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과 스타킹 사이’는 내가 잘하는 연기였다. 2010년대 중후반, 부산의 중·고등학생들은 가을, 겨울에 살구색 스타킹을 고집했다. 검정색 기모 스타킹은 소위 ‘재미없는’ 애들이 신는 것이란 분위기가 다분했다. ‘재미있는’ 친구 역을 맡기 위해 나도 살구색 스타킹만 신었다.

어쩌다 한 번씩 엄마는 내게 ‘교양’을 전수했다. 김밥천국 돈가스를 두고 포크와 나이프 쥐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허연 각질이 들고 일어나지 않게 얼굴에 바르고 남은 로션을 팔꿈치나 무릎에 바르라고 일러주었다. 가난이 표가 날까 봐 그런 것들로 얼기설기 기웠다.

석사(수료)에 대한 변
대학 졸업 후 부산 집으로 내려가 취업하는 것과 대학원생이 되어 공부를 더 하는 선택지가 내게 있었다. 대학원이라니. 2+1 삼각김밥을 기다리며 버티는 대학 생활에 신물이 났지만, 가난해도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경험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박사까지 필요한 추정 학비 3,000만 원은 없었지만 학석사 연계과정을 신청하여 일단 대학원에 진학했다.

연기
나는 스타킹이 없었을 뿐인데 맨살을 내놓고 다니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애가 되었고, 아빠의 편지는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그 사실을 발화하면 불행한 애가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나의 연기는 끝날 줄 몰랐다. 무엇에 눌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주눅 들지 않으려고 이런 말, 저런 제스처를 꾸며냈다. 만사에 무관심하게 굴면 차라리 가난한 티가 덜 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세상 쿨한 연기자가 되었다. 나는 가난도 부끄러웠지만, 그렇게 애쓰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숱한 제도적·실천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결핍이란 지워내야 할 불운, 수치, 숙명"23으로 통용된다. 가난한 이들은 불운과 수치, 숙명에 묶인다.

나는 가난한 내 삶을 지독하게 원망했다. 왜 하필 이런 가족일까, 왜 하필 이런 방구석일까, 왜 하필 딸일까, 왜 하필 1997년에 태어났을까, 왜 하필 부산이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왜, 도대체 내가 왜, 가난을 베개로 베고 비참함을 이불로 덮어야 할까. 가난은 이유 없는 벌이다.

석사 첫 학기를 맞은 나는 교수님과 석사 동료들로부터 인상적인 질문 세 개를 받았다.

Q1. 부모님이 학업을 도와줄 수 있는가?
Q2. 남자친구가 있는가? 있다면 직업이 무엇인가?
Q3. 결혼 및 임신 계획이 있는가?

내 대답은 이랬다.

A1. 도와줄 수 없다.
A2. 지금은 없다.
A3. 결혼 생각도 없고 임신 계획도 없지만 아예 없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것은 나의 기도문이 되었다.

가난한, 여자, 대학원생은 냉정하게 따져 수지타산이 안 맞는 계획이었다. 백석 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차라리 수강생을 주말에만 몰아서 받고 월 200만 원을 받는 파트타임 학원강사를 하는 게 글 쓸 시간을 보장해주지 않을까? 주 7일 몸을 혹사하면서 2년 바짝 돈 벌어서 학원을 차릴까?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치자, 내가 박사를 하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내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엄마가 남들에게 우리 애는 공부한다며 뒤끝을 흐리는 걸 참을 수 있을까? 한 학기가 지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글쎄, 나는 행복과 현명이 저토록 부드럽게 연결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과연 행복과 현명이 있는지는 해보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게 멈춘 나의 최종 학력에는 필히 괄호가 붙는다. 문학 석사(수료).

허리띠에 손이 닿기 전, 농담처럼 백석 시집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책장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더라니, 기어이. 책이 나뒹굴며 종이가 구겨졌다. 죽고 싶은 와중에도 책이 구겨진 것이 신경 쓰여서 인상을 찌푸린 채 책을 문댔다. 이 시는 그러다 읽게 됐다. 손가락으로 시구들을 매만지며 입 안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새로 취임한 젊은 남자 정교수는 석사논문을 쓰지 않고 수료를 택한 나를 못마땅해하며 충고했다.다들 힘들어도 학위논문까지는 씁니다. 수료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에요. 열심히 일과 공부를 병행해서 ‘겨우’ 수료하는 것을 전부 ‘의미 없는 짓’으로 눙치는 그가 야속했다.
한 번도 차려입고 수업에 가지 못했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멀쩡한 원피스를 입고 간 날은 종강일이었다. 갖춰 입은 모습이 보기 좋다던 그에게 일을 해야 해서 결국 학업을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자 그가 물었다.그쪽을 선택하는 게 행복하고 현명한 선택입니까? (그는 늘 돈 버는 일을 그쪽 또는 그런 방법이라며 지시 대명사로 칭했다. 돈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도 저어된다는 듯이.)

아빠가 알코올중독자에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함구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재빨리 가족 예능 프로그램 속 아빠들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애정의 스킨십을 했는지 떠올리곤 했다. 하루는 친구가 아빠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받았다며 자랑을 했는데, 아빠가 그렇게 다정한 선물을 한 데에 깜짝 놀란 마음을 누르고 명랑하게 말했다.

이삿짐센터를 부를 양도 아니거니와 돈도 없어서 택시를 불러 짐을 트렁크에 쑤셔 넣었다. 기사님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붙였다.아이고, 아가씨가 고생하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까 힘내요. 그 전형적인 위로가 신산한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정말 싫어했는데도.

이어진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A: 박사 학위를 따려면 여자는 결혼을 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 왜요?
A: 결혼하면 내조도 해야 하고, 애라도 낳으면 공부가 뒷전이 되니까.
나: 그건 남자 대학원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A:에이, 남자들은 안 그래. 남자가 임신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남자는 결혼해도 박사 따는 데에 5년이면 돼.
여자는 결혼만 하면 흐지부지하다가 7년은 걸리지.
나: 아….

또 다른 대화.

B: 부모님이 못 도와준다는 말, 앓는 소리 아냐?
나: 아닌데요.
B:부모님이 말씀만 그렇지 결국 도와주실걸.
온 씨가 가계 사정을 다 몰라서 그렇지.
나: 아….


2022년 6월, 나는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동안 1,000만 원가량의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서 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료 전 마지막 학기에는 부산 기장군에서 대구 산격동으로 기차 통학을 하며 극악의 스케줄을 견뎌야 했다.

술에 취해 거실 겸 큰방에서 잠든 아빠를 피해 나는 유일한 안식처인 작은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구라고는 책상이 전부였고, 이부자리는 방바닥 한 귀퉁이에 쌓여 있었다. 베개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벽의 모서리를 응시하다가 벽면에 걸린 아빠의 옷과 허리띠에 시선이 닿았다. 합성피혁 허리띠가 목에 감기면 풀리지 않을 것처럼 질겨 보였다. 누구는 문고리에도 허리띠를 걸고 자살했다던데.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H관을 탈출한 내가 몹시 대견했다.

이사 다음 날, 전입신고를 위해 주민센터에 들렀다. 본적지가 부산에서 대구로 바뀌었고, 주민등록등본에 ‘세대주’라는 신분이 적혔다. 화명주공과 금곡주공의 공주가 H관의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LH라는 호박마차를 타고 G힐의 신데렐라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신고서였다.샬라카둘라 매치카둘라 비비디바비디부~ 다음 집은 어디가 될까, G힐 다음엔 힐스테이트일까.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비비디바비디부~ 주문처럼 철지난 CM송을 흥얼거렸다.

그래도 시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다. 나는 공부하기를 사랑했다. 과제용 소논문을 쓰기 위해 선행연구를 뒤적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모르는 한자를 옥편에서 찾아가며 백석의 옛 시들을 읽을 때면 마음에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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