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귀여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귀여운 것을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요즘 사회에서 나를 죽이는 것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 때문에 스스로를 재우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늘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그 불꽃같은 마음마저 살기 좋은 온도로 식혀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귀여운 것들이다.
가족이 가족을 위로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서로에 대한 위로는커녕 서로의 불행을 바라지나 않으면 다행인 세상이다. 그런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은 여간 벅찬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럴 때 속는 셈치고 귀여운 것을 한번 찾아보자. 고양이든 수달이든 아이든 캐릭터든. 뭐든 좋으니 귀여움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경직된 내 마음을 녹이는 그 작은 것들을 찾아가자.
귀여움은 모든 것을 이겨버리니까. 스트레스마저도.
나는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사진 찍을 시간에 뭐 하나라도 눈에 더 담아야 옳게 된 여행이라 여겼고 추억이란 볼 때가 아니라 떠올릴 때 더 깊은 맛이 난다고 꼿꼿하게 강론했다. 오산이었다. 젊든 늙든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많은 추억을 남겨주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생각보다 더 추억으로 남지 못했다. 저화질로 풍화되어 내 머릿속 어딘가를 둥둥 유영하고 있을 뿐, 절대 인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지갑만큼이나 카메라를 잘 열어야 했다. 늙어서 돈이 없는 것만큼 서러운 게 추억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고작 10년 전만 해도 사람을 싫어하는 데는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끊기보다는 맺기가 더 각광받았고 피치 못할 이유로 관계가 끊어지면 설사 피해자라도 불편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모두의 합의가 이루어진 악인을 제외하면, 우린 사람을 싫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표현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관계는 꼭 발효식품 같았다. 모든 발효식품이 으레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대체로 풍미 좋게 익어갔지만, 한번 썩어버리면 어떤 음식보다도 더 고약한 악취가 났다. 추억이라는 방부제를 아무리 쳐봐도 이미 썩은 관계 위에 핀 곰팡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붙잡을수록 더 괴로워지기만 했다.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때로는 소유하지 못한 고통보다 소유하는 불편함이 더 크다. 그 말처럼 빗금 쳐진 관계까지 끌어안으려다 소중한 마음까지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놓아줄 것은 놓아주고 소중한 것에 더 집중하는 성숙함을 배울 것이다.
사람을 싫어해도 괜찮다. 소중한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서.
사람의 진짜 우아함은 무너졌을 때 드러난다고 한다.
윗사람에게 깨진 날 후배를 대하는 태도나 안 좋은 일이 넘친 날 웃으며 인사할 줄 아는 여유에서 우린 그 사람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우아함이란 다시 말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두 조각난 날에도 평소처럼 인사하고 웃고 공들여 사과할 수 있는 태도.
마음이 지옥 같은 날, 모든 게 실패한 것 같은 날일수록 보다 공들여 웃고 감사하고 인사하자. 나를 위해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작은 태도가 어떤 말보다 강력한 신호가 되어줄 테니.
오늘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오늘 다시 시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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