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만큼 설레게 하는 것도 없다. 따분한 날들을 보내는 어린 학생들은 학교 축제를 기다린다. 그때만 잠시 예외적인 자유와 창의적인 생각을 폭죽처럼 터트릴 기회가 찾아온다.
왜 사람들은 축제를 원하며, 공동체는 축제를 자신의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하려는 걸까? 축제의 사전적 뜻은 ‘축하하여 벌이는 큰 행사’이다. ‘제사’의 의미 또한 지닌다. 세속적 삶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은 고대 세계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곧 축제였다. 축제는 성스럽고도 세속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축제에는 노래와 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다. 즉 일상의 기분을 바꾸어줄 즐거움이 있다. 이는 축제가 노동으로부터의 방면을 뜻한다는 것, 축제란 곧 ‘놀이’임을 알려준다.
축제의 또 다른 얼굴이라 해도 좋을 ‘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놀이를 주체와 동떨어진 어떤 대상처럼 여길 수 없다. 놀이를 즐기려면 하나의 고립된 주체가 대상을 멀거니 바라보듯 해서는 안 되고, 놀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놀이 속에는 놀이의 고유한 법칙이 있을 뿐, 자신의 독자성을 고집하는 주체는 사라진다. 여럿이 함께 넘는 줄넘기나 강강술래 같은 놀이에는 놀이 자체의 법칙이 있지, 주체의 독자적인 의지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축제는 해마다 다르고 새로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축제의 시간은 우리의 통상적인 직선적 시간을 통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축제는 ‘회상’이 아니다.
축제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축제의 시간, 반복의 본질이다. 반복은 이미 존재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반복이다.
인간에게 축제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축제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잃어가며 늙어가는 운명을 벗어나 매번 새로 태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축제 속에서 삶은 되찾을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실현된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린다면, 축제가 시작과 삶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모든 삶은 위안을 필요로 한다. 강한 이에게도 약한 이에게도 삶은 끌고 가기 힘든 수레인 까닭이다. 우리는 무엇에 위로받는가? 어떤 이들은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 같은 말이 우리를 지탱해준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념들은 물론 의미 있으나, 위안을 준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것 같다.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을 어떤 내용으로 꼭꼭 채워 넣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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