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10대가 됐을 무렵, 열음네 사정이 확 나빠져 금곡주공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탈출이었다. 가족으로부터, 이 동네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먼저 탈출한 사람은 나였다. 두 살 많은 내가 먼저 대학에 진학하며 대구로 도망쳤다. 남은 열음은 종종 내게 전화했다.언니, 나 여기 싫다. 나도 나갈래. 언니, 거긴 좋나.

열음과 내가 끈끈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빠들이었다.24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알코올중독에 빠진 경훈과, 벌이는 사업마다 족족 말아먹은 영창은 간헐적 폭력배였다. 경훈의 조준 실력은 형편없어서 나는 날아오는 소주병을 더러 피할 수 있었으나, 열음은 무지막지하고 무식하게 주먹질을 해대는 제 아빠 영창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가 흘린 피가 우리를 피를 나눈 자매보다 더 자매 같은 사이로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열음이 말했다.언니,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야. 마치 전쟁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가난을 수군거리며 서로를 껴안는다.

여전히 담이와 태주와 나는 공통의 고통과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질투와 박탈감을 함께 나눈다. 담이와 나는 유년 시절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어른’에 대해서, 태주와 담이는 취업 준비 기간이 주는 비참함에 대해서, 나와 태주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명확한 한계를 표현할 수 없는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 토로(때론 토론)했다. ‘20대 청년’이라든가 ‘MZ세대’ 같은 용어의 기본값에 우리가 포함될까. ‘청년’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20대’에서 가난이 고려되지 않고, ‘MZ’를 ‘고생’을 모르는 세대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열음이 한 말이 백번 옳다.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다.

20대는 왜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을까. 돈이 부족해도 마음은 충만해야 하고, 최저임금을 받아도 사서 고생을 해야 하며, 학점에 취업 걱정을 하면서 연애도 해야 하고, 마른 지갑을 쥐어짜서 애인과의 기념일도 챙겨야 하고… 차라리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29 알게 된 편이 낫다.

스물한 살의 가을에 캐리어를 끌고 본가에 들러 책들을 챙겼다. 어차피 내 짐이라고는 책뿐이었다. 살림 집기가 아빠의 외상값으로 하나둘 처분되는 동안, 돈으로 바꾸기엔 헐했던 책들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끝내자, 이제.

전에 없이 아빠를 오래도록 응시하며 속으로 말했다.

아빠가 내 피아노를 버렸듯 나도 아빠를 버려야겠어.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겨울 계절학기에 ‘희곡의 이해’를 듣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교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택시에 올라타 아빠가 남긴 음성메시지들을 연이어 들었던 순간만은 선명하다. 다 잘못했으니 제발 전화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아빠의 목소리. 나는 대성통곡했다.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었으니 아빠의 부재에 대한 슬픔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눈물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꺽꺽 숨넘어가게 우는 내게 택시 기사님이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울음을 참는 끅과 끅 사이에아, 빠가, 돌아, 가셨, 나봐요, 라고 글자를 끼워 넣어 답했다. 기차역에 날 내려주며 기사님은 택시비를 받지 않으셨다. 그날은 12월 21일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아빠의 생일이 3일 남은 보통의 날이었다.

장례식은 치르지 않았다. 문상객들에게 아빠의 죽음을 설명하기가 괴로워서였다. 아내와 딸이 나간 집에서 혼자 지내다가 술 한 병을 비우고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구분하기에는 너무도 약한 시력이라 손에 잡히는 대로 털어넣고는 미안하다, 사랑했다, 라는 메모인지 유언인지를 남기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와는 한집에서 살 수 없다던 할아버지에게 부고를 전하며 송곳 같은 말을 뱉었다.죽어도 같이 못 산다던 당신 아들이 죽었습니다.

염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어서 엄마만 들어갔다.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된 우리 집의 불운이 한 명씩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끝나는 데스게임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아빠. 다음은 나일까. 화장하는 것은 볼 수밖에 없었다. 화장을 마친 자리에 하얗게 마른 정강이뼈가 보였다. 반바지를 입고 앙상한 정강이를 드러낸 채 앉아 있던 술 취한 아빠가 떠올랐다.
장례라는 것은 식을 치르지 않으면 정말 짧고 간단했다. 할머니의 무덤 옆이 아빠의 묫자리였다. 아빠를 묻고 나니, 날 괴롭히던 아빠가 이제 편안했으면 좋겠는 아빠, 그간 질리도록 괴롭혔으니 하늘에서는 부디 나와 엄마를 굽어 살펴주면 좋겠는 아빠가 되었다.

계절학기 수강과 학원 일을 하면서 이 건을 처리했다. 한겨울에 시내를 쏘다니며 손발이 시렸을 텐데 감각이 고장 났는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한 달 반을 매달린 끝에 법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정승인이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문득 귀가 엄청 시렸다. 아, 쌍꺼풀만이 아니었네. 귀도 아빠를 닮았지. 코도 아니고 정수리도 아니고 하필 귀가 시려서 짜증이 났다. 왜, 나는, 아빠가 이런 식으로 죽어서. 왜, 하필 이 겨울에 아빠가 죽어서. 어째서 나는 혼자 이렇게. 뼈가 삭을 것처럼 아팠다. 가혹했다.

이제 그만 죽어야겠다고 결심할 즈음마다 외할아버지가 날 보러 왔다. 구포시장이나 화명동 어딘가에서 밥을 한 끼 같이 먹고 헤어지곤 했다. 노쇠한 몸을 일으켜 날 찾아온 외할아버지를 만나면, 삶의 게이지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2 겨울방학에 학교에 나가 자율학습을 하던 중이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으면 교실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외할아버지 돌아가셨으니까 빨리 가방 챙겨서 나와.

고모와 연락이 닿은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아빠가 죽고 난 뒤에도 할아버지께 철마다 안부 전화를 드렸지만, 언젠가부터 내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 하시는 기미가 보여 그 뒤로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가족으로 묶은 실은 너무 닳고 닳아서 끊어지기 직전이었고, 아마 우리가 모르는 새에 투둑 미약한 소리를 내며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억지로 잇고 싶진 않았다.

고모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아빠를 앞세우고 1년쯤 지나서부터 치매 증세를 보였다.

술에 절어 쓰러진 아빠의 사진을 보낸 이후 메신저에서 차단당한 전력이 있지만, 엄마가 그 집과 계속 엮이는 꼴을 볼 수 없어 고모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엄마와 연락하지 마시고 앞으로의 일은 저와 의논해주십시오. 성인이 된 조카를 상상할 수 없었던 고모는 건성으로 알았다고 답장한 후 모든 논의에서 날 제했다.

고모를 계속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도와달라는 내 말에 손을 내밀어줬다면, 내 번호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아빠의 입원 수속에 함께 서명을 해주었다면, 내가 돈을 벌 수 없었을 때 알코올중독 치료비를 다만 얼마라도 지원해줬다면… 아빠가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고모도 아빠 죽음에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지만 며칠 뒤 할아버지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에 가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할아버지,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제가 어른이 될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어떤 어른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처받은 아이였던 시절을 체로 한 번은 거른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께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갓난쟁이였던 제게 주셨던 사랑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겪은 가난과 폭력을 방관하거나 공모했던 어른과 가족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왜 용서했나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봅니다. 가족이 문드러지는 동안 저를 구해주었던 것들이 가족 밖에 있었으므로,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 괜찮습니다. 또 오진 않을 겁니다. 노여워 마세요. 저를 지켜보시다가 혹 제가 이상한 결혼을 할 것 같으면 하늘에서 벼락을 쳐주세요. 할아버지도 그 정도는 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3대째 자살한 사람이 되면 기사에 날까. 이대로 천장이 내려앉으면 좋겠다. 잠들었다가 아빠처럼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최고의 죽음이네. 완전 날로 죽는 거지. 방바닥의 번개탄 자국은 지워졌나. 연기가 풀풀 나지 않았을까. 아무도 연기를 못 본 건가. 계절학기 망함. 재난 문자. 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이른 폭염 경보. 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1학기도 망함. 미안하다 사랑했다. 아빠의 유서가 드라마 제목이랑 비슷해서 우습다. "이상한 유언을 쓰다가 / 부끄러워 살고 싶어"31졌을 법도 한데. 휴학. 잘못된 아빠에게 들어간 돈. 아빠 병원비가 될 줄 알았던 돈. 수의도 싸게 하고 관도 싸게 했는데. 너무 싸구려였나. 엄마랑 갔던 세부 여행은 후회 말자. 아빠가 남겼던 음성메시지를 안 들어서 후회를 했던가. 무연고자면 좋겠다. 아무데서나 죽게. 학원. 월급. 삶을 영위하다. 땡. 삶을 마감하다. 딩동댕. 일어나기 싫다. 일어날 수 없어. 침대 매트리스랑 프레임 사이에 압착돼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싫다. 죽고 싶다. 억울하다.

씩씩거리며 한정승인 절차까지 혼자 처리했지만, 나는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자살 생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비자발적 빈곤과 알코올중독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친구가 교내 심리상담센터에서 10회 무료 상담을 해주니 가보라고 했다.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으면 무지하게 억울할 것 같아서 상담을 받으러 갔다. 친절하게 날 맞아준 센터 직원은 진로, 연애, 학업, 취업, 심리 상담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심리 상담을 받고 싶어요.어떤 종류의 심리 상담을 원해요?가족 관계요. 대답과 동시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사전 질문 단계에서 통곡하자 직원이 서둘러 날 상담실로 안내했다. 나는 보온 머그컵에 둥굴레차를 우려 마시던 여자 상담 선생님과 마주 앉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무엇을 털어내야 하는지 익히 알았던 것처럼 네 살 때 기억부터 흘려보냈다.

막상 입을 열자 남 얘기하듯 술술 말이 나왔다. 상담 선생님은 내 상태를 이렇게 정의했다.자신의 상황에 대해 감정적 표출을 하기 전에, 그것을 일단 해결해야 했기에 감정과 유리된 선택의 순간을 끝없이 마주하느라 남의 일처럼 자신의 일을 판단하게 된 거예요. 부드러운 말투로 상담을 이어가던 선생님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생선 바르듯 낱낱이 내 기분과 내 생을 분석해주길 바랐으므로 쉼표마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다음 분석은 대단히 짧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생했어요.

누가 머리 위에서 양동이로 눈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생이 아닌 생이 있기는 했나. 휴지 한 통을 비우며 눈물 콧물을 닦는 나를 선생님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러고는 하얀 도자기 머그에 둥굴레차를 우려 내주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선생님은 매주 차 한 잔을 마시러 오라며,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무료 10회 상담이 끝날 때까지 상담실에 갔다. 나는 무언가를 고백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질문했다.미성년 자녀에게 성인 부모가 응당 해야 하는 의무란 무엇인가요? 제가 선택한 것이 없으니 제겐 잘못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어도 되나요? 가족에 대한 제 로망은 이미 일그러졌겠죠? 아빠를 그만 원망하고 용서해야 할까요? 저의 불안은 가족에 대한 것일까요. 가난에 대한 것일까요? 왜 가족의 가난이 저의 가난이 될까요?

상담을 하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고모, 엄마, 아빠에게서 한 발씩 멀어졌다. 11회째부터는 상담료를 낼 수 없어서 상담을 받지 못한 내게 아직 해소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 2,000원이면 샀을 번개탄으로 죽은 아빠와 죽지 않고 입원해 월 80만 원짜리 치료를 받았을 아빠 중 내게 더 깊은 가난을 안겨줬을 아빠는 누구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