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 귀엽다, 착하다, 통통하다(응?) 아내가 지겹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거다. 아내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웃기다’와는 결이 다르다. 결과적으로 웃음이 새 나오는 거야 비슷하겠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음의 긴장이 풀리는 것.’ 이게 핵심이다.
꼬투리 잡히지 않게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무던한 사람인 척 행동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아내 앞에선 없다. 만약 집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여기가 내 집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해도 된다는 당연함. 나에겐 꽤나 낯선 감정이다. 아내는 ‘틀리다’는 말도 ‘다르다’라고 발음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힘껏 내가 될 수 있었다.

어릴 땐 사람이 없는 시간이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사람이 진짜 외로워지는 순간은 혼자일 때가 아니라, 함께 있음에도 여전히 혼자 같은 순간이었다. 내가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을 때, 사람은 진심으로 외로워졌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아니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옆 사람이 아니었다. 내 사람이었다.

세월이라는 호르몬은 비누로는 닦아낼 수 없다. 기름기 없이 뽀득뽀득 몸을 닦아내도 몸 안에서 새 나오는 냄새에는 방도가 없다. 절망이란 이토록 일상적이다. 대단한 것에 실패할 때보다 당연한 것을 해내지 못할 때 인간은 더 크게 좌절한다.

늙어가는 게 싫다는 생각을 부쩍 자주 한다. 청년이라는 단어의 범주가 점점 넓어지면서 어찌저찌 다리 한쪽은 걸친 채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벌써 중년이다. 젊음은 어느새 추억 같고 나도 이제 끝물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입에 담는다.

세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노인의 삶은 분명 멋지다. 그러나 세월이라는 반격 불가능한 타격에 저항하는 삶 또한 존경스럽다. "어쩔 수 없지" "이런 게 인생인 걸"이라는 자조보다 여전히 눈앞의 문제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어쩌면 가장 큰 젊음일 것이다.

초단기 기억상실은 흔한 질병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아닌 고작 1분 전의 기억을 놓쳐버리는 질병으로 주요 원인은 나이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있는 ‘스마트폰’이다. 또 스마트폰이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냐. 진짜로 안 좋은걸.

스마트폰을 하는 모든 순간 나는 내가 쉬고 있는 줄 알았다.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이라곤 손가락, 그중에서도 엄지와 검지밖에 없었기에 나는 내가 여유를 즐기는 줄 알았지만, 전혀. 내 머리통은 야근 중이었다.

감각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스마트폰, 티브이, 노트북, 지하철 플랫폼 소리, 옆 사람 다리 떠는 소리, 유튜브 자막 등등. 나노 초단위로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뇌로 주입되는 정보에서 완벽히 해방되는 시간이 우리의 감각에겐 필요하다.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스마트폰과 컴퓨터로부터 눈과 귀를 차단하고, 너덜너덜해진 오감에게 조용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감각은 모든 노동자가 그렇듯 파업을 하기 때문이다. 뇌는 쇠파이프를 두들기며 두통을 만들 것이고 귀는 밤새도록 이명을 노래처럼 부를 것이다. 초단기 기억상실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잃지 않고 싶은 기억과 추억이 많아질수록 우린 보다 고요해져야 한다. 감각의 셔터를 내리고 조용히 더 조용히 스스로에게 정적을 제공해야 한다. 깨끗한 밤에만 활동하는 반딧불이처럼 그제야 감각은 스트레칭을 하고 차 한 잔을 즐길 테니까.

감각은 정지가 아니라 정적을 좋아하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어느새 어색하지 않고 편하다.

사람이 싫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더 좋아졌달까. 맞지 않는 관계에서 멀어지니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남게 됐다. 거기다 만남의 횟수까지 획기적으로 줄이니 만날 때마다 애틋해지는 것은 덤이다.

웃긴 일이다. 사람에게서 멀어지니 사람과 가까워졌다. 나와 내 사람들이다.

최근엔 의도적으로 혼자가 된다. 의미 없는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려다 가족에게 써야 할 에너지까지 낭비하지는 않는다. 지인들의 때 묵은 감정 배설은 정중히 사양할 줄도 알게 되었다. 거기다 한 달 중 며칠은 나와의 대화를 갖기 위해 공실로 비워둔다. 외롭지만 생산적이다. 맞다. 생산적인 외로움이다.

뭐 그러다 가끔 놀랄 만큼 휑해진 일상에 겁을 먹고 무엇이든 채워볼까 고민도 하지만, 그전에 스스로에게 꼭 묻는다.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지? 나에게 쓸 용량 30%. 아내에게 쓸 용량 30%. 가족에게 20%. 그리고 남은 20%, 아니 혹시 모르니 10%의 용량만큼만 관계를 채운다. 감당할 수 없는 관계를 우걱우걱 삼키다 또 체하지 않도록. 깜지처럼 뻑뻑히 관계를 채우다 마음이 또 까매지지 않도록.

오늘도 나는 최대한 현명하게 외로워지려 한다.

나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너무 걱정됐다. 오늘 잘 살았냐는 배부른 소리는 구겨서 저 멀리 버렸고, 내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만을 머릿속에 꽉꽉 채웠다. 꼭 생존밖에 없는 유기견처럼 경계심이 강해졌다.

그래서 화를 냈다. 그것도 자주 냈다. 틈만 나면 절약을 요구하고 생필품도 다 사치처럼 보였다. 나도 이러는 내가 지지리도 싫었다. 너무 처량해서 보기 역했다. 그러나 오늘로 다시 되돌아오는 방법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누가 좀 알려주길 절박하게 바랐는데 너무 커버린 내게 삶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살아내야 했다.

낭비하진 않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것만큼은 통 크게 장만해줄 수 있는 멋진 가장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너무 어리석고 작아 아내의 마음에 가끔씩 골을 넣기도 했지만 이내 또 자살골을 넣기 바빴다. 다정함도 능력이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몇 가지 남루한 노력밖에 없었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함부로 불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현명함이란 의외로 행복의 양을 늘리는 것보다 불행의 양을 줄이는 데 더 많이 쓰인다. 일단 한번 불행으로 물든 마음은 어떤 행복으로도 쉽게 퇴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은 행복에 비해 너무 강하고, 구체적이다. 행복이 상상이라면 불행은 일상인 것이다. 어른이 될수록 불행에 대한 수비력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내 인생은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고, 생각보다 행복하다.

나는 불행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고 하니 불행했기 때문이다. 부족했던 건 행복의 양이 아니라 일종의 기준점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불행이 발견되면 일단 연필로 기준점을 긋는다. 거기서 통과하지 못한 것들은 절대 불행으로 등록해주지 않는다. 이게 내가 불행을 수비하는 방식이다.

사람이란 의외로 행복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충분한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 와 누군가 내게 행복이 뭐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불행이 없는 상태."

행복이란 짜릿함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편안함과 안도감. 안정감과 잔잔함. 깊은 밤 고민 없이 잠들 수 있는 감사함 또한 우린 행복이라 이름 붙일 수 있기에.

부쩍 불행하다는 기분이 자주 든다면,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생각에 괴로워질 때가 많다면.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스스로에게 한 번만 물어보자.

"내가 정말로 그렇게 불행해?"
세상이 주는 답에 잠시만 가위표로 반창고를 붙여보자.
행복이란 귀를 열 때보다
귀를 닫을 때 오히려 더 잘 찾아오니까.

에필로그

우린 너무 쓸데없이 불행하고
너무 복잡하게 행복하다

불행이란 기다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막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것.

물론 위인들의 말처럼 추위도 이겨낼 만큼 튼튼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떤 비교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마음을 키우는 건 또 어떻고. 그런 대단한 일을 이뤄내기 전에 아마도 나는 늙어 죽을 것이다. ‘인생은 불행한 거야’라는 슬픈 체념을 부정하지 못한 채.

그럴 바에 차라리 옷을 더 단단히 입고 집 안의 보일러를 낭낭하게 트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어떤 비교에도 흔들리는 좀생이 같은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나를 작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서 멀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이야기들은 그런 목적에서 쓰였다.

당신이 행복하기에 앞서 쉽게 불행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즐겁기 이전에 별 탈 없는 삶을 이어가길 바란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여름철 모기마저 수행이라 버텨내는 사람이 아니라, 꼼꼼히 방충망을 치고 모기향을 켠 뒤 잔잔한 밤을 보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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