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했더라도 나는 떨었을 것이다. 분해서. 떨리더라도 말해야만 하는 것이 세상엔 많다. 젠더와 가난이 그렇다. 내 입술에 이소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걸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소호의 시집이 나오는 족족 읽었다. 아니, 섭취했던 것 같다. 가끔은 신물이 올라왔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 제사는 꼭 지내야 해서 소고기 한 줌을 사던 엄마의 옆에 서서 느꼈던 체증이 다시 느껴져서.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이소호는 첫 시집에서 한국의 가부장제와 가난 사이를 사실적 장면으로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집에서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다이즘을 시도했다. 실험적 기법이 엮인 시상은 우리 현실이 시보다 충격적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했다. 올해 4월, 이소호는 세 번째 시집을 냈다. 젠더-가난-예술이 혹처럼, 종양처럼, 열매처럼 서로를 증식시키는 이 시집에서 내가 제일로 꼽는 시는 「손 없는 날」이다. 엄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한 구절 한 구절 정성스럽게 타이핑해 문자로 보냈다. 엄마의 답장은 빨랐다.앞의 절반은 다 내가 했던 말이네. 시인이 여자가?

열네 살의 나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했다. 이토록 다른 세계가 있다면 좀 더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살고 싶어서 살았던 날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살아보고 싶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나는 미국에 와 있었다.

2009년 여름,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뜬금없이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부산지역본부에 가서 영어 시험을 쳐보라고 권했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나 한부모가정, 차상위계층 중에 영어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7박 8일의 미국 동부 여행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전달된 온갖 복지 공문을 내게 알려주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날 유독 들떠 있었다. 해외여행이라는 것은 못 갈 줄 알았는데.

빼곡한 여행 일정표를 받아 들고 돌아와 한동안 분주했다. 엄마 친구에게서 신혼여행 이후로 한 번도 쓴 적 없다는 대형 여행가방을 빌렸고, 일주일 치 비염 약을 타 왔다. 엄마는 입국 심사 때 이 약에 대해 물어보면 영어로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채근했다. 떠나는 날이 2주 정도 남았을 즈음, 신종플루가 유행하더니 여행이 취소되었다. 가난한 애한테 어쩐지 잘해주더라니. 나의 기대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미국 여행을 가보겠다고 같이 영어 시험을 치렀던 한 아이가 여행을 다시 진행해줄 수 없겠느냐고 재단에 손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재단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어른이라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미국 서부 여행 계획서를 내밀었다. 담임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제 능력으로 미국 여행을 가는 애라면서 교무실 청소를 하러 간 나를 치켜세웠다. 가난하고 어린 사람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온도는 이렇게 요동치곤 했다. 취소했다가 사과했다가, 깔보았다가 추어올렸다. 사무적이었다가 다정했다가, 냉했다가 끓어올랐다. 끓어오른 자신에게 도취되었을 뿐, 사실 가난하고 어린 사람에겐 관심이 없었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은 착실했다. 좀 모나고 건방져도 좋았을 텐데. 행운의 수정 구슬이나 디즈니 캐릭터가 크게 박힌 후드 티를 갖고 싶어 하면 보호자로 동행한 멘토 선생님이 선뜻 용돈을 주셨지만, 정작 그것을 사는 아이는 없었다. 여행 막바지에 들른 월마트에 가서야 할머니께 드릴 영양제와 동생에게 줄 초콜릿과 노트, 그리고 미국이 훨씬 싸다는 생활용품을 담았다. 멘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디즈니 후드 티를 선물해주자, 몇몇 아이가 울먹였다. 선생님께 뭔가 보답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이들은 일주일 전보다 강인해진 입매로 한마디씩 했다. 꼭 가족과 다시 오겠다, 나중에 나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 선생님이, 의사가, 작가가 되겠다. 그들은 그때의 다부진 약속들을 지켜냈을까.

아빠가 죽고 스물한 살의 나는 적금 통장을 탈탈 털었다. 나만 다녀왔던 미국 서부 여행을 엄마와 함께 가기 위해 찔끔찔끔 모으던 자금이었다. 7-8년 모아야 할 돈이었는데, 아빠의 돌연한 죽음에 상처 입은 모녀관계를 돌보는 이벤트가 필요해 깨버렸다. 엄마도 비상금 100만 원을 내놓았다. 우리 모녀는 필리핀 세부 여행 패키지를 끊었다.

세부 여행이 달콤했던 것만은 아니다. 패키지여행 버스가 지나는 도로 옆으로 판잣집이 빼곡했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서면, 아이들이 버스에 다닥다닥 붙어 여행객들을 향해 손가락 욕을 했다.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 모양이 적나라하게 Fk You를 그렸다. 그들 사이에서 어릴 적 내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화명주공이 재개발되기만을 기다리며 수시로 찾아오던 양복쟁이들에게 내가 눈을 흘겼던가. 디즈니랜드 기념품 가게에서 품 안의 달러를 만지작거리면서 한숨을 쉬었었나, 욕을 삼켰었나. 순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저 아이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내 피해의식이었다. 그저 욕을 달고 사는 10대 청소년일지 누가 알까. 차창에 비친 내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까무룩 잠이 든 엄마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평화로웠다.

모녀가 아껴 먹는 사탕의 끝 맛은 쓰고 맵고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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