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회색 점퍼, 흰 운동화 차림으로 뭔가 가득 찬 백팩 하나만을 메고서 중고 완구점 구석을 기웃거린다. 흔히 ‘오타쿠’라 불리는 자, 그는 ‘레어(희귀) 아이템’을 쫓고 있는 수집가다. 오타쿠의 역사는 깊다.
그들은 수집이라는 꿈속의 길만을 걸어간다. 세상의 어떤 사물에 몰두하지만, 동시에 세상 바깥에서 기존의 세상이 바라보는 방향과 정반대 편에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 같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런 허무한 재테크로서의 수집이 아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작업’으로서 수집이다. 발자크가 그의 형편없는 수집 취향을 소설 속으로 가져와 수집물들에 투영했을 때 그것들은 한 시대의 진실을 새기는 유물들이 되었다. 그렇다. 어떤 진실은 역사가의 공식적인 기록에 남지만, 그보다 더욱 귀중한 진실은 어쩌면 개인적인 수집품들 속에 남을 것이다. 하나하나 모은 수집품들은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와 같은 효과가 있다. 잊힌 과거를 갑자기 의미심장한 보석으로 만드는 효과 말이다.
진정한 수집가란 이미 공적으로 가치가 정해진 물건의 뒤를 쫓아다니는 자가 아니다. 그의 독창성이란 니체처럼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분 나쁜 주제를 외면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다. 죽음은 얌전히 오지 않으며 기분 나쁜 폭력을 데리고 온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간혹 영웅들은 죽음을 하찮게 보는 듯도 하다.
사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우리와 같이 있지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산 사람도 만날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없다. 인간은 영원히 승리하는 숨바꼭질 놀이 속에 들어선 듯 죽음과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멸하는 영혼 없이 소멸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흔히 우리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며,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자아를 열망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해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일, 즉 삶이 있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있으면 더 이상 죽음이 공격할 삶이 없다는 생각은 죽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아무리 삶과 죽음은 마주칠 일이 없으며 죽음은 삶을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수긍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은 논리와 이성적 깨달음이 간신히 세운 수비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침입한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데 그치지 못하고 실제 죽어야 할 운명인 까닭이다.
삶의 ‘경계’로서 죽음을 염두에 둠으로써 우리는 삶의 좌표를 찾을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죽지 않는 자라고 생각해보라. 죽지 않으므로 시간을 다투어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다. 청춘의 시간을 아껴 쓸 필요도 없다. 왜 아끼겠는가? 죽지 않는 인간에겐 시간이 무한한데.
생명의 뿌리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 삶은 겉으로 다양한 방식의 쾌락을 추구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쾌락은 긴장이 모두 사라진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행위일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6 결국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7이 선택한 수단이 쾌락의 흥분이다. 고조된 긴장 상태로 올라가야만, 긴장이 소멸한 죽음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죽음은 존재 저편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존재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실은 우리의 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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