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만 애쓴다고 느껴질 때
with 아리스토텔레스

친구 사이에 대한 고민은 친구가 있는 한 계속됩니다. 나이가 든다고 친구에 대한 애정, 기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전히 서운하고 여전히 속상하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다툰다고 하잖아요. 물론 선연락, 연락횟수, 빈도를 일일이 따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매일같이 얼굴 보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친구가 나를 먼저 찾아도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게 서운하고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뭐가 되었든 너와 나 사이 관계의 저울이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으로 과하게 기울어져 있을 때가 문제가 되지요.
그것은 우정의 본성이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균형 잡힌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우정은 어떤 유형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의 유형을 서로에 대한 친애의 마음이 무엇에 근거하는지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쓸모 있는 우정’입니다. 생존 활동을 하며 유익함을 나누는 친애 관계가 바로 이 유형에 속합니다. 말하자면 좋은 비즈니스 관계라고도 할 수 있겠죠.

두 번째 유형은 ‘즐기는 우정’입니다. 말하자면 ‘놀이 친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친구 그룹 중에서도 이것을 할 때는 유독 이 친구와 죽이 잘 맞는다, 평소에 아주 가깝지는 않아도 저것을 할 때는 꼭 이 사람한테 연락한다! 하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이 유형의 우정에 포함됩니다.

마지막 유형은 서로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으로 친애 관계가 형성된 친구 사이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귀하고, 가장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우정은 바로 이 유형입니다. 유용함 덕에 친해진 관계는 더 이상 서로가 유익하지 않을 때 깨어지기 쉽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권유하는 친구 사이, 좋은 우정은 서로가 서로를 그 사람 자체로 좋아하는 관계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 쓸모 있는 것을 줄 수 있거나 나를 신나고 재미있게 해주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같이 즐겨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상대를 좋아하고, 가까운 관계로 계속 교류하며 지내고 싶은 것이죠. 말 그대로 그 사람이라는 인간 자체에 반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경한다면, 거리 두기

좋은 사람, 충실한 삶이란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답게 잘 사는 사람, 좋은 사람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웰빙well-being이라는 개념은 이런 생각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웰빙은 말 그대로 잘 존재함이라는 뜻이니까요.

이성적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 힘을 중심으로 나머지 것, 생존 본능, 감정, 기타 욕망 등을 조화롭게 조정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동물이란 ‘인간은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내가 내 인생을 충실히 살려고 할 때 내가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입니다. ‘충실히 산다는 것은 가능하면 좋은 선택을 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내 삶의 매 순간마다 이를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아무리 내가 머리 터지게 고민해도 그 사람의 바로 그 입장, 그 시선,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내 것이 아닌 이상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내 입장의 최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그와 나의 동등함에 대한 인정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친구 역시 나처럼, 나와 동등하게 자기 나름의 삶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마음이요.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정에 거리 유지가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상대에게 나처럼,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고 선택할 것을 강요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에는 시간을 들여서, 균형을 잡아가며

일단 철학자들은 친구를 천천히 만들라고 조언합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속도보다는 조금 속도를 낮추고, 지금까지보다 더 많이 살펴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나와 그 사람이 서로 추구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견주어 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살펴보아야겠지요. 중요한 일일수록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내가 상대에게 하는 것에 정확하게 비례해서, 혹은 내가 상대를 대하듯 나를 대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똑같이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에요. 상대는 나와 다른 사람이고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자랐으니, 말이나 행동이 나와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만일 기본적인 친애와 존중이 무너졌다고 느낀다면 그 관계에는 이제 다른 판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노력, 나를 낮추고 친구만을 배려하는 노력이 우정에 필요한 전부는 아닙니다.

나를 나의 친구처럼

사람은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있으며 우리가 거리감이 있는 것은 단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에도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서 서로 대하는 것이 다르고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누구에게는 가족이나 애인이 무척 중요한 관계이겠지만 또 누구에게는 친구 관계가 가족이나 애인보다 더 중요한 삶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이렇게 친구를 대하듯이 대해주세요. 적절한 거리 두기가 어려울 때는 앞뒤 좌우 어디로도 여유 공간이 없다고 느껴질 때거든요. 자신의 슬픔, 실망, 분노 등을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 괜찮은 척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에도 조금의 여백이 생깁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 만큼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지요. 정말 개선하거나 새로이 시도해보고 싶은 것은 그때부터 생각하고 실천해도 좋습니다.

11. 부모와 잘 지내는 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with 율곡 이이

어느 날 부모님의 등이 작아 보이면 그때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아 나의 부모 노릇을 하던 그때의 엄마 아빠는 너무나 젊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모 됨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더욱 여러 가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 더 미안하기도 하고, 더 애틋하기도 하고요.

부모와 잘 지내는 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from 율곡 이이 선생님

먼저 율곡은 자기 멋대로만 행동하지 않고 부모님께 자세히 말씀드리고, 그 행동을 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더라도 혹시나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그 행동을 바로 실천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부모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어서 때로는 부모님이 사람다운 도리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도 있으니까요. 부모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거든요. 율곡은 만일 그렇다면 씩씩거리며 화내는 태도가 아니라 차분하게, 표정도 좋게 하며 말투도 부드럽게 부모님께 다시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옳은 일이라면 그 같은 부드러운 태도로 반복해서 부모님을 납득시키라고요.

그리고 살림살이 또한 언급합니다. 살림을 맡아서 스스로 부모님을 위한 좋은 음식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요. 다만 그 시절에도 그만큼의 경제적 여유를 모두가 갖출 수는 없었는지, 많은 사람이 부모의 양육을 받지만 자기 힘으로 봉양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또한 삶 전반의 태도와 특별한 상황에 대한 코치도 있습니다. 밖에 나갔다고 엄마 아빠는 아예 잊고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는 일, 그렇게 망나니처럼 노는 일만으로 허송세월하지 않는 것도 효도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좋은 관계, 부모라고 예외가 아니다

모두 다 제대로 실천하려면 어렵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그 실천이 어마무시하게 어려운 행동은 아닙니다.

핵심은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미리 충분히 설명하고 의논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과의 대화를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도 포함해서요. 곧, 충실한 의사소통을 하라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밖에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기본적인 예의를 부모에게는 잘 챙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못되게 군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애정이 아니라 의무 관계라 힘들어요

의무의 핵심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주인공이 나이기 때문에 의무감은 부담감과도 이어집니다. 남에게 떠넘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리광 부리지 말고 어른의 책임을 다하라는 관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이 관계를 의무로 느끼는 것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 부모를 기꺼이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무라 여겨지는 것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의무’라고 인식하면 그 일은 강제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기쁘게 선택했다는 기분이 잘 들지 않는 것이지요.

가족은 비즈니스 관계, 고객 응대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인데 그게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부모를 애정하고 싶은 것이지요. 효를 강조하는 유학에서도 그 근본은 정 곧, 마음에 있는 것이지 각 잡듯 딱 맞추어 획일화된 예절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상적인 가족, 실제로 우리에게 없었던 것

예외는 때로 애정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퇴행적인 행동 곧, 어른 같지 않은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이 관계를 신뢰하고 안전하게 느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세운 마음의 벽을 가까운 이에게는 좀 낮추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리광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애정이 공경보다 넘치는 것을 주의하라는 율곡의 말을 우리는 ‘가족’ 혹은 ‘부모 자식 관계’, ‘애정’에 대해 의심 없이 믿었던 생각을 돌아볼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 애정이 전부가 아니듯, 부모에 대해 때로 의무감을 느끼거나 애정보다 더 큰 의무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꼭 이상한 일이라거나 나쁜 관계라는 뜻은 아닙니다

타인을 대할 때 갖는 최소한의 호의와 신뢰를 오히려 부모에게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요. 그 경우 부모에게 남들에게 하듯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 관계를 대하는 일 자체를 더 힘겹게 만듭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나는 어리고 부모만 성인이었던, 이미 내가 경험해본 시기를 지나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겪어본 적 없는, 나와 부모님 모두가 성인인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맡게 되는 역할도 더 많아지고 다양해집니다. 이유도, 형태도 관계마다 다르지만, 어찌 되었든 나와 부모 모두 이 관계에서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순간을 겪으며 이 관계를 새로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결코 같지 않지만 동시에 같은 관계?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은 그 시대적 조건에 따라 가족을 다르게 규정해왔습니다. 어떤 철학자에게는 가족의 핵심 요건에 사랑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신 경제적 관계가 들어가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집에서 그 집의 경제의 한 축으로서 노동을 담당하는 노예 역시 가족으로 간주하거든요.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가족 규정에도 공통적인 것은 부모 자식 관계는 비대칭 관계라는 생각입니다.

부모가 나를 먹여 살렸듯 내가 성인이 되어 부모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어서만은 아닙니다. 저마다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느끼고 결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대칭적 관계입니다. 나와 부모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이끌고 싶기 때문에 때로는 부모와 충돌하고 대립하며, 때로는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고요. 부모님 역시 당신 나름의 생각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이 서로 다른 인생은 결코 같아질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가능하면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열린 마음과 그 마음을 실천할 최소한의 여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의사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남겨두고, 관계가 잘되지 않을 때 잠시 쉬어가거나 도망칠 수 있는 용기도 남겨둡시다. 너무 여력이 없으면 관계를 잘 맺고 싶다는 마음마저 닳아버리니까요.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숙제는 사회가 개인의 전체 생애주기에서 관계를 위한 마음과 에너지를 충분히 허용하는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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