜 겁니다. 스스로를 달랠 줄 알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왜 저는 덜 슬픕니까. 덜 슬프고 적당히 기쁜 것이 좋은 겁니까. 제가 대단히 슬프고 끝장나게 기쁜 것을 잘 모르는 게 좋은 것이냔 말입니다. 의사의 어깨를 흔들며 묻고 싶었다.

노동 환경이나 강도를 차치하고 연봉 숫자로만 보면, 나는 꽤 잘 버는 축에 속하는 6년차 학원강사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먹방 유튜버에게 대리를 맡길 수 있는 여유분의 만족감이란 것이 별로 없다. 누텔라를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가난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번 맛보면 가난의 맛은 잊히지 않는다. 그 정도 수입이면 넉넉한 편이라고 주위에서 날 추어올려도 내 기분은 전혀 넉넉하지가 않다. "가난은 헤어나기 힘든 것이다. 그 인력에서 벗어나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헤어날 길 없이 우리를 집어삼킨다."40

만약 통장에 찍히는 0이 총탄이 되어 가난의 공포를 쏴 죽여줄 수 있다면 몇 개의 0이 필요할지 따지며 탄창이 넉넉하기만을 빈다. 연 1억을 벌어도 총알은 여덟 발뿐이니 가난의 공포는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같잖은 위안거리가 있다면, 그 빌런을 상대하는 내가 하릴없이 버텨낸 히어로라는 점이랄까. 오늘도 이 액션 스릴러 시리즈는 절찬 상영 중이다. 폐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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